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발전소 14기 입주작가 성과 전' 인상비평
2024년 11월 1일부터부터 12월 1일까지 대구예술발전소에서 14기 입주작가 성과전이 진행되고 있다.
'파편화된 알고리즘'이란 제목의 전시는 지난 10개월간 14명의 입주작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창작의 결과물을 통해 고립되고 깨어진 파편과 같은 개별 작가들이 하나의 전시를 통해 소통하고 대화하는 거대한 알고리즘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대구예술발전소 레지던시에 참가한 작가들은 신진작가, 젊은 작가들이다.
신진작가라는 단어 속에는 진입장벽이 전제되어 있다. 젊기 때문에 신선하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이지만, 젊기 때문에 낯설고 어눌하고 서툴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젊은 작가, 특히, 지방의 도시에 서식하는 작가들, 그 작가의 삶이란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울 것인가 신진작가라는 단어 하나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파편은 처음부터 깨어져 있다. 파편은완전하지 않고 가치도 없으며 의미도 없다. 하지만 파편들은
파편에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향해 온몸을 부딪히고, 무한한 반복의 고통을 인내하고 마침내 경계를 넘어간다.
청춘들의 몸짓들은 외롭고 깨어져 마치 파편과 같이 흩어져 보이지만 그 어둡고 고립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어떤 이는 내면을 향한 진지한 탐구를 시도하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세상을 탐구한다. 그리고 세상과 충돌하고 부조리한 그 좁은 틈 사이에 희망과 절망 혹은 그것이 공존하는 현실을 찾아 예술적 위무를 한다.
파편은 파편을 만날 때 비로소 새로운 의미와 형태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고통스럽고 외로운 젊은 작가들의 진지한 고민들이 머무는 시선을 같이 따라가 보는 기쁨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깨진 파편들은 날카롭다. 누구든 만나면 베어버리고 아픔을 선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날카롭고 예리함은 어디애서 온 것일까. 날카로움은 고통의 흔적이다 버려지고 던져져 생긴 상처와 흉터가 바로 날카로움과 뜻하지 않은 예리함이다.
작가들은 세상에 던져졌다. 던져질 때 혹은 그 이전에 이미 깨어졌다, 어쩌면 이미 깨진 채로 쓸모없이 방치되다 비로소 버려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던져짐은 작가들에게 고통의 기억과 날카롭지만 예리함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그 예리함으로 자신과 세상에 대한 탐구를 작가의 방법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던져진 근원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김경한 작가는 온몸으로 온통 하얀 여백을 향해 저항한다.
텅 빈 캠퍼스에 그야말로 뼈와 살을 비비며 채워나간다.
거대한 캠퍼스를 채우며 몸부림치는 작가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거대한 여백은 넘어야 할, 채워야 할 혹은 남아있는 고통이자 공간이다. 자학에 가까운 몸짓으로 빈 공간을 오롯이 그의 피와 뼈와 살로 모두 다 채워 놓고자 한다
그러나 채워도 채워도 캔버스는 넓디넓고 뼈와 살이 부딪혀고 쓸려도 여전히 남는 여백들이 남아있다.
아마도 작가는 그 빈 여백이 모두가 자신의 저항의 흔적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하나의 경계를 넘어간다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여백은 그의 저항의 크기와는 애당초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더 크다.
주어진 하얀 캠퍼스를 가득 채운다 한들 또 다른 하얀 캠퍼스가 그를 향해 버티고 서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한동안은 반복될 빈 캠퍼스들의 벽
온몸으로 거부하는 처절한 그의 작가적 고행. 그의 작가적 저항의 끝을 기대해 본다.
최승철
최승철 작가는 고통스러운 자신의 내면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준다.
우리를 초대한 그의 공간은 통일되지 않는 이중의 세상이다. 겹쳐지고 나눠지고 충돌하는 두 개의 세상.
안팎도 좌우도 구분되지 않고 충돌하고 깨지기까지 하는, 병리적 상태까지 이르러 있는 그의 내면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어 보이고 고통에 찬 환부를 담담히 보여준다.
그 속에서 고통을 뚫고 분열된 자신을 통일시키려 몸부림치는 작가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우리가 최승철의 방으로 그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것은 그의 몸부림이 결코 낯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술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언제나 그러하기 때문이다.
홍보미
홍보미 작가의 지우고 그리는 미술본질의 대한 질문은 얼마나 아련한가.
그의 지우고 그리는 행위의 탐구는 또 다른 무한한 반복과 인내를 요구한다.
