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발 달린 바우 2014년 70분 극, 다큐 강진아트홀 상영
용문산 한가운데 섬 같은 외딴집은 겨울에 눈이 오면 모든 것이 고립된다.
비 온 뒤 하루 지나 다시 10센티미터 폭설이 예보된다. 전라도 강진을 다녀온 지라 미처 준비하지 못한 땔감은 이미 바닥이다. 나무를 때워야 방을 데우니 영락없이 아이들에게 추위를 감당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
며칠 동안의 비로 인해 그동안 눈 속에 숨어 있던 잔가지들이 드러난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잔나무가지들이 몸을 말릴 시간도 주지 않고 폭설로 다시 숨기려 하니.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하루살이 땔감을 해야 하는 게으른 초보 산인은 마냥 어찌해야 될까 고민 속에서 헤맨다.
망연하게 산속을 바라보다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작은 잔가지들을 큰 나무에 기대어 일으켜 세우는 방법이다. 10센티미터 이상의 잔가지들을 큰 나무에 세워 말리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세워놓으면 10센티 이하의 폭설이 내려도 얇고 긴 잔가지들은 다음 날까지 연이어 오지 않는 한 하루면 말라 충분히 다음 날은 땔감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강진에서 배운 그 무엇의 흔적이다 .
이 마을의 이름은 항촌이라는 지명 또한 목 항(項) 자로 용의 목의 땅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강진에는 '일금당 이항촌 삼군자'라는 말이 있는데, 강진에서는 이 항촌이 두 번째 명당으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윤정현 작가가 살고 있는 항촌마을의 명발당. 다산 아버지의 친구이자 다산의 딸이 결혼식을 올린 집이란다. 그리고 아들 방산의 집이다. 다산 정약용의 딸이 해남 윤 씨 종손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방산 윤정기는 다산의 무릎 위에서 글을 배웠다. 그는 탁월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번번이 낙방했고, 슬하에 자식이 없어 대가 끊어졌다. 어쩌면 방산으로 이어진 다산의 학문적 맥도 끊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방산의 무덤이 앞산에 보이는 집, 명발당에서 우리 가족은 3일 밤을 보냈다.
4살 나의 아들,딸이 마을의 입구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고 있다. 삼남길의 5코스인 명발당-항촌 마을 길, 명발당 앞에는 마을회관이 있다. 아침이면 할머니 한 분이 마을회관의 문을 열고 청소를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유모차를 밀고, 어떤 이는 지팡이를 짚고... 한 사람, 두 사람 마을 회관으로 모여든다.
점심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많은 할머니들이 화투를 치거나 누워서 시간을 보낸다. 15살에 시집와서 서러워 울다 뻗쳤다는, 그리고 치매 걸린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똥을 치워야 했다는, 친정아버지 오는 날에는 더 서러웠다는 할머니... 나이가 제일 많은 올해 90살의 할머니의 넋두리를 듣는다.
차마 스스로 제 자랑을 못 하는 성품 탓에 항상 조용한 할머니로만 알았던 분의 사연을 다른 할머니가 대신 사연을 들려준다. "저 할머니는 22살에 시집와서 아들을 낳지 못했어... 아이가 없었던 저 할머니는 조카 일곱을 다 키워서 대학에 보냈어."
35살에 무거운 나무를 들다가 이후 평생 허리가 불구가 된 할머니, 젊을 때 김장하다 믹서기에 손을 잘못 넣어 순식간에 영원히 불구가 되어버린 할머니, 락운 학생의 할머니는 두 손자를 직접 강진읍에서 바지락 장사를 하면서 키웠단다. 6학년인 동생은 총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성적과 모든 면에서 모범이다.
어느 날 한 할머니는 이웃집 할머니가 가져다주는 검정비닐봉지를 받아 든다. 이웃집 할머니들이 가져다준 검정봉투는 도대체 무엇일까?
크리스마스 새벽, 몇몇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모여 마을 사람들 집 앞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른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올해 88세를 맞이한 할머니는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날 새벽 2시부터 성가대를 기다렸지만, 귀가 어두워져 자기 집 앞마당에서 성가대가 캐럴을 불러도 듣지 못했다.
