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식

선재, 얼굴을 만나다(4)

by 신지승

40년 만의 재회: 침묵을 깬 이름, 유인식

" 오늘은 열사추모식에 다녀왔습니다. 거기 스물네 살 때 세상 떠난 사촌오빠 유인식이 있었거든요. <소설의 발견>에 발표한 단편 <어느 작은 마을에 관한 이야기>는 사촌오빠 유인식과 그때 그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 '자연사 박물관'의 이수경 작가의 페이스북 글을 보다가 '유인식' 이름을 발견했다.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친구 유인식의 이름이 40년 만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고도로 훈련받은 안기부 요원': 뜻밖의 오해와 투쟁의 시작

그때 학교 강의실 벽면에는 '고도로 훈련받은 안기부 요원'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며칠 전 나의 행동에 대한 반응이 나오고 동시에 좌절감이 몰려왔지만, 한편으로는 과분한 수식어에 순간 우쭐함마저 느꼈다.

사건은 이러했다. 시험 공부를 하다 도서관 옆 법대 앞을 지나가는데, 당시 얼굴만 알고 있던 김의0(전 국회의원), 이0욱(전 국회의원) 가 시험거부시위를 하고 있었다. 의아했다. '왜 법대 학생들만 시험 거부를 하는 거지?' 당시 운동권들이 주로 수강하던 진보 성향 교수의 비교체제론 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시험 시작 10분 전, 모두들 시험 준비에 고개를 파묻고 있을 때, 저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강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모든 걸 청산하고 열심히 공부만 하겠다고 다짐했던 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때 외쳤던 말은 단순했다. "싸우려면 같이 싸우고 말려면 모두 그만둬야지." 당시 학내에는 이미 여러 노선에 따라 계파가 나누어져 있었고, 각 계파의 전략 차이가 이전과 다르게 드러나던 시점이었다. 놀랍게도, 그렇게 머리를 파묻고 있던 이들이 모두 나를 따라 강의실을 나왔다. 정경관 로비에 모인 학생들은 열띤 토론 끝에 나를 비상총회위원장으로 추대하고 다음 날 학생 비상총회를 결의했다. 운동권이 아닌 이가 갑자기 나타나 역할을 주도하고, 법대 단과대 차원의 시험 거부를 전체 학교 차원의 시험 거부로 점화시키려는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권력의 속성: 계파의 개입과 나의 고독

그러나 곧 상황은 급변했다. 당시 부총학생회장이었던 허0회가 저를 급히 찾아와 총학생회에서 회의를 하자고 했다. 그는 "이건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비상총회는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각 계파에서 취소를 합의했다는 말로 들렸다. 이른바 학내 계파들이 갑작스러운 돌출사건을 비상적으로 대응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이나 40년 전이나, 권력이라는 것은 이렇듯 '개밥의 도토리'를 구별시키며 자신들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그때 다시금 확인했다. 그렇게 모든 상황이 끝났음을 알고 있었을 텐데, 대자보에는 여전히 '고도로 훈련받은 안기부 요원'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오히려 이 사건은 나에게 운동권에 대한 청산의 의지를 내면적으로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러브콜과 나의 '오기'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언더에서 일하던, 얼굴도 모르는 선배들이 찾아왔다. 그것도 각 계파에서 각기 함께 운동을 하자는, 지금 말하면 러브콜이 이어진 것이다. 어떤 선배는 밤에 쌀을 들고 자취방을 찾아오고, 어떤 이는 옷을 들고 찾아왔다. 심지어 그 일을 통해 학내외 운동 단위들의 숨은 얼굴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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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트머리국제마을영화제 집행위원장 -생활인과 공동창작 ,탈상업적 상상력의 대중창작시대 돌로 영화만들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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