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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구집아들래미 Jul 21. 2017

살아왔으면 됐어. 그거면 충분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쟁 영화. <덩케르크> 리뷰

메멘토부터 다크나이트, 인셉션까지, 어느새 '믿고 보는 영화'가 되어버릴 정도로 영화계의 거장이 되어 버린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고담 시에서 꿈 속으로, 심지어 우주까지 섭렵한 그가 이번에 새로이 내놓은 영화는 유럽에서는 너무도 유명한 실화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세에 밀린 연합군이 프랑스 '덩케르크' 지역에서 잉글랜드로 약 35만명을 철수시킨 작전으로, 성공적이고 감동적인 작전으로 알려져 있다.


'착한 영화'로 반은 먹고 들어가나요?


개봉 전 감동 유명 실화를 바탕으로 감동을 이끌어내는 '착한 영화'라는 인식이 강했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숭고하고 깊은 울림이 있으니 극 중 스토리를 대충 심어도, 고평점은 물론이거나와, 관객들을 결집하고 어필하기도 쉽다. 심지어는 영화 그 자체의 퀄리티를 평가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는 '착한 영화'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들어간 <덩케르크>는 과연 '먹고 들어가는 쉬어가는 영화' 였을까. 아니면, 이러한 우려 속에서 피어낸 <자신감의 결집체>였을까. 이런 생각 속에서 덩케르크를 보는 건 너무나 큰 설렘이었다.


1시간 40분동안 나는 덩케르크에 갔다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들어 낸 전쟁 영화 <덩케르크>는 앞선 내 우려를 가볍게 비웃기라도 하듯이, 더 숭고하고 높은 차원으로 솓구친다. 그간 <다크나이트>나, <인셉션>에서 강렬한 스토리 라인과 타이트한 전개로 관객을 무아지경으로 몰입하게 만들어 왔던 그가, 이번엔 마치 스토리라인 따위가 들어갈 공간은 없다는 듯이 과감히 빼버린 느낌이 강하다.  따라서 딱히 스포일러 라고 할 만한 것 또한 없다. 놀란 감독은 1시간 40분 동안, 최소한의 장치만으로 온 힘을 다해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덩케르크를 보여주려 했을 뿐이었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간 우리에게 익숙했던 영화들 <라이언일병 구하기>나, <플래툰> 처럼 친절하게 시각적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해왔던 반면에, <덩케르크>는 전우애나, 갈등을 주력으로 전개하지 않고, 담백하게 잘 다듬어진 내래이션 없는 다큐멘터리처럼 덤덤하게 현실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지껏 봐왔던 수 많은 전쟁 영화 덕에, 팔이 떨어져나가고, 시체가 불에 그을리고, 적군이 얼마나 무자비한지 우리는 알고 있다. <덩케르크>는 잔인하지 않다. 적인 독일군조차 화면에 등장하지 않으며 노골적으로 피가 터지거나 하는 장면들도 거의 없는 편이다.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함에 있어서 이전 영화들처럼 하나하나 친절하게 해설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담백하고 덤덤하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때로는 친절한 설명보다 말 없이 느끼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법이다.


놀란 감독은 어떻게 우리를 포화속으로 데려갔는가?

죽고 싶어 죽는 사람없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또, 착한 사람이라고, 큰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고해서 총알이 피해가지 않는다. 불과 1m 옆에 있었던 동료가 폭격에 날아가고, 선실에 있다가 어뢰에 침몰되며, 배 밑에 난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아내면서 수 없이 '운좋게' 버티는 덩케르크 해안가는 참으로 참혹하고 냉혹하다. 그 속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의연하게 폭격을 흘려버리는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잔인하고 충격적인 시각 묘사를 하는 것 만큼이나 전쟁의 참혹함에 공감되어 간다. 그렇게 제 2차 세계 대전 속 덩케르크로 서서히 관객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제 1차 세계대전부터 이어져 본격적으로 전격전이라고도 하는 현대전의 시초는 육지, 바다, 하늘 할 것 없이 전투를 벌이면서 시작된다. 놀란 감독은 이를 반영하고자 육지/바다/하늘로 프레임을 나누어 전쟁을 묘사해나간다. 때로는 이렇게 무리하게 인물과 상황을 나누어 따로 전개하면서 시간적으로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고, 갈등을 전개하는 것이 관객에게 촌스럽고, 지루하게 받아들일 수 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최대한 세련되게 이를 구현해 나간다.

파일럿 콜린스가 구조를 당한 직 후, "우리 공군은 대체 뭘한거야?"라는 이름 모를 아군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콜린스와 파리어가 목숨을 걸고 적기를 추락시키지 않았다면, 그 또한 바다 건너 잉글랜드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전쟁 속 모든 사건은 실타레 처럼 서로 연관 되어있고, 얽혀있으며, 그 작은 일이 수 백명의 목숨을 좌지우지한다. 결국 이들은 일 평생 서로를 본 적이 없고 관련없는 사람인 것 처럼 보일지라도, 서로 떼어내려해도 얼기설기 얽혀있는 사이인 것이다.  <덩케르크>는 전쟁 속에서 벌어지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인과의 실타레를 통해 위압적으로 전쟁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또 한번 영웅을 그린다.


 <다크나이트>와 <인터스텔라> 속에서 성공적으로 영웅적 캐릭터를 창조해낸 크리스토퍼 놀란은 또 한번 성공적으로 영웅을 탄생시킨다. 앞 선 작품에서는 영웅적 면모에 인간적 기질을 부여하여 성공적으로 배트맨이라는 영웅을 만들어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이름없이 지나간 이들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새기고 영웅적 자질을 부각시킨다. 다크나이트에서 고담 시민들이 고담의 존재 이유에 대해 증명해나감으로써 고담 시민 스스로 영웅이기를 자처했던 것 처럼.

덩케르크에서 딱히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이가 없는데, 감독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성공이 배트맨이나 아이언맨과 같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어한다. 해군, 공군, 육군 할 것 없이 각자 위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작은 요트로 군사를 구조해내는 민간인, 최전선에서 끝까지 남아 작전을 수행하는 지휘관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새로운 영웅에게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심지어 구조작전에 뛰어든 17세 작은 소년 영웅까지도. 


실화 바탕의 영화, 그 진정한 가치


<덩케르크>의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자신일 것이다. 감독 입장에서는 <다크나이트> 속 배트맨보다도, <덩케르크> 속 영웅들이 훨씬 숭고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자신의 바람대로 여전히 고담을 지키는 영웅으로써 존재하지만, 덩케르크 속 영웅들은 크리스토퍼 본인이 바란다고 해서 되돌아 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진짜 가치는 바로 이것이다. 영화라는 것이 시나리오가 있고, 각색을 하고, 심지어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을 유도해낼 수 있지만, 지나간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지나간 우리 영웅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것. 세상에 이런 영웅도 있었다는 것. 영화는 재미있는 영화로써 존재하지만, 역사는 존재했던 것이기 때문에 더 고귀하다는 것. 영화 <덩케르크>는 놀란 감독의 자신감의 표출도, 쉬어가는 타임도 아니었다. 영화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참된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살아서 돌아왔음 됐어. 그거면 충분해" 극 중 맹인 노인의 대사는 놀란 감독이 덩케르크의 영웅들에게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106분간의 덩케르크 여행은 내게 너무나 값진 순간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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