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창작 실험
"이 영화는 짜깁기예요. 종합선물세트 같아요."
내일 상영회를 앞둔 밤, 그녀가 말했다.
나는 흥분했다.
"구성과 내러티브의 문제를 분명히 지적해야 합니다. 왜 종합선물세트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야죠. 그런 거 없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이 작품에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우리가 만든 것은 관객을 목적으로, 흥행을 목적으로 삼는 영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그들에게 약속한 '멋진 영화' 때문이었다. 멋진 영화라는 것이 각자의 욕망과 상상, 가치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에게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모독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독특한 창작 방법을 가져왔다.
도시의 참여자를 가족으로 한정했다. 개인 참여자는 3분의 1 정도였다.
가족 단위나 개인이 하고 싶은 에피소드를 제시한다. 마음대로 당신들이 감독이 되고 촬영을 해도 좋다. 간혹 필요할 때, 당신들의 아이디어가 없을 경우에만 내가 연출한다.
그렇게 한 달 동안 6~7회 촬영을 진행했다. 나는 그것을 소스로 편집해 작품을 만들었다.
참여자는 등장인물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이 자기 이야기를 에피소드로 구상하고 촬영한다는 것을.
글을 쓰는 50대 여성 — 인정받지 못한 문학소녀의 꿈을 품고 있다.
지적장애가 있는 성민 — 공원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모두를 똑같이 그린다.만나는 사람들에게 "행복하시네요!" "대단하네요"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한다.
가수를 꿈꾸는 30대 여성 — 혼자 공원 숲에서 노래 연습을 한다.
자동차 사고로 의족을 한 아버지와 그 아들 — 사고 이후 서로 단절된 감정을 안고 있다.
이 네 부류의 인물들이 공원이라는 공간에서 서로 스쳐 지나가며 이야기가 엮인다.
나는 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촬영을 지켜보면서 나를 떠올렸다.
영화를 못 만든다고 조롱받는 자신. 영화라는 매체가 전제하는 직업 연기자, 자본, 상품적 스토리가 아닌 연기 무경험자, 생활인, 일상적 스토리로 멋진 영화를 만들려는 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가 깊은 늪에 빠질 때는 동아줄을 내려주었다. 이야기가 깊은 강을 만날 때는 나무다리를 놓아 건너게 했다.
커뮤니티 방을 만들었다. 촬영이 끝나면 수시로 에피소드를 올렸다. 누구나 이야기를 상상하고 제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야기는 한 방향으로 흘렀다.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의 한 꺼풀을 들여다보면 아픔과 무시와 갈등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했던 성민과 글 쓰는 50대 여자는 공원에서 만난다.
자신의 글을 읽어봐 주기를 바랐던 그녀. 하지만 성민은 그녀가 바라는 평가에 인색하다. 지적장애인 성민이 다가오자 그녀는 냉혹하게 내친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 하지만 아빠는 항상 남의 일에만 관심을 가진다. 작고 사소한 일, 어쩌면 더 의미 있고 가치로운 일일 수도 있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들과 가족은 매번 낯설고 불만이다.
그런데 아들이 공원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다급한 아빠는 공원을 다니며 아들을 찾는다. 그러다 글 쓰는 50대 여자와 만난다.
"혹시 약간 모자란, 공원에서 그림 그리는 남자 보신 적 없나요?"
그때 50대 여자는 안다. 그 남자가 찾는 이가 자신이 이유 없이 내친 지적장애인 성민임을.
그때서야 50대 여자는 되돌아본다. 글이라는 창작 행위를 하면서 어쩌면 가장 작은 배려를 놓친 자신의 좁은 감수성을. 그리고 성민이 장난처럼 남긴 말, "대단하시네요"라는 말이 진심으로 자신이 듣고 싶었던 소리였다는 생각에 이른다.
지적장애인 성민이 자신의 글을 이해하고 내뱉은 말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깨닫는다. 그 말이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라는 것을. 곧 자신이 사랑하는 글의 삶과 반하는 행동을 했음을 알게 된다.
스스로의 얕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고통. 특이한 캐릭터이지만 곧 우리 모두의 얼굴이기도 할 것 같다.
그녀는 성민을 찾기 시작한다. 아들을 찾는 아빠와 함께 공원을 이리저리 다닌다. 혹 사고가 났을까, 119 앰뷸런스 뒤를 쫓기도 하고 불행을 모르는 아이들의 춤판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은 아들도 아니다. 이름도 모른다. 공원 방송을 하면서까지 찾을 관계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성민을 찾고 싶다.
