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세상이 원리로 움직인다고 믿는다.
중력이 있어서 사과가 떨어지고,
수요와 공급이 있어서 가격이 움직이고,
원칙이 있어서 조직이 굴러간다고.
원리가 먼저고,
현상은 그다음이라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실은 반대에 가깝다.
우리는 현상을 먼저 본다.
그리고 반복되는 현상 속에서 패턴을 발견한다.
그 패턴을 논리로 묶는다.
오래 살아남으면 그것을 원리라고 부른다.
뉴턴의 역학은 한때 세계의 법칙이었다.
그러나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고,
양자역학이 등장했다.
아인슈타인조차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세계가
결국 물리학의 한 축이 되었다.
원리는 영원하지 않다.
원리는 충분히 오래 지속된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AI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전문가들은 말한다.
“AI는 아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AI는 창의성이 없다.”
“AI가 못 하는 일을 찾아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강화하라.”
등대처럼 말하지만 —
그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면
아직 확실한 땅은 없다.
AI는 기술적으로는 원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AI 시대의 직장 생존 원리는 아직 없다.
공통으로 합의된 전략도, 안정된 질서도 없다.
있는 것은 현상뿐이다.
리포트 작성, 회의 요약, 코드 생성, 이미지 제작.
숙련된 사람이 며칠 걸리던 일을
AI는 몇 분 만에 끝낸다.
품질은 평균 이상.
속도는 압도적이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이 바뀐다.
우리는 오랫동안 품질로 경쟁해 왔다.
더 잘 쓰고, 더 잘 설계하고, 더 정교하게 다듬는 방식으로.
하지만 AI는 품질 이전에 속도로 들어온다.
문제는 단순하다.
우리는 속도에서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AI와 협업하라고.
좋은 말이다.
그런데 현실의 구조를 보면
AI가 처리하는 프로세스의 한가운데
인간이 끼어들 틈이 점점 줄어든다.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점점
지시하는 위치,
받아보는 위치로 이동한다.
중간이 사라진다.
이 현상을 설명할 원리는 아직 없다.
그래서 불안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웹이 나왔을 때도,
모바일이 등장했을 때도,
완성된 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있었다.
그들은 원리를 기다리지 않았다.
현상을 먼저 읽었다.
속도를 이기려 하지 않았다.
속도와 다른 것을 붙잡았다.
AI는 속도다.
속도를 이길 수 없다면
속도와 다른 차원을 선택해야 한다.
다음 글에서는
그 다른 차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원리가 아니라,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태도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