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조 Dec 16. 2017

앎에 접근하는 방법

강익중 : 내가 아는 것 전시 리뷰

제 1관 - 무엇을 알고 있는가

 전시의 제목은 작가가 대중들에게 건네는 첫인사이자 질문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격적으로 전시를 감상하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정보라는 바다 위에 뜬 작은 조각배처럼 앎이란 방대함 앞에 인간은 자꾸만 위태로워진다. 알파고의 등장이 그러했고 인간은 두려워했다. 어떤 이는 앎이란 행위 자체를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겸손과 부끄러움이라는 미덕으로 앎을 대했다. 나의 경우,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앎이란 영역 앞에서 나는 항상 부끄러운 무(無)였기에. 

 ‘엄마 말씀을 잘 듣자.’ 전시회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문장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무겁게 느껴졌던 앎이라는 권위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곳에서 말하는 안다는 것은 어느 책이나 논문, 강의에서 들어본 이론이나 진리가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습득한 지식이나 지혜가 하나하나 축적되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의 영역이 된다. 작가가 구성해 놓은 거대한 ‘앎’의 상징적 공간은 2300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직접 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사람이 재산이다’, ‘인생은 초행길과 같아서 누구나 헤맬 수 있다’ 같은 격언과 명언이 있는가 하면 ‘카페에 공부하러 가면 폰만 하다 나온다’, ‘야식은 치킨’ 등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일상적 생활을 담은 재밌는 말도 있다. 주목할 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있는 작은 항아리다. 겉으로만 보면 문장을 종결짓고 구분하는 역할만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강익중 작가에게 항아리는 마침표가 아닌 덧셈이자 화합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항아리는 단 한 번의 물레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으로 나뉘어 만들어진 도자기를 위아래로 붙였을 때 비로소 항아리를 만들 수 있다. 작가에게 이러한 항아리의 제작 과정은 화합의 의미로 해석된다. 결국 항아리는 문장과 문장을 잇는 연결고리이자 사람과 사람의 생각이 모여 화합의 장을 만들 수 있다. 항아리의 존재 때문인지 독특한 구조의 전시회장이 마치 도자기를 굽는 가마니 안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안 사실에 의하면 이 구조는 불국사의 석굴암을 본 따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앎을 담은 이 공간이 석굴암처럼 영험한 기운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고.)

 전통적 영역에서 예술은 작품으로서의 대상을 생산했다. 하지만 점차 예술은 예술을 둘러싸고 있는 작가, 관객, 예술작품과 예술 외적인 요소(메시지, 권력, 자원 등)가 함께 작용함으로써 비로소 생산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대중이 예술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뉴미디어의 등장은 그것을 더욱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이번 강익중의 전시는 대중이 작품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대중과 작품의 일체화를 보여준다. 대중이 작품이며 작품이 곧 대중이 된 것이다. 앎으로의 여행은 2300명의 문장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간 가운데에 마치 불상이 놓인 것처럼 컴퓨터 한 대가 놓여있다. 모니터로 작가는 끊임없이 관객들의 ‘아는 것’을 유도한다. 

 작가가 미디어로 모은 메시지는 의미 있는 정보의 집합체다. 의미 있는 정보는 의사, 즉 의미 있는 언어적 표현이다. 의미 있는 언어적 표현이란 결국 우리가 가진 생각의 외연이며 생각은 언어로 이루어진 구성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한 번이라도 말의 개입 없이 생각한 적이 있는가? 물론 우리가 말로 치환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은 분명 남아있으나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선 논외로 하겠다. 작가가 만든 공간은 수많은 사람의 언어로 둘러싸여 있다. 언어들이 모여 있는 이 공간은 생각의 집합이며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담은 거대 공간은 곧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대변한다.

Hanne Lippard, "Flesh," installation view at 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Berlin (2017)

