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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서 절규하는 가련한 폴리페모스에 대한 변호

by 신지승

괴물이 된 자의 서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 '오디세우스'를 2026년 개봉한다고 벌써부터 요란을 떤다.

그런데 왜 오디세우스일까? 오디세우스가 오늘 다시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트로이 전쟁의 영웅, 10년의 전쟁과 10년 만의 고향 이타카로 돌아간 불굴의 귀향자. 그의 여정은 시련과 유혹을 이긴 승리의 상징이다. 외눈박이 식인괴물을 물리치고,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는 등 , 12척의 배 600명의 전쟁 동료 중 배 한 척도 동료 한 명도 살아남지 않았지만 홀로 살아남았다.

나는 오디세우스를 다시 읽는다. 그 이유는 순전히 내가 고향에 귀환한 것과는 그의 신화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단지 이 치졸한 이유로 인해 오디세우스를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다.

영웅의 서사가 빛날수록, 그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오늘도 수많은 작가들이 상처와 패자의 이야기를 복원하고 있다. 폴리페모스!—나는 그를 괴물로만 기억했다. 엄청난 큰 몸집의 식인거인 거기다가 외눈박이였기 때문에 그를 좋아할 구석이 더욱 없었다. 오디세우스의 동료들을 하루에 한 명씩 잡아먹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건네는 포도주에 취해 결국 뜨겁고 날카로운 나무막대로 눈을 잃는다.

양 떼 아래 매달려 탈출하는 오디세우스를 막지 못한 어리석고 가련한 식인거인. 포세이돈의 아들이면서도, 동굴에 갇혀 고립된 채 죽지도 못하고 절규하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나와 어떤 연관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제 나는 영웅 오디세이 한 명의 이야기를 위해 괴물로 만들어진 그의 안타까운 숨긴 이야기를 애써 찾아야 했다. 그러나 어떤 자료에서도 그를 위한 변호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폭력: 누가 괴물을 만드는가

그런데 폴리페모스의 이야기에는 교묘한 함정이 숨어있었다. 엄청난 덩치, 하나뿐인 눈—외양만으로 그는 이미 '타자'로 규정된다. 그런데 정말 그는 식인의 괴물이었을까? 최근 트로이 유적의 발굴등으로 미루어본다면 신화의 역사적인 근거가 전혀 없지 않을 것이다. 고립된 에게해 어느 섬 동굴에 살면서 일정한 법도 없이, 공동생활보다는 개별적으로 목축으로 살아가는 종족에 대한 실제 사례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 근거와 상상이 보태어 만들어진 존재일 수도 있다.

먼저 동굴에는 수많은 양 떼가 있었다. 양을 기르며 살아가던 목동이 갑자기 인육을 탐했다는 서사는 조금은 뜬끔없다. 물론 신화에는 논리도 일상의 법칙도 없는 것이니깐.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웅숭깊은 침묵의 시간이 그에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예고도 없이 자신의 동굴로 침입한 무리들과의 폭력적인 충돌은 나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되는 승리의 서사였고, 그의 뻐김을 위해서는 난쟁이가 아니라 괴물이 필요했다. 특히 신의 아들이면서도 동정을 받지 못할 희생양이라면 더 없는 전리품이 될 것이대. 폴리페모스는 그렇게 만들어진 괴물은 아니었을까?


폴리페모스는 오래전 우윳빛 여인 갈라테이아에 대한 짝사랑으로 실연의 고통과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연인 아키스에 대한 질투로 거대한 바위로 그를 죽였다. 갈라테이아는 아키스의 죽음으로 울고 그 눈물로 아키스를 맑은 샘 , 강으로 변하게 한다. 그렇게 고립을 선택하고 동굴에서 혼자 칩거하고 있는 폴리페모스의 잠복된 폭력성을 오디세우스 무리들이 본의 아니게 도발하였는지 모른다. (푸생의 그림에서는 폴리폐모스는 외눈박이가 아니었다.

산 위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며 갈라테이아를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

오디세우스가 건넨 술에 취해 경계를 풀고, 손님으로 믿었던 멍청함과 순진함이 배반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오디세우스는 하나뿐인 그의 눈을 불나뭇가지로 찔러 실명케 했다.

이제야 비로소 안타깝기도 하다

아! 순간의 방심이 영웅의 장식품이 되었다. 오디세우스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Outis)"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숨겼고, 동굴을 나서며 비로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외쳤다. 이제야 영웅의 뻐김, 승리의 쾌감과 더불어 패배의 굴욕과 모욕감이 교차한다.