곧 아들과 함께 있는 성민을 발견한다. 하지만 아빠는 아들이 성민과 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불편하다.
못 그린 그림. 그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림을 그리는 성민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냥 못 그리는 지적장애인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인다. 성민의 그림을 모아 숲 속 전시회를 열어준다.
가수를 꿈꾸는 여자는 노래를 불러준다. 공원을 찾던 사람들은 성민의 그림을 보면서 예술과 창작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멋진 작품을 내는 이들만 예술가로 불러주어야 하는가.
나는 함께 만들어낸 이 영화가 무척이나 멋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 영화를 짜깁기라고 했다.
과정 중에 그녀는 어떤 아이디어나 다른 이야기를 제시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기대치가 높았어요. 작품성 있는 걸 찍는다고 하셨고, 토론을 해서 주제를 맞추면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출발했는데, 그게 잘못된 것 같아요. 감독님이 처음에 찍고 싶은 것을 마음껏 찍으라 했고, 그것들이 모티브가 되어 이야기가 되는 거였다면... 저는 어제 딱 봤을 때 짜깁기란 생각이 들었어요."
"짜깁기라니요? 그렇다면 조각보 이야기는 왜 하셨어요?"
"그 조각보들은 하나의 흐름이 있어요. 조각보가 그냥 색감이 예쁘다고 해서 조각보가 되는 게 아니에요. 조각보는 조각 자체가 흐르는 물을 형성하기 위해서 어떤 색깔, 어떤 디자인을 그려야 해요. 오늘 아침에 나오기 전에 한 번 보니까, 캐릭터 소개와 주제... 이 작품은 정말 괜찮은 작품이라고 했을 때, 그건 정말 감독님만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요? 당연할 수도 있는 거예요. 나의 작품이기도 하고 함께한 이들의 작품이기도 해야 하는 거죠. 그럼 나의 작품이 아니어야 됩니까? 난 시나리오를 따로 쓰거나 에피소드를 따로 설정한 게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잘 들어보세요. 편집을 하는 사람은 어떤 철학을 가지고 그것을 통합해 내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하고 있고, 해야 되는 역할이에요. 철학적 관통성 없이 전혀 관계없는 에피소드를 일관성 없이 펼쳐놓는 진짜 짜깁기를 해야 될까요? 그것은 철학적 시선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고, 하는 겁니다."
"일단 이야기를 마음대로 만드세요. 그리고 일일이 내가 개입하지 않겠다. 원할 때만 개입하겠다. 난 여러분들이 그린 그림들을 관통할 주제를 찾는다. 그것은 등장인물 속에 나를 투영하는 것이다. 그건 내가 잘하는 것이다. 모든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것들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는 서로의 연관성을 찾아냈고, 주제를 찾아냈고, 조각보의 미학을 이루어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조각보는 민주주의적 창작의 이상입니다.
흐르는 물은 예술적 완결성과 철학적 통일성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은 다양한 축을 균형 있게 엮어내는 편집의 미학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의 창작이며 예술이듯이, 이 영화는 개인적 예술에 대한 사색이 존재하며 그것을 공동창작의 방법으로 거리 두기를 시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떨어진 벚꽃을 유심히 보는 자들은 찬란하고 화려한 벚꽃을 보는 이들보다 많지 않다. 무리 지어 핀 벚꽃을 짧다고만 하지만, 땅에 떨어진 한 잎의 벚꽃처럼 우리 모두는 그런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보는 자에 의해 다양한 철학과 가치와 만날 수 있다. 애초부터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해석의 다양성을 스타 영화, 상업영화들로 인해 이야기의 자극성으로 상실하고 말았다.
가족 영화부터 아동 영화, 그리고 예술 영화로서의 형이상학이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그녀가 말했다.
"그게 가장 아쉬워요. 단순히 장애를 가진 무개념의 그림을 왜 전시해주어야 하나요? 그건 일종의 무골한 허위의식이에요. 장애인을 향한 온정주의적 태도예요. 배려를 치장한, 휴머니즘을 가장한 영화적인 엔딩이 아니라 EBS 청소년 드라마적 관습이에요."
결국 이 영화는 묻는다.
집단이 만든 파편들을 누가, 어떤 철학으로 엮을 것인가?
통합은 짜깁기 같은 통제인가, 아니면 해석인가?
이런 창작법에서 감독은 철학적 관통성을 가진 해석자여야 한다. 그런 능력을 가져야 한다. 집단 창작의 결과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살려내는 철학적 큐레이터이기도 하다.
'예술의 민주주의'와 '감독의 철학적 주체성' 사이의 줄타기 과정이기도 하다.