내면의 탐구와 자신의 예술적 도구에 대한 관심과 관찰,인내와 노력의 작업들이은 마침내 지우고 그리는 것이 어쩌면 하나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으로 향한 것일까.
버려지고, 보이지 않는, 뒷면에 대한, 지워지는 것에 대한, 그의 애정이 마침내 다다를 종착지는 어디일까.
지워도 지워도 결국은 쌓이고 쌓여 모두가 지나 다닐 길이 대로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의 여정, 그가 가는 곳 까지 넓혀질 지평에 희망을 걸어본다.
임도
끝없는 반복의 고행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또 다른 작가가 있다.
임도작가의 “수행성의 시각화”에 대한 탐구는 무량대수의 헤아릴 수 없는 가위질의 반복을 통해 스스로 수행을 하고 있다.
전시회장이 입구에 가지런히 놓인 작품 <Wave> 수행성의 결과 혹은 시각화된 결과물인 작품은 결과물이라 하기엔 가볍다 바람 불면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는 실오라기들이 펼쳐져 있다,
무한의 힘을 지닌 또 다른 수행성의 상징 파도, 하지만 그 파도는 부유하고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을 준비하기 전의 상황이 바로 2층에 전시된 또 다른 그의 작품들이다.
시간의 순리대로 사고하자면 수많은 가위질, 수행성을 통해 잘라진 실오라기들은 1층의 파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도작가는 수행성의 시각화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준비, 혹은 과정이라 생각했던 잘린 실오라기들이 어쩌면 이미 수행성을 거친 결과물일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무량대수의 가위질은 여전히 계속되겠지만 그의 수행성은 이미 하나의 경계를 넘어섰다.
다행히도 우리는 하나의 전시장에서 경계를 넘어가는 과정으로써, 그의 작업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일군의 작가들은 세상과 내면 사이에서 세상을 미시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택했다.
내면으로의 치열한 탐구가 아니라 세상으로 향하는 탐구와 관찰을 택했다. 또 다른 세상에 던져진 나와 같은 파편들을 찾아내고 수집하며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는 왜 파편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깨어진 조각 파편이라 부른다. 이들은 세상에 올 때부터 스스로가 깨진 조각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들의 고찰은 옳다. 이들이 이 땅에 정착할 때 이미 이 세대들은 깨어진 공동체의 잔해가 나뒹굴고 핵가족과 핵개인의 시대 속에 온전하지 못한 기형적 사회를 체험하며 자라났는지 모른다.
그들은 이미 깨어진 채 이 땅에 왔으니 내면의 탐구 역시 기형적인 자세와 집착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파편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가 깨어진 그 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탐구를 시작한다. 또 다른 파편을 만날 때 비로소 파편들을 의미와 형태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술가이다.
최근희
이름 없는 잡초들을 채집하여 이름을 불러주는 최근희 작가
하지만 어쩌면 잡초들은 얼굴을 숨기고 수채구멍이나 어두운 곳에 숨어 생존을 택한 전략가들이다.
이런 잡초들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오히려 마땅치 않을지도 모른다.
몇몇 잡초들은 그저 익명으로 이름 불리며 의미를 부여 받는 것보다 차라리 읍습하지만 질긴 생존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그들을 세상에 데려오되 채집하고 말리고 빛을 쬐어 작품을 만들며 그들의 습성에 따라 오히려 편안한 네거티브의 방식으로 세상에 전시를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역광이 편안하고 말라버린 몰골이 오히려 잡초의 잡초다움 일지도 모른다. 어두운 곳에서 더욱 편안한 잡초의 마음을 따라 작가는 네거티브의 푸른 액자 안으로 그들을 숨어들게 했는지 모르겠다.
세상 모든 잡초들에게 머무는 그의 시선은 따스하다.
김서량
소리를 채집하는 김서량 작가는 채집과 편집을 함께 진행한다.
다양한 환경과 위상과 거리에 따라 잡음이 될 수도 소음이 될 수도 있는 일상의 생명의 소리들을 편집하여 새로운 질서와 생명을 부여한다.
피곤함으로 반쯤은 눈을 감고 지나는 도시철도 3호선. 눈 감은 나를 대신해 지상철에서 이탈해 부감으로 내려 보는 전시장 곳곳에는 다양하게 존재하는 소리의 근원들과 다양한 소리들을 시각화하고 입체화하여
소리들이 존재하는 이곳에 함께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가 스치고 지나가고 버려지는 작은 것들을 수집하고 채집하는 작가들의 따스한 시선들이 도드라 진다.
