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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Apr 30. 2017

공간, 나를 말하다.

1.

사무실이란 공간은 나의 내적 풍요로움을 펼치거나 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편이다. 어젯밤 집이 내게 가져다준 고요한 안정과 평온함이 여기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선명성을 강조한 하얀색 벽을 따라 들어선 복도와 그 오른편에 열과 오를 맞춘 회색 칸막이는 이곳이 직선 같은 질서와 예측 가능한 통제가 지배하는 곳임을 말해준다. 정교하게 구획이 정리된 사무실이 사람들에게 허락한 개인 공간은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다. 원활한 의사소통과 긴밀한 협력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사무실은 나의 등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게 했다. 내 뒤를 지나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으면 그저 내 자리로 고개를 돌리면 된다. 누구나 항상 긴장을 유지한 채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는 것은 어렵고 불편한 일이다. 더구나 나 같은 사람은 특히 더 그렇다. 결국, 나는 비좁은 공간에서 초과업무를 정해진 시간에 처리하고 나면 소진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 여닫이문을 잠그고 양변기에 앉아 있으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좁은 물리적 공간이 꽤 정서적으로 넓다는 것을 발견한다.


화장실에서 쉬는 것은 내향적인 사람이라면 알 만한 놀라울 정도로 흔한 일이다. - 콰이어트 中 / 수전 케인 지음 -

사무실이란 공간이 우리에게 우리의 잠재적인 능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그만두어야 한다. 반대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잠재적인 능력을 찾아보려 한다면 당당히 사무실 밖으로 나서야 한다. 사무 공간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것은 생각의 유연성이나 관점의 다양성이 아니라 생각의 경직성과 관점의 획일성이다. 가끔 회사는 천장이 낮은 회의실로 사람들과 나를 몰아넣고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보라고 다그친다. 모든 것이 네모꼴인 회의실에서 그나마 나의 상상력을 자극해주는 것은 벽에 걸린 둥근 벽시계뿐이다. 진정 회사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약간의 현금을 손에 쥐여주고 사무실 밖에 그들이 원하는 공간으로 내보내면 된다. 그들은 사무실보다 충분히 머리를 자극하는 분위기에서 적어도 질적으로 풍부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것이다. 사람마다 원하는 공간은 다르겠지만 가져오는 효과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 공간의 예를 든다면, 엄숙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도서관이나, 따뜻한 조명과 안락한 의자가 있는 조용한 찻집이나, 한낮의 바람이 시원스럽게 불어오는 공원이나, 북적이는 사람들과 맛있는 빵과 케이크가 있는 디저트 가게나, 건물 전체가 숭고함으로 서려 있는 성당(또는 사찰)이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 간접 교류를 할 수 있는 커피전문점 등이 있다. 이런 공간들은 사람들에게 숨겨진 능력을 찾는 것을 도와주는 것 이외에도 일상에 직면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도움을 준다. 물론 나에게 화장실은 그런 공간들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이런 공간들을 찾아 나서기를 마다치 않을 때, 특히 이런 공간을 찾을 수만 있다면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의 인생에 감당하기 힘든 심각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닥치거나 겹겹이 쌓여 그 높이가 머리 위를 넘길 때이다. 그런 공간을 원하는 이유가 단순히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숨을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공간은 내가 누구인지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어떤 감정과 특질에 반응하는지. 내가 추구하는 삶은 무엇인지. 내가 무슨 문제를 늘 안고 있었는지. 그런데도 내가 얼마나 긍정하고 온당하지 말이다.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2.
가끔 책을 읽고 싶거나 글을 쓰고 싶을 때 또는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나 중요한 사람과 깊은 대화를 오래 이어가고 싶을 때 찾는 커피숍

이 커피숍 테이블은 좁고 기둥이 없다. 마치 안쪽 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약간 불안해 보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화분과 로스팅 관련 책 한 권 그리고 내벽에 나사로 단단히 조여진 함석판이 그 불안을 희석하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게다가 짙은 회색 시멘트 외벽의 단조로움이 이 불안에 가세한다. 그러나 붉노란 조명이 안쪽 벽을 뚫고 은은히 나무 테이블 아래로 내려앉는다. 테이블에 온기가 느껴진다. 이 테이블의 심리적 인상이 나의 관심과 애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나는 불안해 보이는 테이블을 보면서 나의 숨겨진 이야기와 감정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거다. 그래서 내가 이 공간에 들어서면 이미 본 것 같은 익숙함에 빠져 그 외적인 불안을 감지하고 위로한다.

