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파 정치적 침묵을 실천한다
나의 정치적 생명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소멸했는가
정치는 현실적으로 국회의원이나 거리의 시위 속에서만 존재한다. 정치는 내가 어떤 집에서 태어났는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어떤 대학을 갈 수 있었으며 어떤 개인적인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가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나에게는 가장 개인적이고도 절박한 문제들과 맞닿아 있었다. 대학생활, 전두환 정권의 과외금지정책으로 인해 아르바이트자리가 사라졌으며 대학가의 마르크시즘문화로 인해 정치학습을 피할 수 없었던 것도 결국 당대 정치상황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즉, 정치는 우리의 생활 그 자체이며,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근원적인 힘이다. 이미 나의 대학친구 유인식은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 물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
(소설의 발견 vol.10 - 2024 어느 작은 마을에 관한 이야기 자연사박물관 작가 이수정 소설가 )
정치적인 의견 차이로 인해 수많은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교 친구들 중에 잊혀진 얼굴들이 수많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정치를 거창하거나 나와 동떨어진 세계의 일로 오해하곤 한다. 정치적 생명에 대한 나의 트라우마는 "가자지구의 반하마스시위" 기사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용기를 얻었다.
반하마스 시민들은 과연 친 이스라엘프락치인가? 하마스는 주민들의 역사적 운명적 굴레를 마냥 이용만 하는 일당 독재의 폭압정치세력인가? 역사적 명분 앞에 생명이란 얼마나 사소한 것인가를 가르치는 역사는 그 자체적으로 수정이 불가능하다. 역사적 사명이란 수많은 인민들의 생명을 고통스럽지만 애써 대의명분에 묻어야만 하는 것인가는 인류가 시작되고 난 뒤부터 정치적인 명분과 대의 의미와 가치로운 삶을 선택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그 고민의 터널을 거쳐야만 정치적 존재가 되고 정치적인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인가. 나의 경험으로는 반 하마스시위대는 생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절박하게 외치지만 그들은 친이스라엘 게릴라전술의 도구로 폄하받을 수 있다. 이미 우리 정치문화에서는 너무 쉬운 선택이지만 그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마스의 투쟁은 먹고사는 문제를 벗어난 역사적 대의와 정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가치는 역사에서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예술가들이 무의미하게 외치는 슬로건에 불과하다. 현대의 정치가들이 남한 산성에서 투항해서 조선의 왕처럼 행동할 수는 없는 법이다.
생명이 중요하다면 차라리 그런 왕을 차라리 뽑아야 한다. 북한이 핵전쟁으로 협박한다면 빠르게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항복을 할 그런 왕을 뽑자면 생명을 우선으로 삼는 예술가 출신의 왕을 선택해야 한다.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죽어간 군인들은 63만명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100만명이라고 한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지키기위해서라도 생물적 생명을 지켜야 한다 ? 생물적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인 생명을 소멸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 남북의 정치정당들이 일시적인 연대를 했다고 해서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 온 적이 없었다.남북한의 어떠한 정치 권력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지정학적 구조적으로 매여지게되어 있어, 스스로 온전한 결단을 내리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