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보다 끔찍한 이슬람 명예살인
명예살인(honor killing)이라는 풍습이 있다. 이슬람권 국가, 특히나 중동 지역의 악습으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가족 구성원들을 살해함으로써 가문의 명예를 되찾는 것인데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다. 비교적 문명화되고 세속화된 지역에서는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곳에서 명예살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왜 '추정'이냐면, 실제로 명예살인이 얼마나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 농촌에는 '서리'라는 문화가 있었다. 참외서리, 수박서리 등으로 보통은 서리의 대상이 되는 작물이 앞에 붙어서 얘기되곤 하는데, 장년층에게는 추억의 대상이지만 현대의 개념으로는 '농산물 절도'다. 그저 동네 애들이 밭에서 참외 몇 개 훔쳐먹는 정도이니, 동네 주민들도 굳이 절도랍시고 경찰을 부르거나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실제로 서리가 얼마나 일어났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슬람권의 명예살인도 딱 이런 수준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묵인하기에 범죄 신고도 없고 피해자도 없다. 행실을 잘못했다는 의심을 받는 여자가 생기면 아버지나 남자 형제가 나서서 조용히 가문의 수치를 제거하고, 마을에는 명예로운 가문들만 남는다. 이 책 <명예살인>(원제: Burned Alive)은 명예살인의 생존자가 썼다.
저자인 수아드는 팔레스타인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혹독한 아버지의 채찍질과 강도 높은 노동을 견디다 우연히 이웃집 남성과 사랑에 빠지고, 그 사실이 발각되자 산 채로 불에 태워진다. 다행히 도주에 성공했지만 전신에 중증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다 한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지금은 유럽에서 가명으로 지내며 이슬람권의 명예살인에 대한 증언을 이어가고 있다. 왜 가명이냐고? 실명으로 그렇게 증언을 했던 여성이 실제로 사망한 사례가 있어서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쫓아와서 기어코 가문의 수치를 지우려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으니까. 책은 그런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점은, 이슬람 문화권의 정말 심각한 남존여비 문화였다. 나는 '보수의 심장'이라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상도 밖에서는 단순히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라 보수의 심장이라고 이해할지도 모르겠으나, 가정 내 문화에 있어서도 경상도 지역의 보수성은 짙다. 다행히도 부모님께서는 그런 수구적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거부하시는 분들이셨지만, 직간접적으로 겪은 경험들만 돌이켜봐도 심한 것들이 많았다.
예들 들면, 나는 고스톱을 외할머니께 배웠다. 화투를 칠 줄 아시는 분이면 아시겠지만, 고스톱은 3점을 먼저 내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그런데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꼭 애매하게 2점이 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께선 "아이고, 딸이네 딸이야"라고 외치셨는데, 나는 그게 "(아들 대신) 딸이네"라는 것을 머리가 굵어지고야 알게 됐다. 정작 외할머니 본인께선 아들만 챙기는 그 세대의 전형적 할머니가 아니셨지만, 그 또래 분들에게 딸은 언제나 아들보다 약간 아쉬운, 결국 게임을 이기지는 못하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보수성이 짙다는 대구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책의 내용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몇몇 대목을 옮기자면 이렇다.
여자들은 보통 신발을 신지 않고 결혼한 여자만 신지만 우리 어머니는 결혼한 여자이면서도 신지 않고 다녔다. 그래서 우리가 들에 나가면 발에 가시가 찔려 땅바닥에 앉아 그것들을 뽑아내고 따라가야 했다
나는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맨 다리를 드러내고 보도 위를 활보하는 것을 보고 쇼크를 받는다. 그런 애들과 마주쳤다면 나는 그 앞에서 침을 뱉었을 것이다. (···) 나는 왜 저애들을 집에 가두어 두지 않는 것인지 의아스러웠다
(남동생 아사드는) 아버지가 안 계실 때 나를 때리기도 했고, 한 번은 엄마한테 손찌검을 하기까지 했다. 말다툼을 하다가 아사드가 엄마의 머리채를 잡아챘고 엄마는 울음을 터트렸다.
고향에서는 단 두명의 소녀만이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이웃사람들은 그애들을 비웃었고 나도 놀렸다. 언니는 여자가 교육을 받으면 절대 신랑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 했고 나도 그대로 믿었었다
이게 유독 충격적인 것들만 모은 것이라면 좋겠지만, 위의 인용구들은 이 정도로 일상적인 수준에서도 여성에 대한 억압이 만연하다는 것을 위해서 가져온 것이지 정말 끔찍한 것들은 따로 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런 억압의 피해자인 여성들이 되려 그 억압을 유지-강화하는 것에 열심히라는 점이다. 명예살인의 피해자가 된 수아드 본인도 책에다 과거 본인이 가졌던 생각들을 담담히 서술한다. 저 애는 행실이 나쁜 '찰무타'니까 죽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저런 일을 하지 않을 거니 괜찮다, 저 애는 찰무타 아닌가 등등. 구조적 피해자가 재차 구조적 가해자로 변모하는, 소위 '명예남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명예 남성이라는 게 유독 특이한 건 아니다. 나는 이런 고통스러운 윤리를 감내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너는 어찌 그걸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냐는, 지금까지 그걸 준수하며 산 나는 뭐가 되냐는 잘못된 방향의 분노 표현일 뿐이지. 여자만 그럴까? 나는 선배가 부르면 제깍제깍 나가서 술 상대도 해드리고 시중도 드는데 저 새끼는 왜 그런 걸 한 번 하지 않냐, 빠져가지고. 나는 주말 반납하고 등산도 다 따라가는데, 저 새끼는 매번 핑계만 대면서 저런 행사 한 번을 나오질 않네, 빠져가지고. 그럼 그걸 참고 견딘 나는 뭐가 돼? 그냥 우리 주변에도 무척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렇게 무슬림 여성들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끔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문화적, 종교적 상대주의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게 '인권'에 대한 합의를 무너트리는 수준까지 나아간다면, 단호한 비판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런 언급들이 나오면, 이슬람에 대한 혐오를 부추긴다는 비판들이 제기되니 참 답답할 따름이다. 사회적 약자도 또 다른 약자들을 억압할 수 있고, 그네들에게 억압받는 이들은 더 비참한 상태일 텐데 왜 그걸 가해자가 약자란 이유만으로 외면해야 하는가. 언젠가 강준만이 말했듯,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 우기는 이들과 싸우는 시대는 참 불행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