 

이 커피숍의 테이블 자리는 나의 성소이자 기념지가 되며, 집이 된다. 푹신한 등받이와 방석이 없는 의자에 앉더라도 말이다.

정확히 호를 그리는 원목 테이블과 딱딱한 등받이 원목 의자는 안락함과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권위적이거나 과시적이지 않다. 오히려 모서리 없는 테이블 곡선의 유연성과 과도한 멋이 없는 등받이가 나의 불안한 심상을 날려준다. 게다가 좁은 간격을 유지한 채 바짝 붙어 있는 원목 마감의 외벽이 안정감을 더해준다. 덕분에 나의 뒤와 옆을 신경 써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없다. 온전히 책을 집중해서 읽을 수 있다. 이따금 인기척에 고개를 들지만, 시선은 정면만 바라보게 된다. 내가 이런 공간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 안에 이렇게 완벽한 심리적 특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사람은 불안을 떨쳐 낼 수 없다. 만약 불안을 떨쳐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면 이미 사람이 아니라 신이었을 게다. 그 벗어낼 수 없는 특질을 조장하는 시대와 사회를 살아낸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기에 내가 잠시라도 이 공간에 머물려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이 완벽한 공간에도 약간의 심리적 긴장감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건강한 긴장감이다. 같은 공간에 모여드는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동질감이 그들과의 물리적 거리를 상쇄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 소품은 필요 없다. 이 테이블의 유일한 소품은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의 샛노란 조명뿐이다.


이 커피숍이 나의 과거 행복했던 사건의 기억과 감정을 일부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커피숍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와 동질감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나의 착각이다. 절대 모든 사람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 그러니까 외향적이면서 민감하지 않거나 덜 민감한 사람들은 공간이 표면적으로 제공하는 외양과 분위기를 감지하여 자유롭게 이용할 뿐이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부류의 내향적이거나 민감한 사람들은 공간이 내포하는 상징이나 의미를 포착하여 그들의 심리적 내면과 교류한다. 이들에게는 공간 외형에 상관없이 과거의 경험, 기억 또는 감정에 기초한다. 즉, 전자의 사람들은 커피숍을 사람들과 사회적인 교류를 직간접적으로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써 여길 뿐이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커피숍의 조명, 인테리어, 가구, 소품, 배치 등이 과거 행복했거나 불행했던 시절의 한 부분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그 공간을 사랑하거나 증오한다. 따라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내적 기준과 자의적 연상 때문이다. 나도 가끔 이렇게 민감한 사람이 된 것이 피곤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3.


이곳은 대문이 없다. 대신 풀방울을 머금은 돌길이 게스트하우스 안쪽으로 손님을 안내한다. 소박하게 휘어진 돌길 주변을 둘러보니 아담한 크기의 귤나무와 다리 없는 낮은 평상이 있다. 현무암에 시멘트를 발라 세운 건물 외벽을 타고 자라는 풀도 인상적이다. 투박하고 거친 이미지를 친근하게 바꿔줬다.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 전체를 베이지색으로 덮고 흰색으로 건물 라인을 돋보인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그리고 한편에 자리 잡은 작은 텃밭도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사람 키보다 작은 높이의 현무암 담벼락이 이 게스트하우스를 건물 외곽을 따라 빙 둘러있다. 만약, 평대리 대수상동 마을에 3층 구조의 스틸하우스나 노출콘크리트형 하우스를 올렸다면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게스트하우스의 호스트는 농가를 구입해 리모델링을 하면서도 농가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자리매김과 특질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농가의 소박함 이면에 숨겨진 투박함을 거둬내고 단순함과 세련됨을 적절히 조화시켰다. 나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에 쉽게 마음을 뺏기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소박하면서 세련되고 이지적인 것을 좋아한다. 수도꼭지를 고르더라도 단순함이 좋다. 꽃무늬 사기 손잡이가 있는 수도꼭지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순함에 빠져 직선과 네모만 강조한 나머지 고지식해 보이는 것도 싫다. 맞다. 나는 내게 과분한 화려함과 개방성에 열광하지 않는다. 그보다 여행의 열기를 약간 식힐 수 있도록 나를 한 발짝 물러나 관조하게 만드는 공간이 좋다.