그렇게 또다시 그는 스스로를 동굴에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로 인해 이제 몸뿐만 아니라 그는 회복할 수 없는 편견의 동굴에도 갇혀버렸다 —그것은 물리적 동굴보다 더 견고하다. 수천 년 동안 그는 그 안에 갇혀, '괴물'이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만을 부여받았다.

포세이돈의 친아들이라는 이유로 —. 절대권력의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폴리페모스가 눈을 잃고 절규할 때, 포세이돈은 그 소리를 들었다. 바다의 신은 아들의 고통에 분노했고, 오디세우스의 이후 귀향을 방해했다. 이것은 권력의 횡포 일 수도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기도 할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전쟁 서사의 전형적 패턴이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원형. 적을 인간 이하로 만들어야 승리가 정당화된다.

신화의 이야기는 포세이돈이 신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이 감정을 왜곡시켜 오디세우스의 영웅화에 기여한다.

만약 평범한 아버지가 비록 폭력아들의 눈을 뺀 자에게 복수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권력'이라 쉽게 부르지 않을 것 같다.


폴리페모스가 오디세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양 떼를 키우고 고립된 섬에서 그렇게 살아갔을 것이다. 왜 식인거인이 굳이 사람이 없는 동굴에 혼자 살아갈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신의 아들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지닌 태어남의 축복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로, 사랑받을 자격으로 태어났다는 것. 신의 자식이면서도 고립된 동굴에서 살아야 했던 그의 처지는, 축복받은 탄생이 반드시 축복받은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비극의 평범성을 보여준다.

오디세이스를 만나기 전에는 그는 거대한 식인괴물이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이었던 것이다.

폴리페모스는 실연, 고립, 환대 위반(버전에 따라 폐쇄적인 지역의 침범)의 피해자라는 진실이 있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고, 신화는 영웅의 것이며, 이야기는 말할 수 있는 권력의 것이다.

고립된 자들의 거울

시간이 지나고, 삶을 돌아보며 나는 깨닫는다. 나는 오디세우스처럼 고향으로 돌아가 인간의 삶을 되찾으려 귀환자가 아니라, 동굴에 갇혀 고립된 폴리페모스에 더 가깝다는 것을.

누구나 신화와 역사, 성공의 서사 위에 자신을 놓기를 바란다.


마오쩌둥의 대장정은 오디세이와 다르게 그들의 이념적 고향을 떠나 괴물로부터 도망을 다니며 새로운 천국을 향하는 역사적 서사이다

마오쩌둥의 대장정은 겨우 1년 1개월 동안 중국 오지를 장개석 군대를 피해 다니며 , 10만 명으로 출발해서 9만 2천 명이 죽고 8천 명만 살아남는다., 결국에는 신들의 (이념의 신념 어린 투쟁으로) 도움으로 인해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이야기로 미화된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신들의 가호가, 마오쩌둥에게는 이념이 총과 칼이 되었다.

우리는 신도 이념도 없이, 이야기의 무대 뒤에서 혹은 한라산 기슭에서 혹은 어느 뒷동산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다. 귀향을 포기당한 자들, 역사의 여정 속에서 낙오한 이들, 세력에 의해 괴물이 되어버린 자들. 세상에는 영웅보다 훨씬 많은 타향살이와 고립된 괴물들이 우글거리는데, 미디어에서는 영웅의 이야기만이 넘쳐난다 외딴 동굴에서 수많은 폴리폐모스의 야기를 만들지만 그 목소리는 작고 메아리치며 웅웅 거리기만 한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에피소드를 떠올려보자.

오디세우스는 귀는 막지 않고 몸을 돛대에 묶었다. 유혹을 끌어안지만 굴복하지 않는 영웅의 사치스러운 지혜. 선원들은 귀를 밀랍으로 막았다.

유혹의 노래를 듣고 바다로 뛰어든 자들. 부테스(Butes)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어버린 예리한 귀를 가진 영웅. 그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를 구해주었다. 부테스는 유혹에 굴복한 자가 아니라 아름다움에 귀의한 자일 것이다.

오직 여기서도 오디세우스의 지혜와 선원들의 복종만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한다.

우리는 오디세우스처럼 돛대에 묶여 유혹을 적당히 누리거나 귀를 막거나 음악을 온몸으로 즐길 ,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내가 만일 오디세우스의 배 위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영웅의 서사는 오직 두 가지 대응만을 기록한다—영웅의 승리와 선원의 순종. 나머지는 모두 대게 부테스처럼 숨겨지거나 삭제된다.


