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언어

「코모레비(木漏れ日)」 2.

by 하얀


불행에도 한도가 있다.


그 한도를 넘으면 더 이상 나는 무참히 짓밟히는 수준으로 불행에 지지는 않는다.


아득바득 오기로 산다.


왜 사는지는 역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편이 유쾌하다.


***


‘백만 엔 걸 스즈코’를 다 보았다. 혹시나 보지 않은 구독자분들을 위해 줄거리(스포일러 아님)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본의 아니게 전과자가 된 스즈코가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자 아르바이트해서 100만 엔이 모이면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그곳에서 또 아르바이트해서 100만 엔이 모이면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를 반복하는 내용이다.


영화를 다 보고 느낀 점. 헐, 100만 엔으로 뜨는 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석사 졸업하고 정 할 거 없으면 나도 저렇게 살까.


난 어릴 적부터 그런 삶에 로망이 있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 또한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낯선 땅으로 가서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인생을 계속해서 듣고 싶었다. 그러니까 즉, 온 세상 사람들을 나의 잼얘(재밌는 얘기라는 뜻) 자판기로 쓰고 싶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잼얘 자판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 단 한 명의 삶 속에도 잼얘가 넘쳐나구나! 굳이 남의 삶까지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거구나!


***


깨달았을 땐 벌써 내가 그 로망과 상당히 흡사한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문학을 연구하는 것도 결국엔 그 작가의, 또는 작가가 만든 인물들의 잼얘를 계속해서 듣는 것과 마찬가지다. 삶에 도파민이 넘쳐난다. 이미 중독이다.


아니, 사실 잼얘라는 것은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 재미없기만 한 게 아니라, 화가 나고 슬프기까지 하다. 그 슬픔이랑 같이 살아가는 게 힘이 들어서 그냥 다 잼얘 취급하는 것일 뿐이다. 좋은 사람인 척을 꾸준히 하면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듯이. 잼얘라고 계속 말하면 정말 덜 슬퍼지기라도 할까 봐.


***


다른 학생들이 모두 볼일이 있어서 나간 사이였다. 단둘이 남은 교수가 어색한 나머지 내게 대학 4년간 들은 자신의 수업 중 무엇이 가장 좋았는지를 물은 적이 있다(악).


나는 나츠메 소세키 수업이 좋았다고 답했다.


그 수업은 오로지 학생들의 발표로만 이루어졌다. 나츠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고 그것과 관련된 논문을 하나 골라서 그 내용을 한 명씩 설명하는 것이었다.


누구의, 어떤 제목의 논문이었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연구자 실격), 내가 고른 논문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나츠메 소세키의 ‘도련님’에는 막무가내 성격을 가진 도련님이 등장한다. 도련님은 그 성격 탓에 이런저런 사고를 치며 자라지만 실은 병든 어머니와 형만 예뻐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 삐뚤어진 케이스였다. 그는 어른이 되어 마쓰야마라는 시골 동네에 교사로 부임한다. 도쿄에서 귀하디 귀한(사실 집안에서는 별로 안 귀했던) 도련님이었던 그는 허름한 시골 동네에 대해서 최악이다, 별로다, 시골 촌뜨기들은 이래서 안 된다(?) 같은 근거도 없고 부정적인 평가를 계속해서 말한다. 논문은 이 도련님이라는 화자를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 정의하고, 사실은 마쓰야마를 정말 싫어해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도련님은 왜 그렇게 마쓰야마를 싫다고 말했을까. 논문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내가 먼저 싫어하겠다.’라는 마음에 가깝다고 했다. ‘도련님’이라는 작품이 나오고, 지금이야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는 이유로 마쓰야마의 관광 산업에 도움이 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지방 혐오라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도련님은 진심으로 시골을 혐오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에돗코(도쿄에서 나고 자란 사람, 우리말로는 ‘서울 촌놈’에 가까울 것 같다)에, 가족에게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도련님. 성격이 삐뚤어졌고 의지하는 사람이라고는 유모밖에 없는 도련님은 가정 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존재였고 마쓰야마에 가서도 외부인의 처지에 있다.


저자인 나츠메 소세키는 런던에서 유학한 사람이었다. 타향 생활에 지독한 신경증에 걸려 우울함에 빠져있었다고. 자기 아내에게 편지를 엄청나게 보냈다고 할 정도이다. 다정한 남편, 아버지라 할 관계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신경증 때문에 짜증이 많아 가족들에게도 까칠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외부자로 살아가는 기분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유학 보내는 것이 귀했던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정부로부터 보내져 런던의 몇 없는 동양인으로 지내는 것은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


내가 그 수업이 좋았다고 말했던 것은 줄곧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에서 울적한 고시원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는 만날 사람도, 놀 사람도,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다. 대구에서 온 애래, 라고만 보였지 내가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조용히 공부만 하며 지냈다. 그러던 대학 준비 막바지에 나는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선생님은 일본인이었다.


“그 선생님 반에 들어갔다며?”


“네.”