이 작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집단창작이 아니라 개인창작을 통합해 나간 공동창작 방식의 작품이다.
멋진 영화라는 것에 대한 획일적인 환상이 존재한다. 멋진 영화라는 것은 멋진 사람들처럼 수없이 다양해야 한다.
이제 좀 더 철학적이고, 좀 더 개별적이며, 좀 더 다양한 멋짐이 표현되어야 한다.
생각하지 못한 개성을 통해 스스로와 참여자가 스스로와 관계를 성찰할 수 있는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야말로 멋진 영화다.
예술은 언제나 시대의 구조를 닮는다.
사회주의의 예술은 집단의 언어로 말했고, 자본주의의 예술은 개인의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한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브나로드 운동 속에서 창작을 '삶의 연대'로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창작의 형식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조각보영화'이다.
조각보는 여러 사람의 손이 닿은 천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패턴으로 완성되는 공동체의 예술이다. 그 속에는 서로 다른 색과 질감, 시간과 기억이 겹쳐져 있다. 이것은 단순한 '협업'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며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다.
조각보영화는 바로 이 원리를 따른다.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고, 누군가는 대사를 만들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자신의 일상 속 표정으로 '연기'한다. 모두가 자신의 조각을 내어놓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영화라는 큰 천이 된다. 이때 감독은 중심이 아니라, 조율자이자 엮는 사람이다.
사회주의 예술은 예술의 집단적 성격을 가장 급진적으로 실험했다. 그러나 그 집단은 종종 '개인의 표현'을 억눌렀다. 사람은 도구가 되었고, 집단은 이념의 그릇이 되었다. 그곳엔 '다양성의 조화' 대신 '단일한 구호'가 있었다.
조각보영화는 그 오류를 반복하지 않는다. 집단은 여전히 중심이지만, 각 조각은 고유한 빛깔을 유지한다. 여기에는 지도자도, 영웅도 없다. 모든 창작자는 자신의 리듬과 감각으로 참여하고, 그 차이의 합이 곧 영화의 형태가 된다. 조각보는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가 아니라, 불완전한 것들의 공존으로 만들어지는 진실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예술을 '개인의 천재성'으로 환원시켰다. 감독은 브랜드가 되었고, 작품은 상품이 되었다. 창작은 더 이상 수행이 아니라 경쟁이 되었고, 예술가는 '작가주의'라는 이름으로 고립되었다.
조각보영화는 이 구조에서 벗어난다. 여기서 '작가'란 이름은 해체되고, 그 자리를 공동체적 서사의 흐름이 대신한다. 하나의 영화는 여러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며 태어나며, 그 속에서 '나'는 사라지지만, '우리'는 생겨난다. 그것은 소유가 아닌 나눔의 미학, 지배가 아닌 관계의 형식이다.
1930년대의 브나로드 운동은 문학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엘리트에서 민중으로 돌려놓은 위대한 실험이었다. 그들은 민중의 삶 속에서 다시 '이야기의 근원'을 발견했다.
조각보영화는 이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더 확장한다. 그때의 브나로드가 지식인의 '하강 운동'이었다면, 조각보영화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수평적 엮임이다. 이곳에는 가르침도, 구원도 없다. 대신, 마을과 인간, 기술과 자연이 함께 살아내는 예술의 형식이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예술이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예술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조각보영화는 기술의 발전이나 형식의 실험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의 존재론적 구조가 진화한 형태다. AI와 디지털 네트워크는 이제 한 사람의 창작이 아닌, '다중의 창작'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의식'이다. 조각보영화는 이 기술을 공동체적 감각으로 되돌린다.
그 결과, 영화는 다시 '보여주는 예술'에서 '함께 짓는 행위'로 돌아온다. 조각보영화는 감상되는 작품이 아니라, 참여되는 사건이다. 그 속에서 관객은 더 이상 관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조각으로 편입된다.
조각보영화는 사회주의적 집단창작의 이상, 자본주의적 개인창작의 자유, 그리고 브나로드 운동의 공동체 정신을 모두 품으면서도 그들을 초월한다.
그것은 ‘소유’와 ‘통제’를 벗어난 예술,
‘표현’이 아니라 ‘공존’의 예술,
그리고 인간이 다시 인간과 엮이는 방식으로서의 창작이다.
조각보는 단순한 천의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 난 조각들이 서로를 덮어가며
온기를 나누는 존재의 방식이다.
나는 그 속에서
예술의 새로운 미래,
함께 짓는 세계의 가능성을 본다.
https://brunch.co.kr/@top/642 조각보-모두의 영화를 위한 창작방법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