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폴리오는 대화다

당신의 포트폴리오, 지금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까

by 토니샘

졸업한 지 몇 해 된 제자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교수님, A/S 기간 지났겠지만, 혹시 포폴 한 번만 봐주실 수 있을까요?
이직 준비 중이어서요 ㅎㅎ…"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 걱정도 되어서 그러겠노라 했다.

제자의 동의를 얻어, 그가 보내온 고민을 그대로 옮긴다.


제가 갖고 있는 고민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저는 비주얼보다 시스템과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디자이너인데, UI 완성도가 약하다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어요. 이 방향이 맞는 건지, 비주얼도 함께 보완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둘째, 1인 디자이너로 PO, 시스템 설계, 자동화까지 진행했는데, 면접관 입장에서 이게 신뢰감 있게 전달되는지 모르겠어요.

셋째, 디자인과 기술의 경계 없이 일하는 프로덕트 아키텍트가 되고 싶습니다. 현실적인 방향인지, 지금 단계에서 뭘 더 쌓아야 하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PDF 파일을 받아 두어 차례 훑어보고, 다시 한 페이지씩 꼼꼼히 정독했다.

포트폴리오는 처음에 관심을 끌지 못하면 정독까지 이어지지 않는 매체다.

후르륵 훑어보는 순간에 먼저 매력을 어필해야 하고, 정독하는 동안에는 그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힘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피드백을 보내고 나니, 답장이 왔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모든 중니어 주니어들에게 도움이 될 피드백이에요!"


‘중니어’. 입사 3~4년 차 정도를 이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큭, 말이 된다" 싶으면서, 이 내용을 더 많은 독자와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닿았다.


취업을 준비하는 디자이너 초년생은 물론, 이직을 앞둔 경력 디자이너에게도 쓸모 있는 이야기라고 믿는다.



포트폴리오의 대전제: 포트폴리오는 대화다


1. 대화 상대가 누구인가

나는 말하는 사람이고, 듣는 사람은 채용담당자다.

그 사람은 실무자일 수도 있고, 인사 담당자이거나 대표일 수도 있다.

상대를 정해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의 포트폴리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상대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세 가지 고민 중 첫 번째, "비주얼이냐 시스템이냐"는 사실 이 질문에서 답이 나온다.

당신이 지원하는 회사가 시스템을 설계하고 문제를 구조화하는 사람을 원한다면,

비주얼보다 그 사고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정직하고 강한 대화다.

모든 것을 잘하려는 순간,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다.



2. 하려는 말이 무엇인가

대부분의 지원자는 자신이 잘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말하고 있는가.


상대가 UX 디자이너를 원하는지, 프로덕트 디자이너인지, PO인지,

디자인과 개발을 넘나드는 사람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이것을 정하지 않으면 대화는 시작 전에 이미 어긋난다.


제자의 두 번째 고민, "1인으로 PO·시스템·자동화까지 한 것이 신뢰 있게 전달되는가"도 여기에 달려 있다. 그것을 원하는 상대에게, 그 언어로 말하고 있다면 신뢰는 따라온다.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아무리 잘 설명해도 소음일 뿐이다.



3. 내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 잘 들리는가

대화 상대를 정하고, 말의 방향을 정렬했다 해도,

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을 대화의 기술이라고 한다.


세 가지가 필요하다.


① 메시지를 하나로 압축하라

포트폴리오를 펼쳤을 때, 상대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문장이 남아야 한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 (누구)다."


물론, 회사가 그 (무엇을) 잘하는 (누구)를 찾고 있다는 전제 하에.


제자의 포트폴리오 사례를 보자.

[포트폴리오 표지 및 이력서 페이지]

(제자의 동의를 얻어 포트폴리오 페이지 일부를 예시로 사용합니다. 일부 개인 정보 부분은 흰색면으로 가렸습니다. 허락해 준 친구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이 이력서 페이지에서 세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현장에서 발견하고, 시스템으로 증명합니다."

"원리를 향한 집요함. 현장을 향한 진정성."

"저는 현장의 공감을 무기로 누구보다 유저의 편에 서서 가장 현실적인 답을 찾아내는 해결사이자, 진짜 프로덕트를 만드는 디자이너입니다."


이 세 문장은 사실 하나의 메시지다.

그런데 세 번 반복하면서 오히려 희석됐다.

"현장과 시스템"이라는 키워드는 강렬한데,

세 번째 문장에서 해결사, 유저의 편, 진짜 프로덕트까지 덧붙이면서 그 힘이 흐려진다.


포트폴리오는 스윽 보고 바로 판단하는 매체다.

"이건가? 저건가? 모르겠네" 하는 순간 덮인다.

세 문장 대신 단 하나로 압축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는 이것, 저것, 그리고 조것도 잘하는 디자이너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아직 지원할 회사를 정하지 못해서 (무엇을)과 (누구)가 모두 흐릿한 채로 시작하고 있지는 않은가.



② 서사 구조로 메시지를 뒷받침하라

메시지를 정했다면, 그것을 증명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되려면 서사 구조로 구축해야 한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를 인과적으로 배열하는 설계도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갈등이 고조되며,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이 있어야 상대가 혼란 없이 따라올 수 있다.