“그 선생님 엄청 무섭대. 울면서 나오는 애들도 많아. 정말 괜찮겠어?”


“네, 저는 많이 혼나봐서 괜찮아요.”


난 정말 괜찮았다. 마음이 다 부서질 만큼 혼나던 때도 있었다. 그 경험에서 얻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랑을 잃어가는 것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모욕도 폭언도 내가 그 사람을 마음 깊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


선생님은 정말 엄하고 무서웠다. 혼나기 싫으니까 수업 예습을 열심히 하게 되었고 그 깐깐하다는 선생님께 간혹가다 칭찬을 듣는 게 좋아 최선을 다하려 했다.


어느 날은 나와 선생님이 일 대 일로 수업을 하던 때에, 내가 대구 사람이라는 것을 안 선생님이 내게 어디서 생활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시원에서 지낸다고 말했고, 선생님은 혼자냐고 또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밥은 잘 먹느냐고 세 번째 질문을 했다. 나는 어김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다 사 먹니.”


“네, 대부분 밖에서 사 먹어요.”


“요기 학원 앞에 삼시세끼 나오는 기숙사 있는데 거기 살지 그러니.”


나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 이후로 선생님은 학생들을 데리고 학원 근처에서 밥을 한 끼 사주었다. 수업 때는 일본어만 내내 썼는데 밖에서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어떤 때는 교보문고에 갔다가 내 면접 준비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보았다고 소개해 주었고 어떤 때는 혼자서라도 서울까지 왔으니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라고 자신이 가보고 좋았던 카페나 가게를 추천해 주었다.


합격 발표 이후 코로나 때문에 내가 대구로 아주 내려가게 되었을 때 선생님은 오직 나 한 명을 위해서 온라인 수업을 병행했다. 하 상, 잘 들리나요? 무표정으로 묻던 목소리가 기억난다. 나는 멋도 모르고 그것이 싫었다. 대학도 붙은 마당에 이제는 다 그만두고 대구에서 놀고 싶건만. 코로나 핑계로 공부를 안 하려 했는데 선생님이 온라인으로 해주겠다고 한 것이 귀찮기만 했다.


***


선생님은 내가 대구로 돌아가고 일 년 후 겨울에 돌아가셨다.


코로나만 끝나면 빨리 일본에 돌아가서 가족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해 봄에는 드디어 입국 제한이 풀렸고 나는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도 조금만, 몇 달만 더 버텼다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맘때 선생님이 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나는 일본이 좋다. 여기서 사는 건 힘들다. 한국이 얼마나 별로인 나라인지를 말하면서 나를 꾸중하니 나는 철없이 선생님이 밉기도 했다.


그러면 너희 나라로 가버릴 것이지, 왜 한국에 있냐는 말을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던 모양이이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한국이 좋으니까 있지.


나는 이 나라가 좋아서 왔는데, 이 나라에서 나는 영원히 이방인이며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감각을 그때의 나는 아직 몰랐다. 그래서 한국이 좋은데 살기 힘들어서 일본으로 가고 싶다는 선생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한국에 대해 말하던 불평불만은, 다시 생각해 보면 런던에서의 나츠메 소세키, 마쓰야마에서의 도련님과 똑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


내 휴대전화에는 그 선생님이 내준 숙제가 싫다며 불평하던 말들과 선생님이 내게 계속해서 보내던 카페 사진, 책 사진이 남았다. 그리고 메모장에는, 나를 위해 써주려던 추천장을 정리한 글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안 나와서 추천장을 부탁할 선생님이 없었던 나를 위해 자신이 써주겠다고 했다. 이런 내용으로 쓰는 게 어떠냐고 물어오던 선생님에게 당시의 나는 대충 다 좋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는 그 추천장을 다 쓰고서 손수 인쇄하여 봉투에 넣고는 붓펜을 사서 서예를 하듯 멋진 글씨체로 자신의 이름과 추천장임을 밝히는 한자를 써넣었다.


나는 면접 공부를 할 때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는 않았으나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게 어려웠다.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나 또한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며 다 말할 수 없는 이런저런 사정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걸 귀신같이 알고서 선생님은 매 수업 모질게 내게 학교를 왜 나왔냐고 물었다. 내가 적당한 대답을 찾아서 답하면 또 파고들었고. 그걸 반복하다 보면 선생님은 결국 나에게 넌 문제가 있어서 학교를 나온 게 맞다, 라는 답을 내리셨다. 물론 그것은 압박 면접에 대비하여 그렇게 답하면 안 좋을 거라는 걸 알려주던 의도라고 지금에서야 깨닫지만, 그때는 마치 선생님이 나를 비난하는 것만 같이 느껴지고는 했던 것이다(이렇게 다시 써보니 정말 미숙하고 바보 같았군). 억울하고 답답해서 아무도 뭐라 못할 좋은 답을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본 선생님의 추천장 안에 내가 찾던 그 좋은 답이 모두 적혀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고교를 나왔으나 그것은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으며 곁에서 지켜본 결과 사교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아주 열심인 학생이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꿈을 가지고 왔으며 그것을 위해 학교를 포기할 만큼 용기도 있고 그 시간을 허투루 쓰지도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내준 숙제를 열심히 해왔다는 내용으로 메웠다.


