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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구집아들래미 Apr 07. 2018

부동산 집착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트라우마다.

이승만부터 우리나라 재벌까지, 땅에 얽혀있는 한국 현대사

병이 생기는 이유는 외부적 요인보다 내부적 요인이 크다고들 한다. 불로소득으로 인한 양극화를 촉진하는 부동산 투기가 자본주의의 병이라면, 바뀌는 정권마다 시행했던 각종 규제와 정책들은 처방약이나 백신이라 할 수 있다. 새로 들어온 정부가 강남불패를 잡겠다고 호기롭게 나섰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딱 '강남'만 빼고 부동산 시장이 악화됐다. 부동산 시장을 뒤흔든 정책들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투자처'로 모여들게 한 셈이다. 약, 주사, 민간요법 모두 써도 좀처럼 나을 기미가 안 보이는 이런 기형적인 현상을 보면 마치 치료법이 없는 불치병을 보는 것 같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이렇게 부동산에 집착하게 된 걸까.


왕토 사상(王土社上)


'하늘 아래에 땅은 모두 왕의 것이다' 자고로 봉건시대였던 우리 조선에서 땅이라 함은 왕의 것이었다. 백성은 왕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집을 지어 살았다. 딱히 네 땅, 내 땅 구분 없이,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과 품앗이를 하며 모내기도 하고 나락도 베어 추수도 지냈다. 식구가 늘어나면 모두 손을 모아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집을 지어 올리고 그렇게 살았다. 땅은 너나 나의 것이 아니었다.

 서양은 우리나라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땅은 왕에게 귀속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영주와 기사는 농노와 땅을 매개로 계약을 하고 주종관계를 이어왔다. 더 많은 농노들과 계약을 위해서는 '나의 땅' 개념이 확실해야 했다.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하냐를 떠나, 봉건시대 당시만 해도 토지에 대한 집착은 서양이 우리나라보다 확실히 앞서 있었다.

근대 일제강점기 - 토지 수탈의 시대


 평화로운 조선에도 근대 제국주의 바람이 불어왔다. 당시만 해도 우리 농민들의 토지 소유의 개념은 '저~쪽 강 너머 있는 논 한 뙈기' 정도의 개념이었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우리의 터전은 일제에 의해 칼 같이 측량되었고 제한적으로 소유권을 부여받았다. 우리 농민이 직접 농사 짓던 땅은 모두 관청에 가서 등록을 해야했고, 토지 사유 제도를 강화했다. '니 땅이 아닌 모든 땅'을 뺏기 위해서 였다. 소유권의 개념이 부족했던 우리 조선인은 자신의 논과 밭을 명확히 증명할 수 없으면 소유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일제는 이렇게 눈 앞에서 땅을 빼앗아갔다.


1950년대 - 이승만 정부, 친일파, 한국 전쟁


 해방 직후 남과 북은, 농지 개혁을 통해 일제가 빼앗은 땅을 국민들에게 배분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첫걸음을 내 딛는 한국으로서는 공장(기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북에서는 사회주의 체제답게 김일성이 먼저 무상수거 무상배분으로 토지를 개혁하자, 이승만 정부도 이에 질세라 자본주의체제 유상수거 유상배분을 통해 농지 개혁을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는 농지를 가진 지주들로부터 땅을 매입함과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공장 설립과 사업권 등을 우선 보장할 셈이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커녕 친일행위로 부를 축적한 지주들과는 달리, '개혁 대상이었던 농지'의 지주들은 대다수가 그리 부유한 지주계층은 아니었다. 정부 또한 해방 직후라, 당장 돈이 없었기 때문에 땅을 매입하는 대가로 채권을 발행해 지급했다. 이들 지주들은 공장을 세우기 위해, 은행에 채권을 팔아 자금을 확보할 계획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이런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관공서는 무너지고 서류는 불 타 사라졌다. 내가 판 땅 문서, 현금화할 채권은 종이조각이 되버린다.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로서 첫 걸음이, 정상적으로 성장을 이룩할 기회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의 재벌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이승만 정부의 적산불하 (패망한 일본의 산업을 국내 기업에게 매각)가 진행될 당시, 한반도의 일본의 공장을 매입할 수 있었던 기업들이 바람직하게 성장한 기업들이 아닌, 친일행위를 통해 부를 축적한 기업인 것은 내가 봤을 때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은 아직까지도 다른 나라에서 유례없는 공평하고 바람직한 개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개혁과 동시에 일어난 전쟁으로 땅과 전 재산을 잃은 농지 지주의 입장에서는 땅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겼다.  


