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시간이 불편한 이유〉
SBS의 다큐멘터리 〈괴물의 시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만든 고품격 크라임 다큐 4부작! 시대를 대표하는 악인들의 탄생과 진화, 그 이면의 이야기를 최초 공개한다!. 고 표방했다. 그러나 나는 그 괴물의 시간을 보며 저품격, 악인의 서사화에 한 표를 던진다. '인간' 이춘재의 본성에 대한 깊은 사회적 고민? 근본적인 의문을 품는다. 그를 통해 내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한 혹은 괴물을 만나지 않고 피해 갈 수 있는 비법이라도 얻을 수 있었는가? 우리 사회가 화성사건을 통해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을 수 있을 것인가 ? 피해자의 고통을 얼마나 되새길 수 있는가?라는 건 그야말로 허세 가득한 뜬구름 잡는 소리다.
이 다큐는 이춘재를 여전히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고전적 틀 안에 가둔다. 내성적인 청년이 군 복무 후 돌연 살인자로 변모했다는데, ‘군대에서의 활력을 현실에서 되찾고 싶었다’는 식의 심리 해석이 주어졌다면 그가 군대문화의 어떠한 문화에 활력을 느꼈는지 나무위키보다 뭔가 새롭고 유의미한 발견이 주어져야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난 그의 군대 내에서의 문화가 그의 폭력을 발화시키는데 어떤 역할을 했으리라는 섣부른 판단을 하기도 했다. 하루종일 딴 생각할 틈 없이 쉬지 않고 뺑뺑이 돌리는 문화 그런데 스스로 할 일을 찾아야 하는 사회의 선택적인 삶의 무료함때문인가? 그 모든 분석은 저널적이고 표피적이다. 그의 신발줄세우기 , 옷 칼개기 , 바닥에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기 같은 결벽증적 행동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그 습벽이 관계폭력의 구조와 어떤 연결을 가지는 것인지 다큐는 끝내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다. 매사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사람들은 사람 관계에서도 그와 같은 니크로필리어적인 성향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그가 단순한 괴물로만 규정되는 것보다, 그 괴물이 어떤 토양 위에서 자라났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가부장적인 폭력의 경험이라면 연쇄살인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수천명일 것이다.그의 살인 충동을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만 환원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크게 도움이 안된다 . 한국 사회는 개인의 병리를 ‘괴물’이라 부르고, 그 괴물을 만든 정치 사회문화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넷플릭스 다큐 〈사라진 여자들〉을 보면, 평범한 건축가가 이중적 성벽 속에서 연쇄살인을 저지른다. 겉으론 단정하고 조용한, 그야말로 ‘좋은 시민’. 이춘재와 닮았다. 둘 다 ‘내성적’이고, ‘성실한 남자’로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성실함’ 뒤에는 오랜 억압과 왜곡된 남성성, 사회의 통제 문화가 자리한다.
여전히 나는 그중에서도 군대에 설불리 주목한다. 그리고 그가 청주로 내려와 굴삭기 기사를 하다가 그만둔 이유에도 궁금증을 가졌다. 그토록 좋아하던 굴삭기 기사를 스스로 그만 둘 이유는 없었지만 방송에서는 빈 공간을 만든다. 살인자 서사에 빈틈이 너무 많은 편집된 서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자신의 주위에서 살인 사건들을 만난다. 나의 경우에도 수많은 사건을 만났다. 최근 부산에서는 500미터 근처에서 과외교사살인 사건이 터지고 강원도 살 때에는 나의 산책 공원에서 인제 등산객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가정내 폭력과 전조가 없지 않았으나 강원도 인제 사건의 범인 역시 제대 몇 달 후 범행을 저질렀다. ( 이 사례는 소수 학생들의 실제적인 대면교류가 안되는 농촌 학교의 무방치교육씨스템도 언급되어야 할 필요가있다) 학교는 폭력의 군대이고 군대는 폭력의 학교다. 일방적 명령 체계와 수직적 복종이 ‘인간의 감정’을 억압하며, 그 억눌린 감정은 제대 후 왜곡된 방식으로 분출된다. 폭력은 누군가에게 배우는 법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폭력을 배우는 공간은 바로 군대,학교,가족,교도소등이다.
하지만 방송은 이 지점을 비켜간다. 대신 “그의 방에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던 결벽증” 같은 기이함을 흥미롭게 포장한다. 범죄를 다시 ‘캐릭터화’하고, ‘분석의 오락물’로 전환한다. 피해자는 사라지고, 괴물만 남는다.
나는 이 다큐를 보며 악몽처럼 떠올랐다. 수많은 농촌 마을에서 들은, 지적장애 여성이나 어린 여성들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집단 성폭행 사건들. 그들은 지금도 마을 어딘가에 살고 있고, 그들의 상처는 한 번도 말해지지 않았다. 폭력은 소멸되지 않았다. 단지 침묵 속에 매장되었을 뿐이다.
죽은 그녀들의 상처는 꽃이 되어 피어나지 못하고, 소리 없이 시든 꽃으로 사라졌다.
살인이 아니라 그에 버금 가는 폭력을 만나기도 했다.
술을 먹으며 이야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맥주병을 들고 나의 머리를 내려친 어느 PD, 좁은 하숙집 복도 끝에서 쌍절곤을 휘두르며 달려 들었던 대학생,피곤해 곤히 자던 시골마을 회관에 들어와 폭력을 가했던 남자, 갑자기 앞의 상대하고 언쟁을 벌이다 옆에 있던 나에게 재떨이를 순간 내던지던 이발소사장 공통적인것은 그들은 친하지도 오래 만나지도 않은 대화도 깊지 않았던 인연들로부터 엄청난 사고를 당할 수 도 있었던 경험을 하면서 난 폐쇄적이고 방어적으로 살아가는 폭력에의 공포를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
이번 SBS 괴물의 시간은 피해자의 고통에도 살인자들의 깊은 이해와 분석에도 닿지 못했다. 솔직히 나무위키보다 얕았고 새로운 주목할 성찰을 가질 자료는 추가되지 않았다.
그저 ‘괴물의 기억을 복기한 한 편의 회고록’에 그쳤다.
현대 사회는 이제 개인의 본능만으로 범죄를 설명할 수 없다.
괴물은 사회의 파편이고, 교육과 지역문화, 제도와 언론이 함께 길러낸 결과다.
어린 소녀의 죽음을 은폐한 경찰, 사건을 조직적으로 묵살한 권력은
이춘재의 개인적 범죄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집단적 괴물의 시간이다.
난 한국의 분단으로 인한 군대 내부의 폭력적 문화를 해부하는 다큐를 기다린다. 또 학교, 정치조직의 일방적 폭력문화를 도외시하면서 연쇄살인자의 낮과 밤에만 관심을 가지기에는 우리사회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다름 없다.
군대적 문화 — 명령, 통제, 복종, 폭력의 합리화 — 가 어떻게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 인간의 감정을 마비시키고, 결국 ‘괴물’을 낳는지 그 뿌리를 파헤쳐야 한다.
“괴물을 연구하는 동안, 우리는 괴물의 언어를 배웠다.
이제는 괴물이 태어난 공간,의식,질서를 해체해야 한다.”
괴물의 시간을 함께할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의 시간은 이미 우리 사회의 그림자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분석해야 할 것은 괴물의 내면이 아니라, 그를 만들어낸 폭력의 시스템, 통제의 문화, 침묵의 공모다. 이런 시청률만을 의식한 어설픈 넷플릭스스타일을 추종 할 욕심만 보여준 미장센 풍부한 품격의 방송 자체가 살인의 미학화 서사화의 문화질주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