무더운 여름날, 목조건물에 들어서면 서늘한 공기와 함께 마른나무의 미묘한 냄새가 나를 취하게 한다. 집 안에 그치지 않는 나무 향기를 맡고 있노라면 마치 작은 숲속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목조건물은 누구나 차분하게 만든다. 그런 건물이 평대리 대수상동에 있다. 그곳에 처음 갔을 때는 강렬한 여름 햇빛이 스멀스멀 퍼져가는 밤공기에 물러나고 있을 때였다. 목조건물 외벽에 달린 등과 건물 창 안쪽에서 번져가는 불빛을 바라봤을 때 에드워드 호퍼의 '주유소(Gas)' 그림이 연상되었다. 알랭 드 보통이 '주유소'를 고립에 관한 그림이라고 말한 것에 동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도시의 날빛 속에 있을 때보다 더 쉽게 친족 같은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내용을 통해 이 게스트하우스에 친밀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창문 위아래 선반에 알맞게 놓인 장식품과 관상용 식물, 낮과 밤에 따라 적절하게 쓰이는 조명, 풍경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선으로 잡아주는 창이 있는 건물이 만약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만 강조했다면 나는 어땠을까? 아마 나는 그곳에 스며들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있어 매력적인 공간이란 특별히 무언가를 강조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조화롭고 안정된 곳이다. 그 공간이 아마도 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은 나의 약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유별난 기질이나 성격을 약점으로 간주하고 자책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이에게 나의 약점을 드러내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꾸밈이 없고 가장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적어도 나 스스로에게는. 그렇기에 이런 공간은 더욱더 내게 각별하다. 선반, 장식품, 화분, 디자인된 물건, 조명, 창, 양초, 쿠션, 방석, 커튼, 액자, 엽서, 방명록 등. 단독으로 놓였을 때 드러나는 약점이 같이 모여서 조화롭게 배치되었을 때 감출 수 없는 매력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내가 선호하는 특질을 소유하고 있는 공간에 머무르면 안정감과 용기를 얻게 된다. 그동안 매너리즘과 실의에 빠져 녹초가 된 내게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과 같다. 도시의 강렬한 외부 자극에 극도로 노출되어 에너지가 방전된 나는 이 곳에서 다시 충전되어 이 공간과 함께 있는 낯선 사람들과 주저 없이 이야기하게 된다. 내적인 삶의 충만히 외적인 관계의 확장에 추진체가 되어 달까지 날아가는 것 같다. 이는 자신을 속이는 가장된 모습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균형에 놓이고 싶은 바람직한 나의 모습이다. 물론, 나의 영역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반감이 쌓여 거리를 멀리 두는 것도 경계하지만 반대로 지나친 친근감이 부르는 과한 참견에 거부감이 일기 때문이다.



4.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집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의미의 집도 필요하다. 우리의 약한 면을 보상하기 위해서다. 우리에게는 마음을 받쳐줄 피난처가 필요하다. -행복의 건축/알랭 드 보통-