1960년대 - '땅'에서 생겨난 대한민국 재벌
베트남 전쟁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주도 경제 발전계획을 발표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잘 보여주듯, 많은 청춘들이 광부와 간호사로서 독일로, 제 한 목숨 바쳐 베트남으로 파병을 갔다. 그렇게 번 돈을 한국으로 송금했다. 국내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열심히 월급을 모아 한 푼, 두 푼 은행에 저축해왔다. 모두 먹고 살고자 한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역 거점을 중심으로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수출공업단지조성법'을 제정하고, 공장을 만들기 위해 '토지수용제도'로 수도권, 지방 할 것 없이 농민들로부터 '농지'를 사들여(라고 쓰고 빼앗았다고 말한다.) 기업에게 '공장부지'로 제공한다. (앞서 농지개혁으로 할당받은 농지들을 무효라며 마구잡이로 빼앗는다.) 공장부지를 받은 기업들은 이 땅을 담보로 은행에게 대출을 받는데, 중요한 것은, 정부가 매입할 당시 '농지'였던 땅이 '공업용지'로 기업에게 제공됬으니, 기업은 최소 2~3배 이상의 가치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정부와 기업이 '땅'을 이용해서 비정상적으로 모은 돈들은, 당시 끔찍히도 못살던 우리나라 국민들이 한 푼, 두 푼 월급 모아 은행에 맡긴 돈이었으며, 베트남으로 파병간 용사들, 독일로 돈 벌러간 광부, 간호사들 돈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재벌'의 개념이 처음으로 이 시기에 등장한다.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왜 국민들이 재벌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기업인들이 왜 비난시되는지. 지금 재벌이라 불리는 거대 기업들은 피 땀 서린 국민들의 땅과 눈물에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박정희 정권의 '토지수용제도'를 '토지공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현 정권에서 시행하려는 토지공개념과는 다르다.)


1970-80년대 - 대 부동산투기 시대

 70년대로 들어서 전후세대들의 성장으로, '살만해지니까' 서울의 주택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강북이 곧 서울이었던 시기, 군부정권은 말 그대로 '뽕 밭'이었던 잠실 일대를 포함한 경기도 깡촌, 강남지역을 서울로 편입하고 대규모 주택조성사업을 시작한다. 계속해서 강북을 틀어막고, 서울의 명문 고등학교를 대거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지하철부터 터미널, 백화점 각종 시설을 강남으로 집중시켜 '강남불패'의 초석을 만들었다. 이렇게 서울부터 대 부동산 투기 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다.


남서울 대규모주택개발에 대한 영화 <강남1970>

 1980년대 군부정권은 시끄러운 국내 정세를 개발 사업으로 인한 경제 성장을 통해 무마하려 대규모 택지 개발 사업을 시작한다. 서울은 이미 주택난에 시달려 평촌, 일산, 분당, 중동, 산본 멀리는 해운대까지 개발 계획을 수립한다. 수도권에만 200만호를 공급하는 신도시 계획이었지만, 생각보다 주택보급률은 오르지 못했고, 많아진 부동산투기의 장이 된다. 또한 노태우 정권은 토지공개념과 토지거래허가제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부동산 투기를 최소화시켜보려 했지만, 결과는 기대이하였다. 서울부터 촉진된 투기의 시대는 수도권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내 집 마련의 꿈'은 영원한 서민들의 꿈으로 남았다.


1990년~오늘 - 일관성 없는 부동산 정책

1980년대 후반부터 현 정권까지는 부동산 정책의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 계속된다. 투기억제 정책으로 규제를 강화하였던 노태우 정권이 지나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다. 당시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며 세계화 정책이 주를 이루었고, 이 일환으로 한국 땅을 살 수 없었던 외국인토지법이 일부 폐지되면서 외국 자본이 토지로 흘러 들어온다. 또한 각종 토지 규제가 완화되고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에서 IMF가 터진다. 빚 내서 내 집 마련한 국민들은 또 한번 피눈물을 흘린다.


이후 2000년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 강력한 규제가 시작된다. 종합부동산세와 실거래가격신고제, 양도소득세를 비롯한 각종 규제 정책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동산 규제의 시대였다. 이미 부동산에 여러차례 트라우마가 생긴 국민들은 아주 기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대다수 서민들이,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종합부동산세 제도를 극구 반대하고 나선다. 당시 종합부동산세는 6억 이상의 주택을 지닌 사람에 대해 메기는 중과세였다. 또한 매매가에 2배 이상 낮게 책정되는 공시지가 기준이였으므로 실제로는 10억 이상의 주택을 지닌 대한민국 상위 2%(2005년 기준)에 해당되는 법이었으나, 대한민국은 전국적으로 이 법에 반대한다. 결과적으로 종부세는 일부 위헌 판결이 났지만, 이 법의 취지와 정당성이 헌법에 위배되는 내용이 절대 아니었다. 당시 6억이라는 기준의 모호성 때문이었다. 


과연 이들 중 몇 분이 종합부동산세 과세대상에 해당될까?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들어 종부세를 비롯한 부동산 정책은 완화되었고, 이제 문재인 정권은 또 다시 부동산 정책을 규제할 모양이다.


몇몇 국민들은 강력하게 반발한다. 국민들의 반발은 당연하다. 그 동안 일관성 없는 부동산 정책에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한다. 또 4년 후에는 정책 이완이 오고, 부동산은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부동산 투기가 이 사회의 질병이고 정책이 약이라면, 이미 이 질병은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 일제강점기 때 부터 70년간 국민들은 땅으로부터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땅 값이 떨어져도, 올라서도 안되는 이 상황에서, 나는 이번 정부가 기틀을 잘 잡아 일관성 있는 부동산 운영을 간절히 바란다.


격동의 현대사에서 더 이상 우리 부모님들이 땅으로부터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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