오디세이아 시작에서 " 히포테스의 소들을 왜 잡아먹었는가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너희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함께 한 동료 들을 책망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디고 한다.. 그는 이타카의 왕자로 태어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향을 통해 지역 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회복함으로써 영웅 서사와 권력 서사가 겹쳐지는 구조를 보여준다.

상상의 동굴: 가장 잔혹한 감옥

이야기의 폭력 중 가장 잔혹한 것은 무엇인가? 눈을 빼앗는 것도, 이름을 지우는 것도 아니다. 가장 큰 폭력은 상상과 이야기의 동굴에 영원히 가두어져 버리는 것이다.

'폴리페모스의 오디세이아'를 쓴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고통과 고립의 동굴에서 울부짖는 그를 쉽게 탈출시키지 못한다. 그를 깊은 동굴에서 해방시킬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소설가들과 영화감독들은 괴물을 상상했다.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짐승 같은 괴물이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받는 이야기. 하지만 결국 그 괴물은 왕자로 변한다. 사랑의 마법으로 본래의 모습, 즉 권력과 부를 가진 왕자로 돌아간다. 괴물은 괴물인 채로 사랑받지 못한다. 그는 반드시 왕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일종의 구원 판타지다. 진정한 윤리는 '변신'을 전제하지 않고도 괴물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방향이어야 했다. 하지만 인류의 상상력은 그 지점에 이르지 못한다.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는 두 노숙자의 사랑을 그렸지만, 그마저도 결국 낭만적 비극의 미학으로 포장된다.


현대 드라마는 이 폭력을 더욱 정교하게 재생산한다. 가난한 자를 필요 이상으로 괴물로 만든다. <오징어 게임>의 빚더미 주인공들, <기생충>의 반지하 가족—그들은 선량한 피해자로 시작하지만, 서사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괴물화'된다. 폭력적이 되고, 비윤리적이 되고, 결국 오디세우스처럼 홀로만 살아남는다

가난이 없다면 종교도 정치도 영화도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정말로 괴물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왜 괴물을 사랑해야만 할까? 괴물은 곧 나이기에 최소한 변호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도 부도 없는, 왕자로 변하지 않는, 그저 외눈박이로 남은 폴리페모스를 쉽게 사랑할 수 없도록 나는 상상의 동굴에 갇히고 있었다.


현대영화는 가난하고 추하고 고립된 채로 남은 존재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다들 고군분투하는 이는 가난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고향 이 테카에서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아내의 구혼자를 처치하고 왕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다시 오디세우스도 결국 키로케에서 낳은 아들에 의해 죽는다. 영웅의 말로는 허무하다. 그러나 폴리페모스는 여전히 동굴에서 보이지 않는 눈으로 분노의 절규를 내뱉고 있다.


더 이상 탈출할 수 없는 동굴처럼, 더 이상 그를 부활시킬 수 없도록 만든 이야기의 폭력적인 함정. 미디어는 이 상상의 폭력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수천 년이 지나도 그들은 오디세우스를 앞세워 같은 역할을 반복한다.

역설적이게도,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시 오디세우스라는 가공의 영웅으로 우리의 눈을 찌르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디세우스는 서구 근대의 사고방식 전체를 형성한 원형을 제공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폴리페모스가 하나뿐인 눈을 잃었듯이, 나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을 수 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바다 건너 일개 지역왕 영웅이야기로 그리고 우리를 다시 일개지역 신화의 동굴에 가두려 하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를 지혜롭고 따뜻한 인간적인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왕의 아들이고 지역권력과 결합하여 신의 권위와 밀당하는 지역 영웅화의 이야기에 환호할 시간은 뛰어넘어야 한다.


폴리페모스는 외형적으로 덩치 크고, 못생겼으며, 외눈을 가진 고립된 존재. 여기에 폭력적 전과와 식인의 금기까지 덧붙여진다. 인간과 사회의 모든 기준에서 그는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존재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포세이돈의 친아들이라는 설정이 추가됨으로써, 오디세우스의 용맹과 기지, 영웅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서사의 장치가 된다. 단순히 괴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혈통이라는 이유로 더 강력하고, 더 위협적이며, 동시에 영웅을 정당화 시킨다.

아! 이야기의 음모와 힘이여! 상상마저 궁지로 가두어버리는 서사의 폭력이여!

