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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ONY Jun 07. 2024

구멍

엄마를 생각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는 엄마가 정상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엄마라는 존재를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엄마가 세상의 모든 엄마와 비슷할 거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엄마는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손을 잡아주거나 나를 품에 따스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세상에 산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버린 7살짜리 꼬마아이처럼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 엄마는 자식이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상관없이 따뜻하고 다정하고 기댈 수 있는 존재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 사실을 직면하기 힘들어 그동안 외면하면서 살아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엄마가 소시오패스라거나 감정불능이라거나 공감능력제로의 어떤 무서운 존재가 아닐까 고민했다. 그래, 이렇게 나는 항상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대상을 한없이 끌어내리고 악마화하는 습관이 있었지 하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만다.
사실 엄마는 그 정도로 반사회적이거나 비정상의 범위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선천적으로 감정에 서투른 데다가 감정에 대한 학습도 하지 못해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맞지만, 그리고 그게 본인의 삶에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왜냐하면 엄마는 깊게 감정을 교류해야만 하는 인간들과는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어려워한다. 

내가 아기였을 때 이후로 쭉 그랬던 것 같다. 물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어색해하거나 어려워한다.
그래서 되려 거리감이 필요한 사람들과는 오히려 잘 지낸다. 그 어렵다는 고부관계의 주인공인 새언니를 비롯한 몇 안 되는 친구들이라던가 심지어 자기 친아들마저도 깔끔하고 쿨한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 그 거리감이라는 것이 세상에 둘도 없는 가족에게까지 적용되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그래서 한동안 정상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봤다. 어쩌면 그렇게 평생 살아오면 그게 정상이 되는 거겠지라고,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엄마에겐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라거나 깊은 공감이라거나 서로에게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관계가 부재한다는 사실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엄마는 혼자서 모든 문제를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을 걸어왔고, 본인의 선택이었기에 강하고 꼿꼿하게 그야말로 물소의 뿔처럼 나아가는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의 여유도, 자기 마음을 돌볼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환경과 맞서 싸우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는 항상 그런 엄마를 존경해 왔고, 얼마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 사실은 일생일대의 문제로 다가왔다.

나도 역시 아이 때 감정에 많이 서툴렀다. 엄마만큼이나.
한참 엄마를 원망하고 탓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내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같이 점심을 먹다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돼지고기가 들어간 내 도시락 반찬을 권했다. 몇 시간 후 예외 없이 친구는 알레르기 발진이 나타났고, 그게 내가 모르고 권했던 그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렇게 친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고 부끄럽고 괴로움에 어쩔 줄은 모르겠는데, 미안하다는 말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몰라서 나는 끝내 그 친구에게 사과도 위로도 어느 것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그 괴로웠던 마음은 이상하게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안에 남아있다가 문득 올라온다.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힘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를 과거의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나 역시 엄마처럼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한 친구가 가끔 서운함을 표현했었다. 보고 싶기도 하고 궁금한데 항상 친구가 먼저 연락을 해야만 이어지는 관계라며 내가 마음을 주지 않아서 서운하다고. 나는 그게 왜 이렇게까지 서운할 일이지라고 속으로 생각했고, 참 정이 많은 아이로구나 생각했다. 그게 고맙지도 미안하지도 않았고, 그런 친구를 둔 내가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결핍을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 갑자기 이렇게 됐다.
나는 어느 순간 고대의 엄청난 유적지를 찾아 헤매다 갑자기 정글 한가운데서 거대한 구멍을 발견한 탐험가가 된 심정이었다. 좋은 걸 발견할 줄 알았는데 뭔가 공포스러운 비밀을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다.
과거의 나는 내가 외로울 때에만 옆에 있어줄 사람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대체로 혼자로 살아가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든 일을 혼자 책임지고 감내하는 것이 정상의 범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정을 교류하고 속내를 나누는 관계라는 것의 필요성에 대해 몰랐다. 
가슴에 난 그 말 못 할 거대한 구멍을 발견한 이후로 나는 기대고 의지하고 표현하고 돌보고 얘기할 온전하고 완전한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아이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를 생각한다.

꽤나 이타적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한순간에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는 타인에게 의지하려고 하지만, 과연 내가 타인에게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숨이 턱 막혔다. 이제 와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예전처럼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흉내는 내볼 수 있겠지만 진심으로 그럴 수는 없을 거라고 자신한다. 마음에 그렇게 큰 구멍을 품고서야 누군가에게 의지가 될 리가 없. 

구멍이 구멍을 낳고 결핍이 결핍을 낳는다.

나는 지금 최저점을 찍었지만, 내가 발견한 구멍이 나로 받아들여질 때까지 내가 나를 돌봐야만 한다는 사실은 유효하다. 엄마가 해주지 못했던 그 돌봄과 무한한 애정과 공감이라는 행위를 내가 나에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낯설고 새로운 문제는 불안으로 다가오지만, 그 방법을 알고 나면 도전과 성장의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한동안 겪었던 방황과 애도의 시간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없이 울고 슬퍼하고 불쌍해하고 나면 어느새 괜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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