면접 수업 때 선생님이 내게 미친 듯이 고등학교에 관해 묻고 혼냈던 것은, 정말 내가 그런 학생으로 보일까 봐 걱정되어서였다고, 선생님이 이미 돌아가신 후에야 다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나를 문제가 있어서 학교를 그만둔 학생으로 보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나 구구절절 기나긴 추천장을 고민했던 것이다.


육성으로는 좀처럼 들어본 적 없는 칭찬을 추천장에는 많이 쓰셨네, 하고 넘겼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이유로 선생님의 카카오톡을 미처 지우지 못해서 오래 가지고 있었는데 1년 정도 지나니 다른 프로필 사진,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선생님이 쓰던 전화번호를 다른 이가 가져간 것 같았다. 학생처럼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생명이 넘치는.


***


작년에는 또래의 장례식에 갈 일이 있었다. 실은 안 가자면 안 가도 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웃기지 않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웃기게 하고 싶을 때가 그렇다. 내 곁의 사람들이 죽었고, 앞으로도 죽을 일밖에 없을 텐데. 그 부재로 뻥뻥 구멍이 뚫린 세상에서 뭐가 좋다고 웃으면서 지내는지. 괴로웠던 학창 시절에서 도망쳐 나오니 살 만하다고, 얻은 것도 많았다는 소리나 하고 말이다.


죽은 사람도 네가 잘 살기를 바랄 거야.


그런 말은 모두 산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거짓말 같을 때도 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는 선생님에 대해 생각했다. 유령이 되면 내 속마음이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고 싶었던 말을 와장창 떠올려보았다. 미워해서 미안했다고 사과도 하고 싶었고 돌봐주어서 고마웠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자신처럼 일본의 이방인으로 살아갈 운명을 가진, 벌써 서울의 이방인, 학교 밖의 학생이 되어 있던 여자아이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물어봐 준 것, 서울에 1년 있으면서 그런 어른은 처음이었다고. 시간이 있었다면 선생님이 좋아하신다는 그 카페에 같이 가보았어도 좋았겠다고.


그러나 고민이 하나 있었다. 생전 한국어, 영어, 일본어가 유창하던 그 선생님께는 도대체 어느 나라 말로 기도를 올리면 좋은 걸까. 일본어밖에 못하던 아이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면 못 알아듣는 걸까. 만약 훗날 우리 고양이가 죽어서 영혼이 되어 내 곁을 맴돈다면 고양이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나는 고양이 말을 모르는데.


그래서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우, 우, 하며 막히기 일쑤였다. 줄곧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서 있는 사람처럼 불안했다. 극락왕생은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 거야? 좋은 곳에 가라는 말은? 천국? 천국에 가라고 빌까? 불교도 천국에 가나? 다음 생에도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해야 하나? 그게 기쁜 일일까?


***


같이 장례식에 갔던 언니와 당일 밤 이자카야에서 술을 마셨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아저씨가 자신의 단골집이라며 안내해 준 곳이었는데 참치회 샐러드가 정말 맛있었다. 캬아아, 그 애도 이걸 먹었어야 했는데. 그런 말을 하며 막 웃었는데 웃고 있는 우리가 이상했다. 웃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불행에도 한도가 있고 이겨냄을 반복하다 보면 그것도 손쉬운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언젠가 몹시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도 내가 금세 정신을 차려버릴까 봐 두렵다. 미안했고 고마웠다는 말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 채로. 어디서 샘솟는지 모르는 그 에너지가 간혹 버겁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는 마음 말이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늘 궁금했다.


그러나 죽으려 하는 사람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항상 물었다.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현명한 답도 해줄 수가 없는데.


아무 이유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건 가끔 염치가 없다. 염치없는 나머지 어떨 땐 엉엉 울고만 싶다. 왜 사냐니. 왜 죽으려 하는 건데. 도리어 묻고 싶었다.


***


떠나려는 마음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나의 경우, 떠나는 타이밍은 이곳이 싫어져서 + 가보고 싶은 다른 곳이 생겨서, 가 균형 있게 생기는 때다. 하나만 있어서는 떠날 수 없다. 싫기만 하면 어디로 갈지를 알 수가 없고 무작정 가고 싶기만 해서는 의지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왜 사느냐는 질문은 마치 전자만 전제로 하는 것 같다. 이곳이 싫다는 마음 백 퍼센트로 영영, 내가 가본 적 없을 만큼 먼 곳으로 간다. 얼마나 싫었을지 감도 안 잡힌다.


전철에서 눈물이 났다. 모두가 죽은 지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다는 걸 알고서. 그들이 안 죽고, 그들을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그들을 무사히 돌려보낼 수 있다면 나의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없다. 나는 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눈물을 닦고 집에 가서 밥을 먹을 것이다. 밥을 먹었냐고 묻는 사람 없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