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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달러와 고체우유

by 신지승

몇 년 전 7개국 감독과 전국의 마을을 노매드 하다가 알게 된 한 교수님이 있다. 서울의 모대학 교수로 있다가 정년퇴직하고 태백 구문소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계시다 만나 7개국 기후위기 세미나에서 통역을 해주셨다. 그 인연으로 간혹 근황을 주고 받았다. 이번에는 전화로 교수님과 3시간을 통화했다. 듣다 보니 점점 호기심이 일었다. 나의 부탁에 마다하지 않고 당신의 지난 시간을 들려주셨다.

1955년, 대구 수성교 다리 밑에서 시작된 삶. 노름에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와 가족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어머니. 거지로 살며 대구와 서울을 오가던 어린 시절. 꿀꿀이죽으로 허기를 채웠던 고난의 시간들. 서울 한강 뚝에 정착한 가족. 우연히 '양친회'를 만나게 되고, 당시 월 10달러의 원조를 받으면 많은 가족들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되기에 학교를 다니는 조건으로 받게 된 한 미국인의 후원금.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10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삶을 뒤흔든 사하라호 태풍, 그리고 빗물에 잠긴 한강 모래톱 마을에서 살아남은 생존기. 그리고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며 결국 대학교수에까지 이르렀다.

더 자세한 것은 그분에게 실례될까 싶어 감히 쓸 수가 없다. 보통 교수라고 하면 책상에 엉덩이 붙일 정도의 경제적 뒷받침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나의 오랜 편견을 깨뜨려 버렸다. 그야말로 '학문'에 도달하기 위해 극한의 삶의 투쟁과 경쟁, 그리고 결국 큰 경제적인 사기도 당하면서도 일어선 파란만장한 삶을 거친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일찍 그분을 만났다면 나도 다른 꿈을 꾸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컸다.

오랜만에 얼굴을 뵙고 싶어 태백 구문소 마을을 한번 가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날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나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나의 유년은 그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지만 고체 우유를 먹었던 기억 하나를 건진다. 고체우유를 물에 불려 먹었던 기억이 있다. 미국 군부대에서 나온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지금의 우유를 알았다. 학교에서 급식 우유가 나왔다. 잘 사는 아이들만 점심 식사시간에 급식 우유를 먹었다. 내 짝은 잘 사는 집이었는지 우유를 급식받았는데, 며칠 뒤 혹시라도 내게 눈치 보며 먹지 않을까 염려했는지 내 우유까지 신청해 주었다. 당시 우리 집에서 큰 차길 건너 연립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놀이터가 있는 마을이라 간혹 놀러 가곤 했다. 피아노를 잘 쳤던 그 여자아이는,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은 내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을 전해주었다. 그건 내가 생각지 못했던 문화였다.


고체 우유와 급식 우유, 나의 어린 시절 일본에서 만든(뒤에 알았다) ' 우주소년 아톰'을 보며 우주적인 상상과 연결로 색다른 정신문화를 시작했다. 자치기, 고무줄놀이 등의 광장 문화 놀이를 경험한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아버지는 삼국지를 읽어라 했다. 처음에는 3권짜리 두꺼운 삼국지 전집을 사서 안겼다. 내가 읽는 걸 어려워하는지 알고 이번에는 얇은 5권짜리 삼국지를 또 사 왔다. 억지로 읽긴 했나 보다. 하지만 부모는 결국 자식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난 권력을 위해 싸우는 삼국지의 주인공이기보다는 뭔가 상처받지 않고 혹은 스스로 편하기 위해 내 옆 사람을 우울하지 않게 하는 , 말 없는 배려의 문화가 어린 시절 더 크게 와닿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문도 닫히지 않는 시내버스 그리고 그것을 코너에서 밀어붙여 억지로 사람을 포개면서 한 줌의 틈을 사람 사이에서 허용하지 않던 그 모질던 안내양이 살았던 집체의 시대. 지금 우리 사회는 개인과 개인이 어느 정도 관심의 거리를 두어야 할지에 대해 오직 정치가들만 대립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대로 삶의 공동체에서 터득한 지혜들로 그 사람에게 뭘 주어야 하고 얼마만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할지를 알아야 하는 것 같다 .미국과 한국의 거리를 좁힌 ,가난한 가족을 살리고 대학교수로 성장 시킨 10달러의 후원과 내 짝의 부모가 건넨 급식 우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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