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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일멘토 Apr 06. 2019

피파랭킹 121위, 북한 축구의 속사정

전 북한 축구선수가 전하는 북한 스포츠 (작성: 데이비드 정)

* <직접 듣는 북한 이야기>는 통일멘토 프로젝트팀이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북한 출신 청년들이 직접 작성하고 프로젝트팀이 함께 편집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정:

북한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  

과 축구대표팀 선수이자 직접 만든 남북단일팀 축구 동호회 주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북한 축구 및 스포츠에 대해서 브런치에 연재할 예정이다.



피파랭킹 121위 북한의 축구를 알아보자!


가깝고도 먼 곳인 북한! 쉽게 갈 수 없는 그곳,

말로만 전해 들을 수밖에 없는 북한에도 축구라는 스포츠가 있다.



북한축구 국가대표팀.




북한의 프로축구리그? 1급 중앙체육단!


북한에도 한국의 K리그와 비슷한 프로축구팀이 존재한다.

체육단이라고 불리는 이 팀들은 1급(중앙체육단)으로 불리며 대략 15개 정도이다.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국가가 많이 부담해 주는 편이다.



하지만 중앙체육단까지 발탁이 되려면 경제적인 뒷받침은 물론
뛰어난 실력, 든든한 빽까지 받침 되어야 한다.



2부 리그 격인 2급(도 체육단)들은 각 도에서 관리되며 경제적인 비용은 본인 부담이다.

실력에 상관없이 빽만 있어도 갈 수 있다.

물론 실제 경기에 뛰는 선수들은 실력이 되어야 뛸 수 있고 이 선수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각 시, 도, 군의 체육지도위원회 소속인 청소년체육학교(일명 구락부)라는 곳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온 선수들이다.


대학축구팀은 2부 (2급)에 속해있다.

사범대학에 축구학과가 있어서 졸업과 동시에 체육교사나 감독(지도원)으로 임명되며 실력이 좋은 경우에는

중앙체육단 1급으로 스카웃 되는 경우도 있다.



세레모니하는 북한 축구선수


3부 리그, 3급은 각 공장 기업소에 있는 실업팀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대부분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 중반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릴 적에 학교 축구부나 도 체육단에서 뛰다가 은퇴한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실업팀이라고 하면 돈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쌀 1Kg에 6천 원 정도 하는데 북한 노동자들의 월급은 1천5백 원에서 3천 원이다. 다시 말하자면 북한은 월급으로 먹고사는 사회가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이해가 안 되겠지만 북한은 1994년 이후부터 배급체제가 붕괴되면서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월급제도는 존재하지만 이제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해외에서 뛰는 한두 명의 선수를 제외하면 북한 축구선수들은 정말 축구가 좋아서 뛰는 선수들이라고 보면 된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명예를 위해서 뛰고 있으며  이를 위해 뛰다 보면 국가에서 인정해 주고 직업은 물론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까지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사실 필자도 펠레와 마라도나 같은 선수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접하고
그들처럼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축구를 시작하였다.

 


부모님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공부와 축구를 함께 병행할 수 있다고 겨우 설득하고 시작하였다.

하지만 집안 살림이 녹록지 않았던 탓에 남들처럼 호강하면서 뛸 수는 없었다.

 

북한의 축구구장은 천연잔디는 물론 인조잔디구장도 흔치 않아서 맨땅에서 훈련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운동화나 양말이 성할 날이 없었다. 한 달에 한번 새것으로 갈아야 했고 운동복은 무릎이 빨리 나가다 보니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심장이 크게 뛰었다.


빈민가에서 자란 마라도나를 다룬 책에서 크지 않은 신체로 장신 선수들과 대결하는 모습이 마치 사자가 열대림 속의 숲을 달리는 것을 연상시킨다는 글귀는  나로 하여금 축구에 더욱 매료되게 만들었다.

그는 나의 우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해야 되는 인생의 또 다른 시작점의 기로에 섰다. 선택을 해야 할 때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은 현실과는 멀리 동떨어진 동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냉정한 현실 앞에서  체육단으로 갈 것인지? 대학교로 갈 것인지? 군대로 갈 것인지 나는 선택해야 했다.

내가 원했던 곳은 중앙체육단이었지만 그곳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중앙체육단이 나를 원해야 그곳으로 갈 수 있다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뒤늦게 깨달았다.


2 부급(도 체육단)에 가려니 경제적으로 부담스럽고, 대학교로 가려고 해도 역시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컸다.

결국 군대로 나오게 됐고 축구를 정말 순수하게 한없이 좋아했던 그 어린 꿈나무의 날개는 한차례 꺾이게 되었다. 하지만 같이 선수로 활동했던 친구들 중에는 2 부급으로 갔던 친구들이 꽤나 있었고 대학교로 진학한 친구들도 꽤 있었다. 중앙체육단으로 갔던 선수는 위의 선배 중에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선배는 정말 축구 그 자체여서 가능했던 것 같다. 나머지는 모두 군대에 갔고 한두 명 남은 친구들은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면서 선수로 뛰는 선수들도 한두 명 있었다. 이것이 평범한  북한 유소년 축구선수들의 성장과정과 결말이라고 볼 수 있다.


* 더 좋은 환경에서 축구 유학까지 갈 수 있었던 선수들은 또 다른 과정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덧붙이고 싶다.



