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v.daum.net/v/20250417130706049
며칠 전 "하마스 통치반대" 가자주민들이라는 신문기사를 보고 오랫동안의 내 속의 정치적 혼돈을 떠올리게 된다. 정치는 소리와 무력이다. 구호와 외침, 찬반과 갈등의 소음 속에서 정치는 진화해 갔다. 나와는 동떨어진 혹은 깊은 연관 속에서. 광장에서의 함성, 정당의 목소리만이 정치라고 알게 되었다. 이미 전 세계적 정치구조는 좌와 우로 진화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물론 좌가 곧 사회주의가 아니며 우가 곧 자본주의만은 아니다.
분명해진 건 정당정치는 결국 전체를 통합해내지 못하고 분열시킨다. 국민들은 정당의 틀에 갇히고 그것은 곧 광장으로 전개되며 개인은 정치의 영역에서 무의미해졌다 침묵하는 다수는 정치 과정에서 당연히 소외된다.
그러나 나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소리는 결국 그 근원은 침묵에서 시작되며 모든 소리에는 침묵이 필요하며, 그 침묵 속에서 비로소 또 다른 얼굴이 태어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다.
특정 정당에 소속되지 않고, 소음의 정치에 지쳐 한 발 물러서 있는 무당(無黨), 부동(浮動, 不動)의 정치적 동굴을 찾는다. 6월 3일 선거일까지. 이건 현재 정치적 과정에 대한 나의 가장 솔직하고 개인적 성찰이다. 어떤 깃발 아래서도 나의 자리를 찾지 못한 , 광장의 뜨거움보다 성찰의 고요함이 필요한 ,
진정 중요한 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의 시간. 이는 광장의 함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함성 너머의 불안과 희망, 분노와 체념까지 포용하려는 노력이다. 정당의 이념과 비전, 구호에 앞서, 내 삶 속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에 조용히 귀 기울이고, 정당 중심의 정치에 소속되지 않음으로써, 소음 경쟁에서 벗어나 본질에 집중할 자유를 얻는다. 조용히 스스로 묻고 경청하며, 나와 공동의 미래를 궁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개개인 누구에게나 정치적 생명과 비전을 가지고 있다. 집단과 단체 정당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정치적 비전과 경험 또한 의미가 크다 .
백기완의 말처럼,
“말하지 않을 때 진실이 보인다.”
또한 일본의 ‘무당파 유권자들’을 본다.
그들은 정당의 이름 아래에서 투표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비선택은 정치를 흔드는 결정적 힘이었다.
한국은 광장정치의 불꽃을 가지고 있었다. 4.19. 5.18
그 불꽃이 번져 만든 재의 자국도 나는 본다.
과열된 충성, 증오의 확산, 진영의 이름으로 감춰진 역사의 그늘
왜 참여와 고함만을 '정치'라 부르며,
침묵과 거리 두기를 '무관심'으로 왜곡하는가?
침묵은 새 틀을 짓는 망치다. 침묵은 무기력한 탈정치가 아니다.
이것은 정치과잉에 대한 조용한 절제이며,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정치적 정지動作(정지 동작)이다.
[실천적 침묵, 정치적 무당의 개인 선언]
나는 더 이상 정치적 진영의 언어 안에 나를 가두지 않기로 한다.
정치는 당파성을 피할 수 없고, 당파성은 필연적으로 특정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당파의 논리도 더 이상 전체의 보편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한다.
모두가 ‘국민’을 말하지만, 그 ‘국민’ 속에 나와 가까운 이들의 구체적 삶은 부재한다.
나는 본다. 언론과 사법이 단순히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치화의 단계에 진입했음을.
더 이상 언론은 중립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사법 또한 권력의 경계 바깥에 있지 않다.
이는 타락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다.
마치 과거 노동계급이 생존권 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이행했듯,
언론과 사법 또한 소극적 정치의 주체로 등장해 버렸다.
나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그래서 나는 무당파를 선택한다.
나는 침묵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 회피가 아니다.
나의 침묵은, 말이 무기화된 시대에서 가장 절박한 윤리적 선택이다.
나는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실천적 침묵의 태도를 지향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편들지 않음으로써,
나는 정치적 무당이다.
그 누구의 깃발 아래에도 서지 않고,
그 누구의 구호도 반복하지 않으며,
그 누구의 분노도 쉽게 빌려 쓰지 않는다.
나의 참여는 거리두기이며, 나의 실천은 침묵이다.
이것이 나의 정치다.
정치혐오나 양비론, 정치적 무력증을 벗어날 침묵의 응시
지금 조선시대의 남인 북인 서인을 벗어난 탕평파를 그리워하는 것도 대안이 아니다 .
누구나 정치적 운명으로 인해 생명까지 담보해야 될 시대는 지옥이다.
이글이 필요한 이유는 나의 극히 하찮고 사소한 정치적 운명에서 새로운 정치적 언어를 찾기 위한 시도이기듀 하다 . 한국 정치 정당정치의 이분법적 구도에 휩쓸리지 않고 무력한 개인의 정치적 공간을 모색하는 시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