김재엽
생멸을 이야기하는 김재엽작가, 자연과 인간의 대립과 공존의 과정을 자연의 승리 혹은 치유의 과정으로 보지 않고 그 과정의 다양하게 맺히는 실루엣에 주목한다.
생멸하는 세상은 대립과 투쟁 화합과 치유의 거대한 담론뒤에 태양의 뜨고 짐에 따라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조로 생멸을 비추는 실루엣이 있다.
생멸의 뒤안길을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답다. 마치 석양의 노을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깜깜한 밤이 분명코 올지라도 아침이면 또 다른 빛살이 비출 것을 우리는 안다.
허주혜
허주혜 작가가 그리는 세상은 허공에 떠 있다. 세필로 묘사된 작은 빌딩들은 모여서 도시를 이룬다. 허공에는 커다란 바위도 한 시대를 실용적으로 살았던 물건들도 어딘가에 의미 있게 자리 잡고 있다. 수많은 빌딩들은 산을 이루고 그 앞에 또 다른 의미가 떠 있다,
시간은 순차적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흘러간 시간 속에 의미와 가치들은 도시 속에 다양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또 다른 세월을 살아갈 것이다,
작가는 도시의 기억을 기억 너머의 의미들을 소환해 낸다
정입교
작가의 경쾌하고 깔끔한 작업을 바라보는 기쁨이 있다.
디지털의 세상은 복제와편집의 무한한 확장을 제공한다. 복사하고 자르고 붙이는 자유로워진 과정은
자른 만큼 이어 붙이는 것 역시 자유로워졌다.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잘리거나 붙이는 세상,
편집되는 세상에 공존하는 인간에 대한 해학적인 그의 눈길이 차갑지 않고 따스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유니크한 장면들은 예리하게 잘린 방들이며 가구며 노트북이며 사물들이다. 이들은 예리하게 잘린 것만큼 예리하게 어떤 조각들과도 붙을 수 있다. 이리저리 얼마든지 편집이 가능한 방.
디지털의 세상에 분명 편집은 창조이다.
하지만, 잘려 나간 부분의 고통에 참예하는 것, 잘려 버림받은 것들의 의미를 기억하고자 하는 습성은 언제까지 우리를 환상통에 시달리게 할까.
손민효
그런가 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따스하거나 혹은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작가들이 있다.
작가들이 만나는 세상은 온통 껍데기들이 난무한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 길 위에는 콜로세움이 펼쳐지고 있고 비만 오면 녹아내릴 석고붕대 같은 방패뒤에 숨어 따스하고 친밀한 소통 대신 차가운 불빛으로 원시적인 소통을 하고, 차문뒤에 비겁하게 도사린 사람들, 부서진 자동차들의 파편이 함께 뒹구는 도로,
차종이 인격을 대신 하는 거리 위는 손민호 작가가 랑데부하는 세상이다.
김상덕
작가는 어쩌면 도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도로를 나서서 콜로세움에 전사로 나서는 대신 안전한 캠퍼스 너머에서 통제가 가능한 캠퍼스 안으로 온갖 불온하고 부조리한 상상들을 가두어 버린다. 혹여나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는 온갖 부조리와 불온한 것들이 되돌아 내게 덤빌까 두려워 그는 한껏 유쾌하고 즐겁게 웃으며 작업을 한다. 그 흉한 것들이 정신 차리고 현실로 다시 튀어나오지 않도록 작업 내내 그는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기괴하고 캠퍼스 안에 갇힌 불온하고 불순하고 비도덕적이 한 것들을
캠퍼스 밖에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판도라의 상자 속에 영원히 봉인하고자 하는
그의 계획은 유효할까?
최은희
최은희 작가가 만든 공간은 아늑한 핑크의 세상으로 위장되어 있지만 온통 사회구조적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들의 아우성이 공간을 메우고 있다.
축 늘어진 무기력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멍든 우리의 내면을 보여준다. 아이와 연상되는 중앙의 조형물과
축 늘어져 손 내미는 작품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내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해자와 피해자를 불러 세운다, 흠칫 놀라 뒷걸음치다 보면 멍든 작은 손들을 내밀어 구원을 호소한다.