점점 어두워지는 귀... 올해는 꼭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새벽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도 바로 자기집 마당에서 부르는 캐럴송을 역시 듣지 못했다. 할머니 성가대는 불은 켜져 있지만 노래를 불러도 열리지 않는 방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그냥 대문을 나간다.
낮에 마을 회관에서 나누어준 검정 비닐봉지는 성가대에게 줄 과자나 음식을 넣어 집 대문에 걸어두라고 나누어준 것이었다. 다음날 할머니는 "젊은 사람들이 불러야 소리가 들리지... 늙은 이들이 부르니 소리가 맥이 없어 들리지 않는다"라고 불평을 내뱉었다.
한 손으로 유모차를 끌고 버스 타고 면까지 가서 초코파이를 사서 며칠간 고이고이 간직했던, 손가락 없는 할머니는 성가대들이 마당에 들어오자 그 초코파이를 꺼내 성가대에 안겼다. 정신없이 가버린 새벽, 할머니 성가대를 찾아 어두운 골목을 누빈 또 다른 할머니는 미처 대문에 못 건 검정비닐봉지를 그들에게 기필코 건넨다.
성가대는 당연히 밤이라 아무도 없는 걸 빤히 알지만 그 경로당 앞에서도 캐럴송을 부르고 헤어진다. 시골의 경로당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배의 대상이다.
유배길 같은 삶을 모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락운 학생은 이제 중학교 마지막 축제를 앞두고 반 친구 20명과 춤을 추기로 했다. 그런데 온통 '시, 생각밖에 없다. 시를 잘 쓰는 현명 학생의 '눈 오는 날'의 시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축제를 위한 춤을 추다 쉴 때마다 뭔가를 끄적여보지만, 시란 게 그렇게 잘 쓰이기가 힘들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시장에 새우를 사러 간 현명 학생, 친구 락운의 할머니가 장사하는 자리로 가보지만 할머니가 안 보인다.
"너 할머니 안 나오셨더라."
"우리 할머니가 좀 아파서..."
락운과 현명 두 친구는 시인 영랑의 생가 마루에 앉아 있다. 락운 학생이 할머니를 소재로 지은 시 하나를 들려준다. 현명 학생은 친구의 시를 듣는다. 기분이 우쭐해진 락운 학생은 그 시를 아파 누운 할머니에게 들려준다.
그 마을 앞 냇가에는 '네 발 달린 바위'라는 큼직한 바위가 놓여있었다. 마을에 있는 네 발 달린 바위의 전설... 마을에 큰 홍수가 났는데 바위 하나가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한 임산부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치자 바위는 그 자리에 서버렸다. 지나가던 스님이 이야기한다. "저 바위가 조금만 더 시내를 거슬러 올라갔다면 이 마을이 서울이 되었을 텐데..." 그 전설로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을 '반서울'이라고 지금까지 부르고 있다.
거슬러 산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결국 멈춰버린 바위... 어쩌면 그와 다름없을 우리의 삶. 간혹 정약용의 유배길보다 또 다른 많은 이들의 유배길 같은 인생사를 떠올리게 하는 강진 네 발 달린 바위의 전설을 마을의 냇가 바위는 이야기하고 있다.
네 발 달린 바위... 아마 이전에는 잘 나가던 해남 윤 씨의 좌절된 심정을 드러낸 이야기는 아닐까?
하지만 현재는 다산의 학문적 성취를 이은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네 발 달린 돌이다. 달리고 싶지만 멈춰버린 욕망들이다. 하지만 나 또한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달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돌이다.
(마을에 있는 네발 달린 바위는 삼별초와 관련된 역사의 흔적일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1270년 9월 강화도에서 출발한 삼별초는 전라도 해안을 장악한다. 11월초에는 제주를 장악한다. 다음해 마산 동래 김해까지 진출한다.아마 그때 강진 사람들은 '저 바위가 조금만 더 시내를 거슬러 올라갔다면 이 마을이 서울이 되었을 텐데'라는 지금은 황당하지만 그 때 마을사람들은 삼별초와 일체화되어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려의 일반 민중들이 밀양사람들이 진도 삼별초에 호응하기 위해 수천명이 지방관을 죽이고 봉기가 일어났고 개경의 관노봉기, 대부도 봉기 그리고 해남에 고려군 60명 과 몽골군1000명이 주둔하고 삼별초와의 대결해서 패배당하지만 결국 1271년 5월 진도에서 삼별초는 몽골군에게 패배하여 1만명이 포로로 잡힌다. )
위의 이야기는 내가 그 마을에서 할머니들과 만든 영화 이야기이다.
