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성을 걷는 것은 아마 수십 년 남짓 되었다.
집에서 5분 거리를 걸어 나와 203번 버스를 타고 두세 정거장을 지나 금정산성 남문에서 내렸다. 지척의 거리임에도 산성을 걷는 하루를 온전히 내어줄 여유가 없었다. 해가 구름에 가려 성곽의 돌들이 어둡다. 햇빛을 받지 않으면 돌들도 자연도 그 색채를 발하지 못하는 듯하다.
국민학교 시절, 단체로 나무 젓가락을 들고 송충이를 잡았던 곳이다. 그때 내 주위에 어떤 친구가 있었는지 기억도 없다. 기억은 오래전 촬영한 사진처럼, 성의 돌들처럼 색이 바랬다. 희미하다. 확대하면 픽셀이 깨진 듯 이미지는 더 흐릿해진다. 금정산성의 성벽을 따라 다져놓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컴퓨터 속 백업 폴더를 찾아 헤매는 시간과 다르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기껏 몇 번을 다녀간 것뿐인 이 길에서, 가을 풍경을 즐기기보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기억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금정산성이 나와 무슨 깊은 인연이 있다고 할까?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연예인이나 친하지도 않은 정치인과 깊은 인연이 있다고 호들갑 떠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금정산성 동문 안의 넓은 터는 지금 보아도 학교 소풍의 장기자랑 무대로 삼기에 자연스러운 굴곡과 운치를 갖추었다. 그 무대에서 장기자랑을 하던 이는 누군지 떠올릴 수 없지만, 그를 향한 부러움은 선명하다.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어떤 춤을 추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심지어 어떤 영화에서 본 장면과 뒤섞여 내 기억의 정확함조차 확신할 수 없다. 그 무대 위의 주인공들은 이 자리에서 그때를 더 많은 픽셀로 자신을 기억해 낼 수 있겠지만, 나는 관객의 시선만 남아 있다. 이미지도, 이야기도 이어지지 않는 백업 폴더 속의 하나의 파일. 수만 개의 점들로 이루어진 한 폭의 사진 같은 인생을 걷는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떠나 수십 년 만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금정산성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단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가던 두 사람이 멈추어 무언가를 보며 감탄한다. 낯선 이들이 바라보는 곳으로 나의 눈길도 향한다.
"저게 만개나무야?"라는 소리에 문득 나는 '만개나무'라는 것이 있었나 싶었다. 단풍이 만연한 가을 산, 바랜 듯 조화로운 색의 어울림 속에 빨간 구슬 몇 개가 선연하다. 유독 그 열매의 짙은 붉음은 마치 해의 씨앗같이 강렬하다. '만개(滿開)'라니, 나는 그 예닐곱 개의 빨간 구슬을 바라보며 내 마지막 영화 프로젝트라고 떠벌렸던 '만개(滿開)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이건 나에게 안기는 신기한 우연인 거야!'라며 혼자 감탄한다. 우연으로 치부하며 감동할 무언가가 나에게 절실한 것일까? 검색을 해보려 했지만,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았다.
3망루로 들어가는 길섶,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돌틈 사이로 철쭉 몇 무리가 피어 있다. 이제 찬 바람 불 초겨울, 연분홍 철쭉 꽃잎은 가을과 겨울의 국경선에서 자신만의 계절을 누리고 있다. 어쩌면 철없는 철쭉이 아니라 꿈꾸는 철쭉이다. 이제 한겨울 양지에 핀 개나리도 흔히 보는 풍경이지 않은가.
최근의 AI에서 할루시네이션이라는 말이 있었다.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은 AI의 오류나 착각을 말하는 그 현상 또한 자연에게도 이렇듯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다.
금정산성 3망루에서 파노라마 같은 부산 전경을 아래로 내려보다가 오래전 꾼 것 같은 꿈 하나가 생각났다. 내가 그 높은 곳에서 누군가가 밀어서 산 아래로 떨어지는 꿈. 옆에 있던 여자가 노란 귤 하나를 건넨다. "귤 드실래요?" 나는 배려 있는 여자의 손에 있는 노란 귤을 거절했다. 하지만 곧 그냥 미안했다 . 어쩌면 VR 안경을 쓰고 다닌 가상의 시간여행을 오고 간 것처럼 모든 것이 어긋나고 있다.
