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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 '해와 달'은 폭력적인가?

by 신지승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의 눈으로 다시 읽으면 그 서사는 잔혹하다.

-엄마는 잔치 갔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끌꺽삼킨다.'라고 표현한다.

-엄마옷을 입은 호랑이는 싸리문으로 손을 내민다. 엄마손으로 대변되는 가난한 이의 거친 손을 상징으로 차용하는 호랑이의 영악함

ㅡ뒤늦게 꼬리룰 발견한 오누이는 나무 위로 올라가지만..

도끼 찍어 올라간 나무 위를 우물에 비친 모습으로 파악하는 서스펜스.

기름칠하며 올라가는 호랑이의 코믹함과 더불어

호랑이에게 진실을 발설하는 멍청한 동생으로ㅡ인한 위기

그리고 도끼를 찍어가며 올라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로 이어지는 고공액션을 통한 구원

기도하는 악인의 기도에도 부응하여 중고동아줄을 내려주는 하늘까지.

호랑이의 위협은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다.

결국 붉은 수수밭으로 떨어지는 피의 미장센은 그야말로 백미다.

ㅡ동생은 해가 되고 오빠는 달이 된다.



그런데 이 동화를 7세 이하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게 맞나? 싶었다.

어른의 눈으로 읽으면 구원 서사이고, 악인에게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는 권선징악의 구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느끼는 감각은 어떨까?
호랑이가 엄마를 잡아먹는 장면에서 이미 마음이 무너지고, 나무 위에서 쫓기는 장면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결국 구원보다는 두려움이 오래 남아 강한 각인이 될 수 있다. 현대 15금 상업공포영화의 수준이다


이 이야기는 일상성, 지역성, 상상력에 있어 어떨까? 이야기란 그 관객의 수준에 맞추어 방향과 위지에 의해 수많은 변형이 가능하다. 이 이야기는 사실 너무 흔한 상업대중영화 이야기구조이다. 보편적 신화 구조(Mythic Structure)로 인간들이 태양과 달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가 전 세계적으로 유사한 신화적 요소 — 태양/달의 형성, 추격 또는 위협으로부터의 탈출, 하늘과 땅 사이의 연결 매체, 형제자매 관계 — 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럼 이 이야기를 마을영화적인 스토리,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다른 일상과 상상력을 결합한 매력적인 이야기로 바꿀 수 있을까? 마을영화가 지향하는 내러티브는 상품적 이야기구조와 대결해 낼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산속 오두막집을 떠나 강릉의 바닷가 마당에서 아이들이 모래사장에 누워 별을 세며 엄마를 기다린다면?
-구례 느티나무 정류장에서 막차를 기다리다 결국 막차에도 내리지 않는 엄마. 그리고 내린 처음 보는 아빠를 만난다면?
-동네 잔치집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주 돌담길을 따라 굿판을 보게 되고 늦게 잔치집을 엄마를 찾는데

엄마를 찾을 길 없다.

여기서 매력적인 이야기로 더 발전시키는 것은 의지의 문제이다.


동화에서의 호랑이도, 도끼도, 썩은 동아줄의 장치를 지역적 ,일상적 상상력의 장치를 넣어 서스펜스 코믹

이야기로도 발전 시켜 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나홀로 집에'도 이와비슷한 구조이다.

꼭 '내 친구집은 어디에'식의 평탄하지만 깊은 로컬리티를 담는 이야기만 계속 만들자는 게 아니다 .

윤리적인 도덕교과서같은 이야기만 만들자는 게 아니다 .

폭력적인 상상이 나쁜 것은 그 외 다른 다양한 상상력의 입체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우주높다 높고 깊은 인간의 상상력을 제압하기위해 쿠테타같은 이야기의 반칙을 사용하는 것이다.



지역성을 입힌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사는 땅의 냄새와 색깔,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일이다.
일상을 초월한 상상력을 가한다는 것은 동화 속 엄마를 찾는 여정이 곧 나와 근처의 위험과 축복을 동시에 찾는 여정이 된다.


일정 정도의 나이가 되면 위험 인식·도덕 학습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면역성과 소화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도 부정 할 수 없는 문명이다.

나도 이런 류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이토록 잔인한 이야기에 인이 박힌 걸까?

도대체 이때까지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 동화를

읽혀주었을까. 극단적인 내 생각은... 한탕주의 이야기꾼들에 의해 참 많이도 휘둘려 왔다는 거다.


'그냥 해와 달에 대한 신화이고 동화인데 뭘?'

하지만 현실적인 감각으로 해석하자면 호랑이 일가족 몰살 스토리다.

개연성 없는 극단스토리의 시발이다

엄청난 자극적인 고문을 가하다가 그 고문이 끝나는 지점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를 제공함으로 고문에 대한 생각보단 이미지에 대한 감동으로

가져가는 오랜 이야기기법이다. 그러니깐 전래동화다.


왜 전래동화 '해와 달'은 그런 상업영화같은 잔혹성 강한 이야기를 선택했을까?

아이들에게 “세상은 잔혹하기에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남길 것인가 “세상은 기다리고 찾아가고 만나며 배워가는 곳”이라는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를 작가는 그 시대에 맞게 결정해야 한다.

만일 이 이야기를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각인시키려는 개인 작가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 간다면 어떤 이야기와 엔딩이 선택될까?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은 없을 수 있다.

이 영화의 과정에서 토론하고 흥미롭게 만들어 가는 그 '과정'이 중요하고 마을 축제를 위한 , 우리 마을의 지역성과 일상을 기념하기 위함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


현실에서의 폭력과 살인은 용납하지 않으면서 예술 속 폭력, 살인의 묘사는 구원을 이야기하기 위해 불필요한 거라면 논리로 대중영화들은 그 존재를 정당해 왔다

덴마크감독들의 10여 년 전 폭력, 살인은 묘사하지 않겠다는 '도그마선언'을 전 세계적으로 실천하겠다고 했는데 지금 덴마크는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종교, 정치, 예술 속에 우리의 상상을 해하고 망상을 부채질하며 불필요한 공포를 조장하며 그럴듯한 주제를 앞세우는 스토리텔링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 스토리의 업은 작가보다는 그 스토리를 소비하는 대중들이 받는 경우도 많았다.

모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이고 몸살을 할 때가 있었다.

아이들의 영혼에 트라우마를 만들어 내며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감길 거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해와 달'류의 영화들은 만들어질 수밖에 없고 만들어질 것이라는 전제아래

마을영화는 산속 외딴집으로서의 역할로 존재해야 한다.

'해와 달'식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걸 멈추지 않을 이야기 공장의 도시에서

일상과 지역의 매력적인 상상으로 빚어지는 강박 없는 이야기의 외딴집 하나는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상상의 균형이 만들어진다. 돈의 강박을 포기할 수 없는 대중상업영화, 예술과 메시지의 강박에 빠진 작가예술영화 그리고 강박 없는 이야기 축제의 마을공동체영화, 그 3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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