 

북한 출신 최초 세리에 A 선수, 인민 날두(?) 한광성!


현재 세리에 A에서 뛰고 있는 북한 축구스타 한광성 선수


조총련계 선수들의 유럽 진출 사례는 있었지만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선수들의 유럽 진출은 매우 드물었다.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선수 최초로 한광성 선수가 유럽에 진출하였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뛰며 일명 "인민 날두"로 불리고 있다.  


북한은 2010년 많은 유소년 선수들을 유럽으로 축구 유학을 보냈다. 이 중에 한 명이 한광성 선수이다.

북한에서 외국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교관 자녀들이나 고위층 계급이라고 볼 수 있다.

철저한 사상교육으로 인해 외부 문물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사상적 무장을 잘한 사람들, 다시 말해 검증된 사람들만 외국으로 유학이나 출장을 다닐 수가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서도 북한 당국은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철저한 감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한광 선수는 엄청난 과 엘리트 교육, 축구실력까지 갖춘 선수라고 볼 수 있다.


한광성 선수는 북한의 중앙체육단인 4.25 체육단 유소년 팀 소속으로 알려져 있다.

축구 유학을 마치고 북한으로 잠깐 들어갔다가 김정은과 친분이 있는 이탈리아의 상원의원 안토니오 라치의 주선으로 세리에 A의 칼리아리 칼초에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게 된다. 세리에 A에서 골을 기록하자 유벤투스 및 토트넘 등 세계적인 빅클럽들도 관심을 보였다.  지금은 무릎 부상으로  예전의 폼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쉽지만  빅클럽들의 러브콜은 잠시 뒤로 미뤄졌다.




북한의 월드컵 스토리


북한의 축구 국가대표는 1급 중앙체육단 선수들과 조총련계 선수들로 구성되어있다.

재일동포는 한국계열의 민단(재일본 대한민국 민단)과 북한 계열의 조총련으로 나뉘어있다.  

조총련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줄임말로 북한 국적을 가지고 있거나 북한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재일동포 단체이다.


북한 오래전부터 일본에 조선학교를 세우고 운영을 지원해왔다. 정대세와 양학영,  19세 한국 대표 예비후보에 선발된 적 있으나 나중에 일본으로 귀한 이충성(리 타다나리)도 조선학교 출신이다.

(이충성 선수는 2011년 아시안컵 결승전 연장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일본을 우승시켰다.....)


조총련계 재일동포는 축구뿐  아니라 다른 종목의 북한 국가대표가 되기도 한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아시아 국가 최초 8강!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아시아 국가 최초로 월드컵 8강까지 가는 역사를 썼지만 점점 퇴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당시 북한은 천리마 축구단이라는 공장 축구의 팀이 존재했고 이는 현재 북한 축구팀보다 더 저력 있는 팀이었다.


소련과의 조별 첫 경기에서 3대 0으로 패했지만 칠레와의 두 번째 경기는 1대 1 무승부로 비겼다.

세 번째 경기는 월드컵 우승 경력이 있던 이탈리아와 진행하였는데 기적처럼 1대 0으로 승리하고 8강에 진출하였다.


북한과 포르투칼의 8강전에서 에우제비우 선수가 골 넣는 장면   ⓒ AP



포르투갈과 8강전에서 만났는데  전반 24분 동안 북한이 세 골을 넣어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포르투갈의 전설 에우제비우 선수가 4골을 넣고 호세 아우구스토가 1골을 더 추가하여 3대 5로 졌다. 이 경기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CNN이 선정한 역대 월드컵 10대 명승부에 꼽히기도 하였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44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

인민루니로 불리던 정대세 선수를 기억할 것이다. 양영학 선수와 함께 조총련계 북한 국가대표 축구선수이다. 당시 포르투갈의 호날두를 만나 고전하였지만 분투하는 모습은 기억에 남아있다.


44년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 된 북한대표팀의 2010년 사진



 북한은 당시 포르투갈전은 생중계해주지 않았다. 뭐든지 승리해야 하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보여 줘야 하는 북한은 이미 패배를 예상했는지 모르겠지만 2010 월드컵은 조용히 잊혀 갔다. 하지만 당시에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본선 진출과 함께 11명의 선발 선수들로 만들어서 곳곳에 붙였던 포스터들, 그 11명 중에 최전방 공격수였던 정대세 선수를 보면서 부러움과 동시에 노력만 하면 대표팀 발탁도 가능하겠다는 희망도 엿보았다. 사실 정대세 선수는 월드컵 대표로 뛰면서 유명세를 타게 된 선수는 맞으나 그 정도의 잠재력을 갖고 있을 줄은 사실 몰랐기에 가능했던 생각이었었다.


2019년 3월 현재, 북한의 피파랭킹은 121위로  27위 일본,  38위 한국,  72위 중국보다 한창 뒤쳐져 있다.



2006년 러시아월드컵 우승한 여자축구팀


북한 남자축구는 121위지만
피파랭킹 12위에 당당히 랭크되어 있는 북한 여자축구,
다음 시간에는 북한 여자축구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통일멘토 프로젝트팀>

통일멘토 프로젝트는 청년 모임인 상상 공작소와 시민단체인 사회정의시민행동과 함께 합니다. 

사회정의시민행동 : http://www.casj.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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