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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도 유명도 감옥이 된다

by 신지승


연고도 없는 시골마을에 와서 나랑 영화 함 찍자 하니... 사람들은 어찌 그리 할 일이 없어 이런 시골까지 왔나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잘나가는 감독이라면 유명한 배우들하고 찍지, 왜 여기까지 영화 찍자고 하겠어? 저 젊은 나이에 이 마을 저 마을 다니게 안쓰럽기도 해. 혹 한 번 이벤트라도 벌려 짧은 유명세라도 얻을 요량인가?

그런 생각 안 할 수 없는 촌 사람들의 눈치와 눈 밝은 혜안은 한편으론 나를 가여워 여기고 아들처럼 편하게 어울려 어느 정도 시간이 가면 영화 찍기에 쉬웠다.

그래서 그런지 뭐 좀 스스로 안다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입에서 '감독' 소리 안 나온다. 대게 대다수 사람들은 상대가 듣기를 원하는 호칭을 불러준다. 그게 시골 인심인데... 뭐라 불리면 어떤가 싶지만, 굳이 한 사람만 남들이 부르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건 남다른 생각이 있구나 하는 추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장과의 묘한 신경전

강원도 한 마을 이장은 한 달이 되어가도... 나는 꼬박꼬박 "이장님"이라고 호칭해도 그는 나에게 "어, 신씨!"였다. 그리고 반말이다.

이 마을은 처음 몇 달 동안 영화 찍자고 하니 마을 회의 해서 결정한다고 했다. 그리곤 마을반장회의에서 안 하기로 결정했다고 통고했다. 쪽팔려서 트럭을 주차하고 안 나갔다.당시는 이런 사례가 없었고 내가 뭘 했는지 인터넷에 나와 있지도 않았다.

"마을 단위로 안 하겠다면 그냥 개인적으로 찍고 싶은 사람들하고만 찍도록이라도 허락해주세요."

며칠동안 5톤 트럭에 앉아 그네만 탔다.

결국 개인적으로 원하면 사람은 촬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그럴 자유를 억압하기에는 논리를 만들기 불가능해서 다행이었다.

이장은 시간이 가도 불친절하고 틱틱거려 점점 거슬렸지만 유달리 기가 세고 제 마음대로 성격이라 마주 앉아 호칭과 하대 가지고 이야기하기에는 마을에서 나가라 할 것 같고, 그런 상황에서 호칭으로 옥신각신한다거나 쪽팔리게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사람들이 점점 개인적으로 참여해줘서 영화를마무리했다 그리고 상영회를 하기로 했다.

돌변의 순간

학교운동장에서 시사회를 하고 난 뒤 몇몇 남은 마을 사람들과 뒷풀이가 이루어졌다. 이장이 나에게 잔 건네면서 하는 말, "신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

잔을 받던 내 손이 잠시 멈추었다.

"한 번도 감독이라는 소리 안 하더니 갑자기 왜 그럽니까?"

"감독이 맞는 것 같아서..."

"그래도 그런 법은 아니지... 손님한테... 근데 이장님 나이가 올해 몇이나 되셨어요?"

"○○살."

나하고 동갑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마을에서 5년을 오고 가며 영화를 이어갔다.

변화의 물결

이 마을에서 영화 찍는 게 소문이 나서 방송과 신문에서 취재를 왔다. 찾아온 기자가 청하지도 않았는데(그때는 이장이 아니었다) 먼저 나와 인터뷰를 자청한다.

"전 월운리 이장을 지낸 ○○씨는 바뀐 분위기를 이렇게 귀띔했다. '5년 전 월운리에서 처음 시작할 때 반대가 심했어요. 영화는 무슨 영화냐고. 그런데 막상 주민들이 촬영이 시작되자 배우가 되어보고 우리가 찍은 영화도 보고 그러더니 바뀌기 시작했죠. 요즘엔 마을영화 땜에 삶의 활력을 찾았다는 노인분들도 많습니다.'"

유명의 감옥

소위 유명한 감독이라면 자신의 명망에 혹 티끌이라도 묻힐까 봐 노심초사하게 되어있다. 또한 자기가 유명의 극지에 와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적다. 좀 더 좀 더 유명해지기를 바라다 보니 주위에는 뭔가 내세울 사람이나 거리를 연일 찾게 마련이다.

또 그럴 잣대조차 없는 유명, 무명의 차이는 결국 스스로를 제 홀로 유명의 감옥에 가두게 될 것이다. 아무도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는데 제 홀로 그 탑을 쌓아가다 보니 힘들기도 할 거다.

정치인들에게는 사람들이 굽신거려준다. 그걸 그들이 바라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 유명한, 중요한 사람이야'라는 메시지를 상대에게 던지는 느낌이 있다.

헛된 명망의 코미디

시골마을에 방송촬영으로 몇 번 개그맨이나 유명연예인들이 마을을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자면 마을 사람들이 손님 치레한다고 아구아구 해주지만 그들은 아랫사람 대하듯 정치인 흉내 내는 태도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그 유명세때문에 서로 나란히 소곤 소곤 대화를 나누는 관계가 못 된다. 자신들이 누구를 격려해주어야 하는 그런 태도, 말, 아랫사람 상대하는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기도 했다. 참 웃지도 못할 코미디들이었다.

스스로 겸허하고 겸손하지 못하고, 스스로 헛된 명망에 빠져 살 수 밖에 없는 이들... 설령 그것이 명망이라 한들, 무명한 그 누구에게 자신감, 에너지를 가져다줄 수 있도록 나누어 쓰는 것임을 모르는 것이다.

명망은 소유가 아니라 흐름이어야 한다. 흐르는 순간 그것은 힘이 아니라 관계가 된다. 관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명망은 서로에게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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