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대학교 총기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거시 체제가 만들어낸 폭력이 소공동체로 전가된 비극이다. 총기 규제 실패, 정신 건강 시스템의 붕괴, 약물 중독의 만연, 증오 정치의 확산. 이 모든 구조적 폭력이 결국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로 집중되어 폭발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세계적인 코미디 영화감독 롭 라이너 부부가 친아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롭 라이너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 1989)로 로맨틱 코미디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스탠 바이 미>(Stand By Me, 1986)로 성장기 소년들의 우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감독이다. <미저리>(Misery, 1990),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 1992) 등 인간 관계의 복잡성과 감정의 진실을 다루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 그가, 정작 자신의 가족 안에서는 이 비극을 막지 못했다.
인간 관계를 이해하고 사랑과 우정을 그려내는 데 평생을 바친 예술가조차, 거시 체제가 만든 폭력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 비극적 아이러니를 안고 나는 아바타3를 보게 되었다.
아바타3는 할리우드가 도달한 시각적 정점이다. 돈과 기술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낯선 이미지들은 3시간 동안 관객을 압도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화려한 CG와 VFX 기술 뒤에 가려진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전형적이고 관습적이다.
영화는 '설리 가족은 포기하지 않는다'를 구호처럼 반복한다. 가족이 최후의 보루라는 메시지는 할리우드 영화의 합의된 산업적 목표이자, 미국 사회의 전형적인 슬로건이다. 문제는 이 메시지가 현대 가족의 실제 위기를 다루기보다는, 외부의 적을 설정해 함께 싸우는 액션 영화의 공식으로만 작동한다는 점이다.
롭 라이너가 <스탠 바이 미>에서 소년들의 내면과 관계의 균열을 섬세하게 포착했던 것과 달리, 아바타3는 가족 내부의 실제 갈등을 외부의 전투로 치환해버린다. 진짜 적은 밖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체제 자체인데 말이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키리, 친아버지의 세계를 떠나 나비족의 양아들이 된 스파이더. 이들의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 아들이 더 이상 아버지의 세계에 순종하지 않는 현실을 반영한다.
특히 양아버지 제이크가 종족의 생존을 위해 양아들 스파이더를 살해하려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성경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대의를 위해 가족을 희생할 수 있는가? 하지만 영화는 이 깊이 있는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다. 결국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들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서사로 마무리된다.
미국도 한국처럼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세계에 순종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고 갈등한다. 혈통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 아버지와 대립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영화는 이 세대 간 균열을 정면으로 다루지만, 감상적인 화해로 봉합해버린다.
가족은 모든 인간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종착지는 아니다. 우리는 짧은 시간 함께 살다가 각자 독립하고, 부모 세대는 사라지며, 자녀들은 다시 부모가 된다. 가족은 영원히 한 덩어리로 유지되는 조직이 아니며, 정치·사회·문화적 영향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거시 체제가 생산하는 모든 폭력을 가족에게 떠넘긴다. 경제적 불안, 사회적 불평등, 정신 건강 문제, 약물 중독, 총기 폭력. 이 모든 구조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가족이라는 작은 단위로 전가된다. "가족이 마지막 보루"라는 말은 아름다운 가치가 아니라, 체제의 책임 회피다.
롭 라이너 부부의 비극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족이 마지막 보루라는 것을 몰라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물질 숭배, 약물 중독, 정신질환, 증오 정치의 환경에서 가족이라는 조직은 어떻게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가?
트럼프는 이 사건에 형식적인 추모를 보냈지만, 정작 총기 규제나 정신 건강 시스템 개선 같은 구조적 해법에는 침묵한다. 거시 체제의 폭력을 외면한 채, 개인과 가족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이다.
아바타3를 보면서 할리우드 영화의 근본적 모순을 다시 확인했다. 막대한 자본으로 만든 영화가 돈의 탐욕을 악으로 그린다. 돈의 힘으로만 가능한 영화가 돈을 넘어서는 가치를 말하려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결국 자본을 뛰어넘는 메시지를 스스로 제시하지 못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할리우드가 거시 체제의 폭력을 다룰 때조차 그것을 '악당'이라는 개인화된 존재로 치환한다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탐욕스러운 군사 기업이 등장하지만, 결국 그것은 몇몇 악당 캐릭터의 문제로 축소된다. 체제의 구조적 폭력은 사라지고, 영웅 가족의 활약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되어버린다.
영화 속에서 중과부적의 위기에 처한 나비족은 기도를 한다. 현실적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절망적 순간, 기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설정은 어쩌면 현대 가족의 초상 그 자체다. 거시 체제의 폭력 앞에서 가족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기도 이후 다시 액션과 전투로 돌아간다. 깊은 성찰 대신 화려한 볼거리로.
AI 기술의 등장으로 아바타3는 할리우드 CG 기술의 마지막 정점이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AI가 막대한 자본을 만나 더욱 황홀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창의성이라는 과제는 여전히 창작자에게 남는다.
롭 라이너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남녀 관계에 대한 새로운 대화를 만들어냈고, <어 퓨 굿 맨>에서 "당신은 진실을 감당할 수 없다(You can't handle the truth)"는 대사로 체제와 개인의 갈등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현실의 공동체는 영화와 달리 화해로 귀결되지 않는다.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가족에 넘겨진다. 영화가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발악도 기도도 아닌 그저 회피일 뿐이다.
아바타3는 헐리우드의 마지막 발악인가, 기도인가?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자본의 한계를 알면서도 기술의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발악이다. 그 안에서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다루려 애쓰는 것은 기도다. 하지만 진정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채 시각적 쾌감으로 덮어버린다면, 그것은 기도라기보다는 주술에 가깝다.
롭 라이너 부부의 비극, 그리고 브라운대 총기사건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설리 가족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구호가 아니다. 거시 체제가 생산하는 폭력을 왜 소공동체가 감당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 폭력의 전가를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색채와 이미지의 향연보다 더 절실한 것은, 바로 이 질문들이다. 가족을 지키는 방법은 '가족의 단결'이 아니라, 가족을 파괴하는 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그리고 아바타3는 이 불편한 진실 앞에서 여전히 무능력하게 글로벌적인 장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