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_12. 문제의 세계에서 가능성의 세계로

해결된 세계가 남긴 공백

by 토니샘

모든 것이 편리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왜 더 피곤해졌을까.

선택지는 넘쳐나는데,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문제가 해결된 세계’가 남긴 공백 한가운데에 서 있다.


금요일 밤 9시, 넷플릭스 앞에서

금요일 저녁 9시.

한 주의 피로를 풀기 위해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를 켰다.

화면에는 수천 개의 콘텐츠가 펼쳐졌다.

그러나 나는 30분 동안 스크롤만 내렸다.


“이건 이미 봤고.”

“이건 별로일 것 같고.”

“이건… 나중에.”


결국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예전에는 비디오 가게에 선택지가 많아야 300개 정도였다. 그런데도 10분이면 하나를 골랐다.

지금은 무한한 선택지가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다.

문제는 콘텐츠 부족이 아니었다.

의미의 부족이었다.


‘무엇을 볼까’보다

‘왜 봐야 하지?’라는 질문이 더 어려워진 것이다.


우리는 '문제의 세계'에 살고 있다

2016년, 삼성을 떠나 SADI로 자리를 옮긴 뒤

나는 학생들과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늘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프로젝트의 문제 정의는 무엇인가?”


학생들은 사용자를 관찰하고,

불편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제안했다.


공감 → 정의 → 발상 → 프로토타입 → 테스트.

IDEO의 디자인 씽킹은 지난 20년간 디자인 교육의 표준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마음 한편에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항상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만 묻고 있을까?”


Design Thinking이 놓친 것

디자인 씽킹은 분명 위대한 방법론이다.

수많은 기업과 조직의 혁신을 이끌었고, ‘디자인처럼 생각하기’라는 사고방식을 확산시켰다.


물론 문제 해결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며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Design Thinking은 정말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가,

아니면 현재의 문제를 더 정교하게 다루는 훈련에 머무는가?


삼성에서 Galaxy S를 만들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우리는 매일 아침 회의실에 모여 물었다.


“사용자가 불편해하는 게 뭐지?”

“메뉴를 더 단순하게 만들 수 없을까?”

“이 버튼, 여기 있으면 찾기 어렵지 않을까?”


우리는 문제를 집요하게 해결했고, 그 결과 Galaxy S는 전 세계 수억 명이 사용하는 제품이 되었다.

그러나 성공의 이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남았다.

우리가 만든 혁신은 언제나 ‘더 나은 버전의 현재’였다.

전혀 다른 미래는 아니었다.


문제를 정교하게 정의할수록, 해답의 범위는 오히려 좁아졌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본질적으로 사고의 지평을 제한한다.


해상도 전쟁의 허무함

Galaxy S2, S3로 이어지던 시절, 업계는 해상도 경쟁에 돌입했다.

누가 더 높은 해상도를 구현했는지가 혁신의 기준처럼 다뤄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용자가 구분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경쟁은 멈추지 않았다.

출시 모드는 낮은 해상도로 설정해 두고, 원하면 ‘최고 해상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왜일까.


높은 해상도를 기본으로 하면 배터리 소모가 커져

‘하루 한 번 충전’이라는 사용자 경험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사용자를 위한 혁신이 아니라 마케팅을 위한 혁신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혁신은 이미 포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더 얇게, 더 빠르게, 더 밝게.

그러나 사람들의 삶은 그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과잉의 시대, 효율의 시대, 연결의 시대

과잉의 시대: 선택이 속박이 되다

넷플릭스, 유튜브, 스포티파이.

우리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무한한 선택지는 자유가 아니라 피로가 되었다.


예전에는 콘텐츠 부족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의미의 부족이 문제다.

정보의 과잉은 곧 의미의 결핍으로 전환되었다.


효율의 시대: 인간이 사라지는 자동화

스마트홈 기술은 불편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시스템은 점점 완벽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완벽함 속에서 인간은 점점 ‘참여할 자리’를 잃고 있다.