 올해 초 베를린으로 여행을 갔을 때 방문했던 KW 인스티튜트(KW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의 전시가 문득 떠올랐다. 작품이라고 할 만한 그림이나 조각품은 없었고 다락방 같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거대한 원통계단 하나만 있었다. 마치 ‘진실의 계단’ 같았던. 그곳을 올라가면 정해진 시간마다 언어를 담은 긴 음성을 들려준다. 언어라고 해서 특정한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I DO, I DID, I DON’T, I DIED 같이 비슷한 발음의 문장을 연속적으로 읊거나 ‘오늘 네가 한 일이 숨 쉬는 것뿐이었어도 괜찮아’ 같은 메시지를 담기도 했다. 강익중 작가가 만든 공간은 사람들의 언어를 시각적으로 제시했다면 그곳은 청각적으로 접근한 방식이었다. 언뜻 들으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모호한 의미들과 그것을 담는 고요한 공간이 어째서인지 큰 감동으로 느껴졌다. 뒤에 가야 할 전시를 모두 포기하고 같은 음성을 세 번 반복해서 들었다. 나중에 전시장을 나온 뒤, 이 전시에서 왜 그렇게 감동과 위로를 느꼈는지 생각해 보았다. 분절적으로 제시되는 언어 사이에 언어로부터 떠올린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말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기도 하고 또 다른 말로 위로받기도 하며 텅 빈 공간을 내 생각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강익중의 공간도 그런 것이 아닐까. 부유하는 언어들은 곧 관객의 생각이 되어 공간을 다시 메운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읽는다. 비평가 벤야민은 예술작품에서 추구하는 지식이 초역사적이고 영원한 지식이 아닌 역사 철학적 인식으로서 인식 주체의 ‘현재성’이라 말한다. 탄생한 시대 속에서 그것을 인식한 시대를 기술하는 것이 예술작품에서 캐물어야 하는 진정한 의미라는 것이다. 작가는 시대를 인식하기 위해 앎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덜 중요하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일상적 지식과 지혜에 대해 연구했다.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경의”의 태도는 “개별 구성물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구체적인 토대가 되어 “현재의 살아있는 관심사”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쉽고 평범한 앎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훨씬 잘 와 닿으며 공감할 수 있다. 나라는 역사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축적한 진리는 이렇게나 많고 중요하다. 개인의 앎이 모여 전해지는 따뜻한 말의 온기들로 우린 이 시대를 알아내는 중이다.      



    

2관 - 어떻게 배울 것인가

    잭슨 폴록의 작품에 대해 아무리 많이 배웠다 하더라도 내 머릿속의 어느 한 구석에선 분명 이 생각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몬드리안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추상미술이라 분류되는 작품들엔 항상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작가는 무얼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어떤 부분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거지? 답안지를 몰래 보는 학생처럼 작품을 느끼기도 전에 검색한 자료나 논문이나 강의를 통해 어떻게든 먼저 알려했다.

    이런 태도는 강익중 작가에게 진정한 배움이 아니다. 작가는 우리에게 진짜 배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다. 1관에선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집중했다면 2관에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내가 단순히 ‘알고’ 있는 그 상태의 이상, 배움과 실천에 주목했다. 1층에 나열된 ‘앎’이 어디서 배운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것들은 과연 교실에서, 책상에서 누군가에게 배운 것인가. 아니다. 진짜 내게 ‘앎’이 된 것은 수동적으로 얻은 정보가 아닌 스스로 실천하고 체득한 것들이다. 그래서 작가는 관행적으로 여겨진 배움의 공간, 배움의 주체와 객체 모든 것을 허물어트린다. 지식을 전달하는 자만이 설 수 있었던 강단은 무대가 되어 누구라도 오를 수 있다.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자발적으로 음성을 듣고, 화면을 본다. 그리고 그 화면에 담긴 사람들도 예술을 가르치려는 사람이 아니다. 기존의 예술 교육 방법에서 탈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3일간의 예술 캠프를 담은 영상이었다. 고민을 나누면서 ‘앎’을 공유하고 음악을 들으며 악보에 영감을 담아 ‘앎’을 확장시켰고 일상적으로 행동하는 우리 몸이 어떻게 춤이란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지 ‘앎’을 체험하는 과정이었다.                      

 이 공간은 사실에 대한 ‘앎’에 집착하지 않는다. 8개의 원형무대로 이루어진 이 배움의 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결국 나의 실천이며 나에게로의 집중이다. 직접 행동하는 도중에 발견한 나를 통해 내가 진정한 ‘앎’에 다가가기 위해선 나는 어떤 나만의 방식을 써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한다. 물론 관객 자발적으로 말이다. 

 무대에 앉아 있을 때 예전에 어느 면접에서 휴학 기간 동안 무슨 일을 했냐고 질문받은 기억이 생각났다. 나는 나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구실 좋은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생각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스스로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내가 가장 마음의 안정을 찾는 장소는 어디인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진심으로’ 좋아하는 취미는 무엇인지. 자기만의 색깔을 점점 잃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사는 곳을 여행했다. 내 사소한 것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포착하려 했다. 그렇게 과거의 나도 실천을 통해 나를 배워간 것이다.

 3일간의 예술캠프를 항해 일지라고 표현한 전시 내 책자의 글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이 전시장을 나오면 당장 우리는 또 많은 지식과 지혜, 사실과 진리, 또 그것들의 왜곡 사이에서 힘겨운 항해를 이어나가야 한다. 언제까지 이 항해를 계속해나가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함몰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 배웠으니 이것이야말로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앎’ 아닐까. 


 - 

사실 전시는 11월 18일에 끝났고(ㅎ) 나는 이 글을 한 달이 다 돼가서야 올린다. 시간 정말 빨리 간다. (시간 탓)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라는 이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