이선향(강원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선향(강원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5년의 틀이 남겨놓은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을 무렵, 사회적으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문제는 풀리지 않고 오히려 엉켜만 간다는 압박감이 심해질 때, 두 편의 영화가 생각났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2024, 감독 팀 밀란츠), 그리고 ‘멋진 세계’(Under The Open Sky 2022, 감독 니시카와 미와). 두 영화의 제목의 기억은 적어도 내게는 반전으로 남아 있었고, 다시 꺼내보았다. 영화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전혀 사소할 수 없는 선택과 멋지다고 할 수 없는 가혹한 세계의 현실이었다. 물론 두 영화는 ‘어둠 속에서 희망의 단서를 품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굳이 부인할 필요 없다.
내가 두 영화에서 집어낸 주제는 ‘시민’으로 살아내기이다. 대부분의 (주변)사람들이 수용하고, 묵인하고, 또는 인내하는(영화에 나온 표현이지만, 나는 ‘참아내는’이라는 표현을 주로 쓴다) 일상에 맞춰 살아내어야 사회(공동체, 지역사회, 국가 등등)에서 탈락하거나 낙오되거나 제거되지 않는다. 빌 펄롱은 어제까지 참아냈던 일상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미카미 마사오는 받아들여 지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참아내다가 결국 더 이상 버텨내지 못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영화보다 2023년 번역 출판된 클레어 키건의 원작을 먼저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영화가 원작의 그 미세한 섬세함의 동요와 긴장을 다 담지 못했다 말하기도 하고, 그 원작을 읽어내느라 힘겨웠는데 영화로 다시 고통받고 싶지 않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도 98분의 영화를 바탕으로 각자 되새기고 싶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실마리로 영화는 충분하다. ‘멋진 세계’의 소재는 통속적이라 할 만큼 특별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 영화도 살인 범죄로 13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실존 인물을 그려낸 원작이 있다고 한다. 범죄 전과자가 돌아온 현실 세계는 각박하고 차갑고, 영화처럼 그의 적응과 복귀를 응원하고 지원하는 이웃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는 매순간 부딪치는 현실 앞에서 불안하고 무력하다.
빌 펄롱이 가정과 일터를 꾸리면서 성실한 가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데는 어린시절의 불행을 보듬어 준 이웃의 보살핌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비록 불행의 기억이 문득문득 솟아오르고,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텅빈 마음의 구멍을 안고 살아가면서 말수도 점점 줄어들고, 이웃 아이들의 참담한 형편을 마음 찢어지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마을의 이웃들이 하듯이 적당히 모른척 하면서 크리스마스에 쓸 비용을 걱정하는 아내의 일상에도 적당히 맞춰주면서 살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고, 노후 준비를 하면서, 크게 걱정할 것 없다는 답을 하는 아내를 텅빈 표정으로 바라 보면서 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을 지배하는(어디나 존재하는) 권력으로 오는 동조와 묵인의 압력(크리스마스 선물로 포장된, 아내에게 꼭 필요한 돈봉투)에도 맞서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여기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결국 그는 손을 내밀어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마을 주민 거의 모두가 가는 길에서 내려왔다. 아내와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소할 수 없는 선택을 하면서 그는 그 사회에서 앞으로 어떤 존재로 살아가게 될까. 주변에 대해 손내밀기가 결코 사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현실에서 매일매일 그야말로 뼈저리게 절감한다. 누구는 ‘용기있는 선택’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나는 그 표현을 유보한다. 빌 펄롱에게는 굳이 용기가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마음먹고 용기를 내자라고 해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아이의 손을 잡은 것이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갇혀 굳어져 가던 그 무엇인가를 꺼내는 일이다.
‘멋진 세계’의 미카미 마사오의 어린 시절, 범죄, 그리고 출소 이후의 과정은 이미 많은 문학과 영화 등에서 새삼스러운 소재가 아니다. 그가 그 세계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이 그를 감싼다. 그 좋은 이웃들은 그에게 ‘우리를 봐서라도 참으라고, 참아야 하느니라’고 따뜻한(!) 압력을 가한다. 참아야 복귀가 가능하다. 시민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는 참아본다. 복지시설의 직원들이 장애 직원에게 폭력을 가하고, 폭력의 ‘합리적인’ 이유를 늘어놓을 때도 마음으로는 대걸레를 집어들어 그들을 때려눕혔지만, 참았다. 태풍 속에서 건네받은 코스모스 꽃다발은 그에게 숨쉬기 힘든 고통을 안겼고, 참아내다가 결국 그는 시민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하늘은 열려있지 않았고, 탁 트인 하늘에서 살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하늘은 같은 크기가 아니다. 태어나 자라면서 활짝 열린 하늘이 눈 앞에 늘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네모난 창 보다도 작은 하늘만 보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중등학교 시절 늘 들어야 했던 격언,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어떤 인내이고, 누구의 인내, 무엇을 위한 인내를 말하는 것인지 토론해보는 수업이기를 바랬지만, 이해가 안되니 그냥 외워야 했다. 이제 학생들에게 토론을 권할 자리에 있지만, 토론하고 싶어하지 않는 표정 앞에서 막막해질 때가 있다. 마지막 장면, 카메라는 열려진 하늘을 비추고 있다. 감독은 미카미가 열린 하늘로 훨훨 날아가기를 바란 것일까.
<정치와 문화>라는 수업을 하면서 민주주의가, 정치가 제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떤 마음(또는 관점)들인가를 생각해보자고 한다.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을 ‘시민’이라고 부른다면, 누가 시민인가, 어떤 시민인가, 시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등을 학생들과 수년째 토론하고 있다. 수업 자료 중 하나가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이다. 원제목은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이다. 마음이라는 개념으로 민주주의를 논의해보려는 시도는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주목받기 어렵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체제이자 가치이다. 사람, ‘시민’이 문제이고, 핵심이다. 책의 2장(저절로 시민이 된 사람의 고백)에서 저자는 시민의 조건(정치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 등)을 갖추고 태어나 저절로 시민이 되어있는 스스로를 성찰한다. 시민이 되기 위한 시험도, 위험에도 노출된 적이 없었다. 시민이 되는 길의 험난한 경로를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반성하는 흔하지 않은 책이다. 민주주의는 선거, 정당, 의회 그리고 사법부가 있다고 당연히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구성원, 즉 시민이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시민이 되기 위한 정치적, 사회적, 법적 조건부터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시민이 되는 길은 자동으로 열려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으로서의 덕목 -그것을 공중도덕이라 부르든, 시민윤리라고 부르든- 역시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시민은 일상의 경험과 환경을 통해 사회가 같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바람직한 결과에 닿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기 힘들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주변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온갖 유형의 폭력에 대응한 빌 펄롱의 손 내밀기는 하나의 돌파구로서 절절한 울림으로 남는다. 시민으로 살아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참아냈지만 단 열매는 구경도 못해보는 많은 다른 미카오 마사미에게도 언젠가는 멋진 세계가 활짝 열리는 날이 올까. 시민으로 살아남기... 시민의 범주는 너무 혼탁하고 복잡해졌고, 모두에게 ‘살아남기’만 남은 이 시절. 두 영화의 반향에 새삼 마음이 기운다. (2026. 1. 04. 이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