포트폴리오의 서사 공식은 이것이다.

"내가 이 과제를 이렇게 풀었더니, 이런 성과를 만들었어. 어때, 내가 (무엇을) 잘하는 (누구) 맞지?"


여기서 역할(누구)과 활동(이렇게 풀었더니)이 반드시 상응해야 한다.

디자이너라면 디자인을 어떻게 풀었는지가 설명되어야 하고,

PO라면 프로젝트를 어떻게 시장에서 성공시켰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역할과 활동이 어긋나면 서사 전체의 신뢰가 무너진다.


흔하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

"내가 어떤 것을 잘하는 어떤 역할의 사람"임을 설명하겠다고 마음먹었더라도,

막상 프로젝트를 집어넣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진행 과정을 하나씩 나열하게 된다.

그래야 프로젝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강박이 생겨난다.


그러나 다시 상기하자.

채용담당자는 나의 입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뽑으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줘."


내가 한 프로젝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뭘 잘하는지, 상대가 30초 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서사를 설계해야 한다.


다시 예시를 보자.

[Foundation 파트 표지] [문제 정의 페이지] [현장 발견 및 리서치 페이지] [시스템 설계 페이지]


이 페이지들에서 자신을 "맨땅의 문제 정의부터 개발 효율을 극대화한 시스템 설계까지" 잘하는 디자이너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페이지들은 그 선언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다.


맨땅에서 어떻게 문제를 정의했는지,

그 정의가 어떻게 시스템 설계로 이어졌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의사결정을 했는지가 빠진 채로.

선언과 내용이 어긋나는 순간 서사의 긴장감이 사라진다.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했다"가 아니라 "어떻게 의사결정 했다"를 중심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문제 발견 → 문제 정의 → 해결책 선택의 이유 → 실행 후 성과.

이 흐름에서 자신이 어떤 판단을 했는지가 이야기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점검해 보라.

내 포트폴리오가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만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프로젝트에서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실제로 설명되고 있는가.



③ 시각 스토리텔링으로 감정을 움직여라

포트폴리오는 시각 매체다.

말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 정보로 대화하는 것이다.

서사 구조를 갖췄다면, 그것을 시각으로 전달하는 연출이 필요하다.


시각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다.

상대의 몰입을 끌어내고, 공감을 유도하고,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동원해야 할 것들은 UX 스크린 디자인이 아니다.

제목과 본문의 문장, 문체, 레이아웃과 그리드, 색상, 서체, 페이지 미장센 같은 편집 디자인의 요소들. 그리고 담기는 이미지의 가독성과 품질. 이 모든 연출 요소가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야 한다.


가장 흔한 실수는 목소리의 크기에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한 페이지의 정보 밀도가 너무 균일하면, 모든 정보의 무게가 같아진다.

중요한 메시지와 세부 설명이 같은 크기와 무게로 쓰이면, 시선이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흔들린다.


실제 예시를 보자.

[성과 검증 페이지] 좌: before, 우: after


이 페이지는 프로젝트의 성과를 강조하려는 맥락이다.

중심 메시지는 "우리가 정의했던 3가지 공포(Friction)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이고,

그것을 0%, 0 min, 24/7이라는 숫자로 시각화했다.

숫자는 분명 강력한 설득 기제다.


수치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수치보다 맥락 문장이 먼저 읽혀야 수치가 의미를 갖는다.

지금은 순서가 뒤집혀 있다.

맥락 없이 수치가 먼저 오면 "0%가 뭐가 0%지?" 하고 멈추게 된다.


문장 자체도 아쉽다.

"3가지 공포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는 해결한 것을 부정형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용자가 가장 두려워했던 세 가지를 모두 없앴습니다"처럼 성과 중심의 능동형으로 바꾸면, 같은 내용이 훨씬 강하게 읽힌다.


메시지 문장의 내용과 시각적 무게감을 조금 바꾼 결과를 보자(우: after)

호학실하게 문자에서 전달하려는 바를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 당장 해볼 것

포트폴리오를 다시 열고 이 질문에 답해보라.

"나는 (    )를 잘하는 (    )이다.


괄호 두 개를 각각 단어 하나로 채울 수 있다면,

그 두 단어가 포트폴리오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세 번째 고민, "프로덕트 아키텍트라는 커리어 방향이 현실적인가"는

이 두 괄호를 채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윤곽이 잡힌다.

스스로 정의한 역할이 명확해질수록, 무엇을 더 쌓아야 하는지도 보인다.


지금처럼 현장에서 직접 시스템을 설계하고 성과를 만들어 온 사람이라면, 그 방향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다만 그것을 설명하는 "프로덕트 아키텍트"라는 용어가 얼마나 보편성을 갖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스스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용어와 현실에서 불리는 역할의 용어 사이에 괴리가 있다면,

상대방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수 있다.



취업을 준비하거나 이직을 앞둔 주니어, 중니어 디자이너 여러분.

점점 신규 채용이 줄어드는 현실이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확보하는 여러분의 노력에 힘을 더해 드리고 싶습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