이번 강진 여행에서 윤정현 작가에게 들었던 동학봉기의 마지막 전투, 장흥의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이 숨어들었던 덕도의 이야기가 있다. 돌이켜보면 사학과를 들어간 내가 첫 학기 첫 발표의 과제로 동학혁명을 선택했고 당시의 책, 자료를 이리저리 조사하고 다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덕도는 들어보지도 못한 생경한 이야기였다. 이런 여행이 아니었다면 듣지 못했을 값진 보석 같은 돌멩이들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현실 정치적 거리를 10센티 두자는 태도 또한
역사 속 피해자는 고스란히 바닥 사는 이들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나로선 참으로 혼란을 안기는 이야기였다
.
장흥의 석대들 동학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오래전 시간 속 열정을 다시금 끄집어
들게 한다
덕도...
그 섬으로 숨어든 500명의 사람들 그리고 조여 오는 관군의 압박과 회유. 그 속에서 등장한 15살 뱃사공 윤성노소년이 그 사람들을 인근의 섬으로 밤낮으로 피신시킨 이야기는 쉰들러리스트의 감동을 제압하고도 남는다.
그 이야길 들었던 곳은 장흥의 '오래된 숲'이란 1000평의 한옥집이었고 겨울 답지 않은 억수 같은 비가 내리고 오래된 숲 문충선대표가 넌지시 틀어놓은 나윤선가수의 노랫소리 속에서였다.
그 빗소리와 노래 속에서 동학봉기 때의 이소사라는 한국의 잔다르크 같은 전설 속 여인의 이야기는
시민군 출신의 김향득작가에게 , 소년뱃사공이야기는 윤정현작가에게 들었다
2013 포럼 김영집대표는 어린 시절 도깨비와 싸우는 아버지에게 배웠던 28자 별자리주문, 그 이야기들을 듣는 나로선 이런 멋들어진 대화의 남도의 예기와 풍류를 한 편의 영화 속에 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어킨다.
하지만 나는 아직 모르겠다
땅에 누워있던 잔가지를 일으켜 세운들
그 나무의 입장에선 태워져 재가 되어 땅으로 간들
눈 속에서 썩어 땅과 하나 되어간들
역사란 건 결국 살아있는 , 살아가는 소수자들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떨치긴 힘들다.
잔가지에게 이야기의 영광을 안기지는 못한다 는 생각을 여전히 떨구진 못한다
영화 찍으려면 내 집 방을 언제든지 내어드리리라는 오래된 숲의 문충선대표의 안경 속 눈의 미소
문대표는 자기가 사는 송산마을의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송산마을 속으로 들어가다 (이매진출판사)라는 책을 나에게 건넨다
강진여행은 바로 자기 마을, 자기 지역의 오래전 숨어 있던 사람의 이야기를 찾게 만든다.
그게 역사의 간벌로 쓰러져 간 역사의 불을 다시 피우기 위한 건지 , 역사의 폭설 속에서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건져내기 위한 건지.. 그 두 가지 다인지 모르겠다.
눈 속의 잔가지를 찾아다녔던 오늘 하루처럼
내일 다가올 스스로와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거다
지금 땅끝 광주 , 강진, 장흥이라는 땅끝에 살며
자유로운 경계에서 노니는 멋들어진 철인들을 만나 마을영화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이들을 통해
하루 만에 참으로 많이 건강해졌다
그 동네 가면 항상 예기가 번들거려 소설이든 글이든 영화든 열매 맺고 꽃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난 다시 쉰들러리스트나 잔다르크식 드라마를 끄집어내어선 안된다
그건 영웅주의적 이야기의 함정으로 제약된 병적 상상력의
하나라는 생각에서 오래전 시작된 나의 영화는 뱃사공 이야기만큼 멋지지는 않지만
소년의 배를 타고 어느 섬으로 가 살게 된 숨겨진 잔가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함께
만나고 싶게 한다.
그 잔가지 같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나무꾼이고는 싶다.