나를 긍정하는 공간에 머물러 있다 보면 나도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은 갈망에 느닷없이 휩싸인다. 제주도에 게스트하우스를 지어보거나 동네 작은 커피숍을 차리는 상상을 한다. 물리적 시간과 기술의 복잡성이 시연되는 건축의 과정이 머릿속에서 속전속결로 이뤄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의 공간을 만들어 게스트와 나누는 모습을 상상한다. 나는 공간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그들에게 굳이 말하지 않고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꿈꾸는 이유는 지금 사는 곳이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파트에 산다. 그러나 아파트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파트에 사는 것이 만족스럽다. 십수 년 전 나는 서울의 어느 반 지하방에서 살았었다. 여름에는 곰팡이와 씨름했었고, 겨울에는 얼음장 위에서 신음했었다. 내가 살았던 지역은 다세대 주택, 연립주택, 빌라가 따닥따닥 난립한 주거지역이었다. 창문은 마음껏 열 수 없었고, 햇빛이 없어 빨래하면 시큼한 냄새가 났으며, 얇은 벽 너머로 옆집의 사생활을 알았다. 반면 행정구역을 나누는 6차선 도로 너머로는 아파트 대단지가 있었으며 또 그 너머로는 계속 짓고 있었다. 출근 버스를 타고 그 아파트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곳에서 살겠노라 다짐했었다. 아파트에 살면 그 공간에서 내가 용기를 받고 존중받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 살아보니 그렇지 못했다. 아파트는 나의 약한 면을 보상해주거나, 마음에 피난처가 되거나, 나의 바람직한 모습을 바라보게 해 주고,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을 바라보게 해주고, 중요하면서도 쉬이 사라지는 측면들이 살아 있도록 유지해줄 방이 필요하다. -행복의 건축/알랭 드 보통-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에서 아파트는 부의 탁월한 증대가 가능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때로는 그 수단이 부의 상징으로 사람들이 바라봤다. 2008년 이후 아파트 매매 가격은 계속 오르기 시작했다. 미국의 양적완화로 인하여 풀린 달러가 국내로 유입되면서 부동산으로 자금이 흘러들었다. 게다가 정부는 과거 수년간 건설경기 부양을 위한 수단으로 저금리를 일으켜 사람들에게 빚을 내라고 부추겼다.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부채를 일으켜 아파트로 향했다. 전국 아파트 평균 매매 가격은 매년 상승했다. 서울과 지방, 도심과 부도심, 시내와 시외에 따라서 아파트 가격은 차이가 점점 벌어졌다. 특히 교통 수준, 교육 수준, 주변 환경, 편의시설, 기타 인프라 등의 조건에 근접할수록 매매 가격이 크게 달랐다. 그렇게 오른 매매 가격만큼 전세 가격도 올랐다. 나도 전세도 대출이 없으면 재계약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에 사는 것이 점점 힘이 들었다. 결국, 아파트에게 어떤 심리적 가치를 기대하기보다는 금전적 가치를 기대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서 나의 공간을 짓고 싶다는 그 달콤한 욕망의 첫 스푼을 입어 가져가 보기도 전에 현실은 늘 반대편에서 손가락을 젓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미 제주의 게스트하우스와 대체재는 치킨게임에 빠질 위험이 크고, 동네 커피숍은 교회 수 보다 많다. 현실이란 가늠자를 만지작 거린 손이 가슴을 쓰러내리고 마는 것이다.



5.


그런데도 나는 용기를 냈다. 아파트가 내게 무딘 건물이라고 외면하지 말고, 내가 그 안에 직접적인 변화를 주기로 했다. 나의 외적인 모습보다 나의 내적인 가치에 관심과 애정을 주는 나이기에, 집의 외형보다는 집 안이 갖는 분위기와 의미를 작은 공간을 통해 마련했다.  카펫이 아닌 러그를 깔았고, 원목이 아닌 합성목재 책장을 두고 그 위에 천장의 조명이 아닌 스탠드를 놓았다. 빈 공간에 책을 하나둘씩 마음 내키는 대로 꼽거나 쌓았다.  현재로서는 좁고 미숙해 보일지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재료 조합이 남이 보이기에는 조잡스러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만족한다. 남에게 어떻게 보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내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싶다.


-fin-


※ Cover Painting : At The Summer House In Twilight, 1895 /  Iassc Levitan (←그림과 작가의 이야기가 알고 싶다면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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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Painting : Wikia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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