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에서 만나는 네 개의 구절

"까닭 없이" "가죽으로 가죽을" " 귀에서 눈으로" "티끌과 재"

by 여운

이 글은 신앙묵상글입니다





욥기를 읽습니다. 기왓장으로 자신의 피부를 긁고 있는 욥을 읽으며, 안타까움을 넘어 그 처절한 고통은 내게 전이됩니다. 우리네 삶에도 예기치 못한 고난은 찾아옵니다. 피해 가려 안간힘을 써도 고난은 정면으로 나를 덮칩니다. 하지만 욥은 그 처절한 고난의 끝에서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라는 것을 욥은 42장에 걸쳐 죽음과도 같은 긴 신음으로 우리에게 나직이 일러줍니다.


욥기를 읽으며 가슴을 두드리는 네 가지의 구절 " 까닭 없이" "가죽으로 가죽을" "귀에서 눈으로" "티끌과 재"를 만났습니다.

네 가지의 구절을 따라가며 까닭 없이 겪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까닭을 발견하고 새롭게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는 욥을 발견합니다.


1. "까닭 없이" — 거래를 멈춘 자리에서 시작되는 순수함

욥기 1:9, 2:3

사탄은 묻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이 문장은 비수처럼 날카롭게 날아와 우리 신앙의 밑바닥을 가차 없이 헤집어 놓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브 앤 테이크’의 서늘한 거래로 전락시키곤 합니다. 내가 이만큼 예배드리고 선하게 살았으니, 그에 합당한 복을 내놓으라는 ‘까닭 있는 신앙’입니다.


하지만고난 중에 욥은 그 모든 ‘까닭’들을 지워버립니다. 자녀와 재산, 건강마저 까닭 없이 빼앗긴 폐허 위에서 욥은 질문합니다. 아무런 보상이 없을 때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부를 수 있는가.


‘까닭 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까닭 없이’ 찾아오는 고난 앞에서도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신앙은 거래가 아니라, 모든 이유가 거세된 자리에서도 여전히 그분을 기다리는 영혼의 떨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2. "가죽으로 가죽을" — 찢기는 통증 속에서 태동하는 역설의 까닭

욥기 2:4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탄은 인간의 경외함이 고작 ‘자기 생존’이라는 가죽 한 장을 지키기 위한 비열한 거래일뿐이라고 냉소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살갗이 찢기고 모든 방어막이 흩어지는 순간, 이 차가운 거래의 논리는 무너져 내립니다.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는 폐허 위에서 욥은 자신의 고통을 화폐 삼아 하나님과 협상하지 않습니다. 그저 온몸으로 통증을 견뎌냄으로써 사탄의 계산을 멈춰 세울 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외적인 보상이 사라진 그 찢긴 살갗 사이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단 하나의 까닭’이 스며듭니다. 죽음 보다 더 한 고통 가운데 ‘까닭 없음’은 이제 고통의 현장을 함께 겪어내시는 신의 현존이라는 ‘거룩한 까닭’으로 치환됩니다. 뼈가 깎이는 아픔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욥의 비명은 세련된 교리보다 진실하며, 사탄이 장담했던 거래의 인과를 비참하게 무너뜨립니다.


고통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우리 삶의 유일한 까닭이십니다.


3. "귀에서 눈으로" — 가죽의 파괴와 동시에 도래하는 당신의 현존

욥기 42:5

이 ‘가죽’의 파괴는 필연적으로 ‘눈’의 도약을 불러옵니다. 관념이라는 단단한 성벽 뒤에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은, 나의 마지막 보루인 살갗이 벗겨질 때 비로소 ‘눈’으로 뵙는 실재가 됩니다. 나의 가죽이 찢겨나가는 처절한 역설의 순간, 하나님은 설명(Explain)이 아닌 현존(Presence)으로 다가오십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는 통증의 강을 건너는 일과 ‘귀에서 눈으로’ 주를 뵙는 일은 분리될 수 없는 동시적 사건입니다. 욥에게 고난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그 가혹한 통증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하는 통로였습니다. 나를 보호하던 껍질이 사라진 그 벌거벗은 자리에서, 비로소 ‘귀’의 지식은 ‘눈’의 만남으로 변모합니다.


4. "티끌과 재" — 질문을 거두어들이고 도달하는 존재의 제자리

욥기 42:6

마침내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뵌 욥이 다시 회개하는 것은 도덕적 잘못을 뉘우치는 반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던졌던 자신의 모든 소송과 항변을 스스로 ‘거두어들이는(Retract)’ 행위입니다. 그 압도적인 신비 앞에서 ‘이유를 묻던 나의 말들’이 얼마나 협소했는지를 깨달은 지혜자의 거룩한 침묵입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을 때는 모든 고난이 억울함이었지만, 내가 한낱 티끌임을 깨닫는 순간 고난은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안으로 편입됩니다. 티끌이기에 사라져도 마땅하나, 그 티끌을 기억하시고 대면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자의 안식입니다. 욥기는 갑절의 축복으로 끝나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티끌 같은 인간이 창조주와 눈을 맞추며 걷게 된 ‘새로운 관계의 시작’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아무런 ‘까닭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가죽(생명)을 내어주는 고통 속에 우리의 생명을 바꾸셨습니다. 사탄이 말한 비열한 거래를 위대한 대속의 사랑으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 은혜를 ‘귀’로만 들어왔으나, 인생의 거친 파도 속에 나의 가죽이 찢기는 통증을 지날 때에야 비로소 그 대속의 사랑을 ‘눈’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내 삶속에도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옹이들이 박혀 있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옹이가 생기기 위해 상처가 나고 진물이 흐르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 찾아들곤 합니다.


그러나 그 옹이는 가죽이 찢긴 자리에 돋아난 은혜의 흔적임을 압니다. 찢기고 상처을 딛고 아문 옹이, 우리네 몸에 켜켜히 쌓여 빛나는 흉터를 만지며, 하나님의 까닭 없는 사랑을 다시한번 생각합니다, 오늘도 ‘귀’를 닫고 ‘눈’을 들어 당신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여전히 티끌이지만, 하나님을 마주 보는 존엄한 티끌로 오늘을 살아내겠습니다.

욥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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