그래도 땔감으로 쓸만한 나무 먼저 세우는 제 아랫목 데우려는. 나무꾼일 뿐이지만...
손길 닿지 않고 이야깃거리 되지 못하고 사라질 잔가지들...
내일도 계속 잔가지를 세워야 한다
강진여행의 여운이 살아 움직일 때까지는...
강진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찾아간 장소는 다산 정약용이 유배 와서 처음으로 묵었던
주막 사의정이었다. 그곳에서 아욱국을 먹었는데..
다산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단다
'일상의 공간에 마음을 쏟아라. 생활 속에 운치를 깃들이는 일, 그를 통해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는 일은 몸은 비록 티끌 세상에 묶여 있어도 마음은 훨훨 자유로운 경계 속에 노닐게 하는 일'이라고
소년 뱃사공에 대해 다 알고픈 분은. 고 윤정현작가의. 블로그. http://waterpark.egloos.com/m/2726210
참고하세요 (사진- 김향득작가 )
올해 초 전라도 강진을 다녀온 뒤 다산 정약용의 책 두 권을 읽었다.
유독 인상 깊은 것은 그 당시에도 다산의 형 정약전은 강진으로 가는 다산을 위로한다
" 강진현 사람들은 참 순박하더라 무식해도 인정이 넘쳐서 내가 떠나올 때 울고 불고 난리 났었다 다시 그런 사람 만나러 가니 기쁘다 "라고 이야기한다.
18세기에도 순박했던 사람들이 아직껏 순박하다니.. 참 이상 하다..
그건 지식과 권력 부를 가진 자와 지식과 권력, 부를 가져 본 적 없는 자의 관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대해주는 것이리라 지식인인 너희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 땅 저 땅에서 땀 흘리고 사는 우리는 동물적 본성으로 알고 있다는....
강진 18년 유배기간 동안 다산은 6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단다.
과연 이게 가능한 건가? 한 달에 3권.. 말도 안 되는 량이다.
내가 볼 때 다산은 공장제적인 저술을 한 것일 테다. 유배지에서 엮인 제자들을 동원해 대필한 정황이 충분하다. 그의 성격도 술 좋아하고 호탕한 기질이었다는데 아마 출판 공장장적인 능력이 탁월했으리라.
다산은 유배당한 게 아니라 바로 보물섬을 만난 것이다
평범한 일상의 삶터가 바로 참다운 지식의 영감의 원천이며 진정한 학문과 예술의 우물이며 보물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추상적 지식이라는 씨앗이 비옥한 토양을 만나 그 열매와 꽃을 피운..
자신의 유배에 대해 절치부심, 자존심 있게 대처하기 위한 그만의 당대 지식인, 권력에 대한 지식인다운 시위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가 저술한 600여 권의 책들이 그 민초들에게 읽혀지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당대 지식인을 향한 저술이었을까? 는 분명해진다.
다산에는 황상이라는 강진 살던 제자가 있었다.
가장 아끼는 제자였는데 그는 결코 한 번도 다산의 저술에 참여한 적이 없이 초야에 묻혀 자신의 길을 갔다.
나는 강진이 다산이 아니라 황상이라는 인물을 부각해 자신들의 지역문화의 정체성.
다시 권력으로 나간 다산에의 지명도에 기댄 물타기가 아닌 티끌 같은 세상에서 이슬처럼 살다 간 이들의 숨은 가치들을 내세우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아래로 향한다는 지식인의 구호를 곧이 곧대로 믿어선 안된다
바로 세상의 아래를 위하는 것인지 세상의 아래를 빌미와 발판 삼아 자신의 존재와 권력을 취하려는 것인지?
실학의 시대가 지난 지도 참 오래되었지만 진짜 예술이 필요하고 인문이 요청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왜 아직도 순박하고 정치에 무식해도 인정이 넘쳐서 누군가가 떠나갈 때 올 때 울고 불고 난리 나는가?
이 영화는 고 윤정현 작가가 애를 써 강진아트홀에서 상영되었다 .
몇 년 전 강진 윤정현 작가가 갑작스럽게 생을 떠났다. 그가 보내 준 책은 나의 책상 위에 항상 귀하게 보관되어 있다
https://www.facebook.com/100000689511855/videos/4091285360904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