북문으로 나와 돌무더기 계단이 이어진 끝에는 범어사 작은 암자가 나온다. 범어사 일주문 옆 계곡으로 혼자 발길을 옮긴다. 어릴 적 가족들이 무더운 여름을 피하려 이 계곡으로 왔었다. 자연은 위대한 기억의 창고라고 믿고 싶지만, 여전히 이미지는 흐릿하고 그때의 장면도 떠오르지 않는다. 가물거리고 스멀거리기만 할 뿐이다. 아버지가 수박을 계곡물에 담가두었을 것이고, 어머니는 준비한 김밥을 돗자리 위에 펼쳤을 것이다. 나는 계곡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을 것이다. 답답할 정도로 뿌연 이미지가 걷히지 않는다.
중학교가 범어사 아래에 있었다. 학교를 마치면 몇몇 친구들과 간혹 걸어서 범어사까지 왔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 긴 산길을 걸어왔을까? 이미 함께 걸었던 친구들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을 하찮았을 농담들이나 웃음들을 혹시 이 나무들이 아직 머금고 있을까? 물론 그것은 정서적 환상 문학적 허세일 뿐이다. 자연은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흐릿한 기억을 불러내는 깨어진 거울에 불과하다. 어린 중학생들의 침묵은 물소리, 새소리가 그 틈을 채웠을 뿐이다.
11월 초의 산의 어둠은 일찍 다가왔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만개떡!" 하며 외치는 남자가 있다. 오늘따라 작위적인 드라마처럼 유독 이렇게 '만개'가 나를 따라다니는지 모르겠다. '만개떡'도 나에게는 너무 낯설다.
시내로 접어드니 카톡 알림이 몰아친다. 드디어 세상과 연결되었다. 나는 '만개나무'를 검색한다. 하지만 '만개나무'라는 것은 어느 세계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나무는 '망개(望開)'였다. 발음 하나의 착각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나의 환각을 불러왔다. 나의 집착이 소리를 굴절시키고 심지어 나의 상식까지 뒤틀어 버린 것이다. '망개나무, 즉 청미래덩굴의 방언. 부산 경남 지역에서는 이 잎으로 만든 망개떡이 오래된 향토 음식이다.'
나는 멍하니 어두워진 도시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 그 철쭉처럼, 내 기억의 할루시네이션을 경험하고 있다.
송충이를 잡으러 간 산이 진짜 금정산성 남문이었을까? 아니면 학교 가까운 산이었을까? 학교 인근의 산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았지만, 당시에는 소나무도 없지 않았을 것 같다. 산성과 가까운 학교였다 하더라도 그 당시 버스를 타고 걸어서 그 많은 아이들이 금정산성까지 왔을까? 붉은 열매를 생전 처음 본 것은 아니었고, 자연을 가까이 안고 산 내가 '망개나무'를 왜 몰랐을까? 여기 부산에서는 망개떡이 흔하지만, 여기를 떠나면 망개떡은 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 어떤 집착 탓이기도 할 것이다. 간절함과 어떤 결핍이 모든 기억을 비틀고 우연을 가장시켜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AI 할루시네이션은 자연에게도 인간에게도 공통으로 드러나는 현상일지 모른다. 오류가 아니라, 간절하고 안타까운 결핍에서 비롯된 꿈은 아닐까? 자연도 인간도 아닌 AI에게는 꿈이 있을 수 없다. AI에게 꿈이 있다면 인간인 나는 도대체 그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누군가 사진을 보내왔다.
동문 성곽에서 내려오는데 누군가가 나를 세웠다.
"잠시만요. 사진 한 장 찍어 드릴게요."
"왜요?" 왜 굳이 사진을 찍어준다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옷 색깔이 너무 어울려요. 초록색 옷이 성의 색깔과 어울려요."
나의 형광 초록색이 오히려 온통 바랜 듯 묵은 돌들의 색과 어떻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울림은 색채의 조화가 아니라 의식적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금정 산성속 스스로를 보게 한 유일한 사진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속에서 헤매이기만 했는데.
인간에게도 할루시네이션이 있다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상치 못한 어긋남, 이유 없는 미움, 땀 흘린 뒤의 짙어지는 결핍, 발버둥 쳐도 채워지지 않는 불완전함, 자신의 어떤 자산에도 근거하지 않는 오만함 같은 것이리라.오늘은 어제의 할루시네이션을 지우는 시간이다. 내일은 오늘의 오류를 만들고 지우는 시간이고.
흐릿하고 깨진 거울 같은 이미지를 이어 붙여, 나는 오늘 겨우 한 씬(SCENE)의 이야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