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사북> 항쟁의 기억과 여성의 형상

이헌미(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by 또 하나의 문화

<1980, 사북> 항쟁의 기억과 여성의 형상

이헌미(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박봉남 감독의 〈1980, 사북〉(2024)은 드물게 균형감과 섬세함을 갖춘 영화다. 탄광과 카지노라는 또렷하게 대비되는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가운데 얽혀 있는 기억들이 카메라 앞에 소환된다. 그 서사의 중심에는 황인욱이 있다. 지역 연구자이자 그 자신 사북항쟁의 피해자 가족인 황인욱은 날카롭게 부딪치는 가해와 피해의 목소리들을 끈기 있게 경청하면서 개인적 원한으로 치환된 과거를 국가폭력의 문제로 제기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내가 보는 것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정치에 대한 물음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값싼 노동력으로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는 군사적 성장주의 속에서 광부를 ‘산업전사’로 호명했다. 1980년대에 석탄 산업이 사양 궤도로 들어서며 광부들의 노동은 더 불안정해졌고, 위험은 일상화되었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사고와 죽음 속에서 ‘전사’의 몸은 소모되었지만, 그 몸이 정치적 시민으로 인정받을 통로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사북의 광부들은 단지 임금을 더 받기 위해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다. 어용노조를 거부하고, 작업장의 규칙을 바꾸고, 자신들의 삶을 결정하는 방식 자체를 다시 쓰려 했다. 요컨대, 살기 위한 투쟁의 인간학이 여기 있다.


그러나 그 정치가 작동하리라는 희망을 주었던 ‘서울의 봄’은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계엄사령관이 불법적으로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하고, 실재하지 않는 북한의 남침 위협을 빌미로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환상으로 판명된다. 사북항쟁은 1980년 4월 16일에서 4월 24일까지 진행되었고, 5월 6일 정선경찰서에 계엄사 합동수사반이 설치되면서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불법 연행과 고문, 폭행이 시작된다. 노동의 정치가 치안 사건으로 번역되고 폭동으로 명명되는 구조, 시민이 되려는 시도 자체가 불법화되는 구조 속에서, ‘정당한 봉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서부터 내가 가진 의문은 더 깊어진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노동자의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는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왜 사북항쟁에서,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와 지장산 사택의 여성들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로만 호명되는가. 탄광촌의 여성들이 ‘가족’으로만 존재했을 리 없다. 광부는 갱내 노동을 담당한 남성 일변도로 표상되지만, 석탄에서 잡석·이물질을 골라내는 선탄 공정은 여성 노동자가 주로 맡았다. 또한 탄광은 작업복·장비·세탁·수선·목욕·구내매점 등 여러 시설로 굴러가는데, 이런 공간에서 누가 일했겠는가? 여성들은 탄광 경제의 하부구조적 노동자였고, 주민으로서 항쟁의 조건을 함께 감당했으며, 어떤 여성들은 분명 항쟁의 행위자였다. 그런데 영화가 포착하는 여성의 자리에서 가장 또렷해지는 것은, 여성이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는 순간이 아니라 여성이 폭력의 대상으로 호출되는 순간들이다. 지부장 아내에게 가해진 성폭력적 린치, 항쟁에 참여한 부녀회장과 탄광촌 여성들에게 가해진 성고문. 여성은 다시 한번, ‘투쟁의 내부’가 아니라 ‘사건이 남긴 상처’로 배치된다.

영화는 이 문제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는다. 황인욱은 항쟁 지도층에게 지부장 아내에 대한 린치를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영화 말미에 이원갑 씨가 지부장 아내 김순이 씨에게 사과 편지를 쓰는 장면이 스치듯 지나간다. 그러나 그 편지는 전해지지 않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대목은 중요하다. 사과가 봉합의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봉합되지 않음의 증거로 남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뒤 계속 맴돌았던 장면은, 황인욱이 성고문 증언을 보며 "그 여성 중 누군가는 내 친구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나는 이 말에서 연대의 심리적 출발점을 이해한다. 그러나 동시에 묻게 된다. 연루와 공감과 연대가 결국 이런 식이어야 할까. 우리는 왜 누군가가 ‘내 친구의 어머니’일 때에야 비로소 그 폭력을 현재형의 현실로 받아들이는가. 왜 여성의 고통은 ‘누구의 가족인가’라는 관계의 언어를 거쳐야 정치적 폭력이 되는가. 사북을 다시 읽는 일은 국가폭력의 진실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자발적 정치가 어디서 좌절되었는지, 그리고 그 정치가 젠더를 어떻게 통과하지 못했는지를 함께 묻는 일이어야 한다. (2026. 1. 04. 이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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