상상의 굴레를 풀어라

리페모스에 대한 변호는 신화, 이야기의 권력, 서구적 상상에 대한 질문이며, 더 나아가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문제를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누가 영웅이고 누가 괴물인가를 결정하는 문화는 다분히 서구적 성공, 정복에 대한 과잉미학이다. 권력, 성공, 외양이 곧 정당함이라는 심리적 원형을 이식시키고 패자를 악마화시키고 타자를 괴물로 배제하는 서사의 시작이다.

대항해 시대 이후 수많은 국가, 민족들을 식민지화하는 정복과 폭력의 심리적 원형이 되었다. 영웅화는 권력과 정복의 면죄부가 되었다. 낯선 인종과 문화를 위협으로 삼고 경쟁과 정복을 공생의 가치보다 앞세우면서 그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를 떠돌아다니며 스스로를 오디세우스와 일체화시켜 왔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틀과 상상에 스스로를 가두는가?

폴리페모스에게 가해진 상상의 굴레를 푸는 것—그것은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숨기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구 주류의 서사에 맞추어 자신의 이야기를 왜곡하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동굴 속에서—물리적 동굴이 아니라 타인이 만들어놓은 이야기의 동굴 속에서—갇혀 살아가는가?

신의 아들이면서도 고립된 외눈박이, 권력의 혈육이면서도 소외된 목동, 호의를 베풀었지만 배신당한 존재—폴리페모스는 이야기의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그는 우리 대부분이 걷는 삶의 진실에 더 가깝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숨기기 위해 사용한 그 이름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폴리페모스의, 그리고 우리 대부분의 진짜 이름일지 모른다. 단 한 명 영웅의 서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그저 누군가의 이야기 속 배경으로 사라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존재들.


2026년, 크리스토퍼 놀란은 2억 5천만 달러를 투입하여 오디세 우스를 다시 소환한다.

<오펜하이머>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감독이, 최첨단 IMAX 기술로, 세계 최고의 배우들을 모아, 다시 한번 영웅의 귀향을 찬양하려 한다.

답은 명맥 하게 쉬울 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영웅을 갈구한다. 그들은 여전히 승리의 서사를 원한다. 그리고 그 서사를 위해서는 여전히 괴물이 필요하다. 폴리페모스는 2026년에도 다시 한번 오디세우스의 승리를 위한 제물이 될 것이다. 매트 데이먼이 연기하는 지혜로운 영웅이, 또다시 외눈박이 괴물의 눈을 찌르고, 관객들은 환호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구의 문학 역사 영화 미디어전반에 깊게 스며들어 있는 그들의 상상의 동굴이자 샤먼의 동굴이다. 수천 년이 지나도,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영웅과 괴물, 승자와 패자, 귀향하는 자와 동굴에 갇힌 자. 놀란의 영화는 이 오래되고 낡은 이분법을 더욱 장엄하게,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화두를 안길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또다시 누군가는 오디세우스의 그림자를 밟으며, 자신이 폴리페모스가 아니기를 바랄 것인가?

수천 년 동안 괴물이었던 자에게, 뒤늦은 변호를 바친다. 죽고 실패하고 사라진 이들을 상상하는 모든 시도는 폴리페모스에 대한 변호이다.


칼립소의 섬에서 7년을 보냈다. 여신과 함께. 선원들은 다 죽었고, 혼자 남아 섬에서 나름 안락하게 지냈다. 죽은 자들의 원망을 듣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2022년 한국을 찾은 그리스감독의 작품을 통해 칼립소를 처음 알았다. 12척의 배가 사라지고 , 600여 명의 동료들이 모두 죽고 홀로 살아남았다. 혼자만의 귀향은 죽은 이들에게 어떤 느낌일까? 소수만 남겨진 마오쩌둥의 대장정이, 사라진 그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가? 불멸의 이념에 환호한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다시 그 대장정의 결과가 지금의 중국처럼 영원불멸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폴리페모스의 이야기는 대항해시대, 프랑스와 영국, 미국등이 인디언원주민들의 만남과 정복의 역사를 연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결국 오디세우스가 마녀 키르케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오디세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숨겨진 엔딩은 서구의 운명일 수도 있음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신과 이념으로 점철된 역사의 무대 뒤편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신들의 가호와 영웅의 서사가 주어졌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많은 이들에게는 신의 무관심과 폴리페모스의 고립과 분노, 절규만이 남는다. 놀란감독이 오디세우스를 개봉할 때 나는 '폴리페모스'라는 영화를 2백5십만 원으로라도 이 외딴 동굴에서 만들어 오디세우스의. 신화적 범죄를 성찰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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