2016년 여름, 캐나다 밴쿠버에서 IKEA 침대를 조립한 적이 있다.

번거롭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완성했을 때 묘한 뿌듯함이 밀려왔다.


친구는 그 침대를 볼 때마다 말했다.

“이거,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불편함과 수고의 경험이 오히려 의미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른바 ‘이케아 효과’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돌아갈수록,

우리는 편리함과 함께 존재의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연결의 시대: 더 가까워졌지만 더 외롭다

SNS는 전 세계를 연결했다. 언제든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연결의 과잉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외로움을 느낀다.

"연결"은 많아졌지만, "관계"는 오히려 얕아졌다.


즉각적인 반응은 넘쳐나지만,

깊은 대화의 공간은 줄어들었다.


결핍은 사라졌지만, 목적도 사라졌다

이 모든 현상에는 하나의 공통된 질문이 숨어 있다.


결핍이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할 것인가?


문제 해결은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완성은 동시에 인간의 존재 이유를 흐리게 만들었다.


일은 자동화되고, 선택은 알고리즘이 대신하며, 관계는 디지털화되었다.

모든 것이 가능해졌지만,

그 ‘가능함’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제 우리의 불안은 결핍의 불안이 아니라 방향의 불안이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아있다.


SADI에서 던진 다른 질문

SADI로 옮긴 후,

나는 학생들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가 아니라

"이 기술로 어떤 삶이 가능해질까?"


그 질문은 전혀 다른 상상을 불러왔다.

자동화 이후, 덜 일하는 시대의 삶의 리듬을 설계하는 서비스

능력은 강화되지만 균형은 깨지는 미래에서, 일상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동행형 AI

회의와 협업의 맥락을 읽고, 말보다 먼저 이해를 준비하는 AR 글라스

잉여 여가 시대에, 몸과 관계를 회복시키는 여가 큐레이션


이것들은 단순한 문제 해결이 아니었다.

존재하지 않던 가능성을 미리 그려보는 시도였다.



문제 해결이 아닌 '의미 회복'으로

이제 디자인은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기술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더 편리하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살아 있는 경험을 회복할 것인가?”


여기서 ‘가능성 디자인’은 사고의 방향 전환을 제안한다.


결핍을 전제로 한 문제 해결에서, 잠재를 전제로 한 가능성 창조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서 “무엇이 될 수 있는가?”로.


디자이너의 새로운 정체성

'해결된 세계' 이후의 디자이너는 더 이상 “무엇을 고칠까?”를 묻는 사람이 아니다.

“무엇이 가능할까?”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문제 해결자(problem solver)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구체화하는 개척자(possibility pioneer)로 이동한다.


한때 스마트폰의 UI를 개선하는 것이 혁신이었다면,

이제는 스마트폰 이후의 삶의 경험 자체를 새롭게 그리는 것이 과제다.

디자인의 초점이 "물건에서 인간의 가능성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해결된 세계 이후,

디자이너는 더 이상 문제 해결자에 머물지 않는다.


디자이너는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구체화하는 개척자가 된다.


한때는 스마트폰 UI를 개선하는 것이 혁신이었다.

이제는 스마트폰 이후의 삶 자체를

다시 그리는 것이 과제다.


디자인의 초점은

물건에서 인간의 가능성으로 이동하고 있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살고 있는가?

지금, 당신은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아니면

“무엇이 가능한가?”


회의실에서, 프로젝트에서, 일상에서—

어떤 질문이 더 자주 들리는가.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문제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가능성의 세계로 이동해야 한다.

그곳에서 가능성 디자인은 시작된다.



다음 이야기:

문제의 세계에서 가능성의 세계로 이동하려면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EP_13 「문제 해결에서 가능성 창출로」에서는

산업을 바꾼 대표적 혁신 사례를 통해

이 전환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디자이너의 역할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