김경한, 김상덕 허주혜의 라이브 드로잉
세 사람의 작가들이 서로의 작품을 지우고 그리고 쌓아간다. 허주혜가 허공에 새기는 의미와 가치 위에 김상덕 작가는 불온한 것들을 풀어놓는다, 도시와 온갖 불온한 것들이 싸우는 그위로 김경한 작가는 찾아와 온몸으로 묵묵히 부딪힌다. 그 싸움의 흔적 위로 허주혜 작가는 또다시 찾아와 또다시 아마도 무너져 버릴 것이 분명한 의미와 가치를 허공에 세운다. 이들이 만나는 곳은 서로의 여정이 다른 교차로이다,
교차로에서 만나 각자의 방법으로 다시 풀어 봉인하고 부딪히고 세우는 이 끝없는 반복적 투쟁의 끝은 어떻게 될까.
이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에 시간이 개입하고 있다. 작품이 마치는 그때가 되면 아마도 시간의 힘은 이들의 붓자국의 두께와 깊이를 통해 새로운 질서와 관계를 부여하고 낯설어도 한참 낯설었던 세 작가의 언어가 마침내 소통해 낸 흔적을 우리는 기쁨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재익
무연고자들의 죽음에 던지는 김재익작가의 진혼굿은 사실은 자신을 향한, 우리들을 위한 진혼굿이다.
파편화되고 고립되어 이름도 없이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들 어쩌면 파편화된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체온을 전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도 파편인 채로 고립되어 우리도 저들처럼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주검으로 쌓이지 않을까.
무연고자들의 죽음에 이면을 찾아들어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작가의 행위는 남은 자들의 불안과 공포에 대한 위로의 의식이다. 해원하고 상생하는 선순환하는 세상을 위한 작가의 진혼은 처절하다,
유다영
유다영작가는 실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 몽환적이고 흐릿한 화면은 사실은 끝없이 충돌하는 것들로 인한 흔들림이다. 충돌은 미세한 균열을 낳고 미세한 균열 사이로 마침내 틈이 셍기기 시작한다.
생명과 죽음 사이의 틈,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틈을 관찰하며 우리에게 그가 발견한 새롭고 몽환적인 세상을 보여준다. 그가 발견한 미세한 틈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 살아갈 만한 희망이 잡초처럼 자라고 있을까? 아니면 누군가 봉인해 둔 온갖 흉한 것들이 자리 잡고 있을까?
왜 이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파편화되어 있는 것일까, 보호받고 온전하지 못한 채 세상에 던져진 것일까. 불행히도 이들이 만난 세상은 이미 깨어진 공동체이고 N과 P로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는 세상이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깨어진 채 세상에 버려졌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부터 두 개의 전등과 두 개의 창이 부딪히고 공존하는 세상을 견뎌내며 살아야 한다. 어쩌면 끝도 없이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운명을 그들은 지녔다. 하지만 이들은 무량대수의 실오라기를 잘라내는 수행을 기꺼이 견디며 끝없이 깨진 채 세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모두가 자유하기 위해 캠퍼스를 펼쳐 그 안으로 세상 모든 흉한 것들을 가두기도 하고 하얗고 거대한 벽과 같은 캠퍼스를 향해 온몸을 던져 저항하기도 한다. 세상 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생멸의 힘을 찾아 희망을 나누기도 하고 한줄기 빛과 같은 잡초의 생명력을 채집하고 살아 숨 쉬는 세상의 소리들을 채집과 편집해서 말리고 전시한다. 허공의 새겨진 도시의 흔적들을 찾아 복원한다. 그런가 하면 모든 죽어간 파편들을 위무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에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이다.
결국, 파편들은 서로에게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그들을 막아서는 경계의 벽에 함께 모여 N과 P의 수많은 충돌 끝에 마침내 틈을 발견한 한 것 같다.
아직은 몽환적이고 희미하기만 한 그 틈 사이로 그들은 뾰족한 송곳처럼 손을 내밀고 있다, 파편들은 이미 온몸으로 서로를 반사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처음부터 빛나고 있다.
파편들이 파편들을 만나고 있다. 서로를 발견할 때 비로소 의미가 형태가 나타난다,
어쩌면 이들의 연결과 소통은 관람자들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관람자들의 따스한 시선이 젊은 신진작가들의 내면의 고통에 호응하고 대답하는 순간 파편들은 꾸물 꾸물 일어나 거대한 완전체를 우리에게 선사할지도 모르겠다.
파편들이 파편들을 만나 하나의 완전체로 세상과 우리와 현실 속에 소통하는 그날이 올 것이다.
이들이 세상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