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동네 목욕탕에서의 일이다. 연세가 구십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 탕에 앉아 있다가 탕 밖으로 나가려 한다. 손을 짚고 일어서서, 탕 가에 어렵게 걸터앉는다. 오른발을 겨우 탕 밖으로 내놓고, 다음에는 왼발이 나가야 하는데 어렵다. 탕 밖의 오른발에 힘을 주고, 두 손으로 왼발을 들어 간신히 두 발이 밖으로 나왔다. 가장자리를 붙잡고 조심조심 극히 불안하게 한 계단을 내려서 바닥에 섰다.
선채로 한숨을 돌리고 나서, 바로 앞 샤워기가 있는 곳으로 가셨다. 보통 어른이라면 서너 걸음 거리를 예닐곱 걸음으로 어렵사리 가신다. 여위었을 뿐만 아니라, 얼굴과 몸에는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세월의 흔적을 새겨 놓았다. 근육이 줄어 축 늘어진 살 가죽이 조금만 움직여도 어김없이 흔들린다. 엉덩이에도 근육 같은 건 아예 없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저승사자가 문안을 할 것 같다.
탕 안에 앉아 안쓰러운 마음으로 노인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도움이 되어 드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실례가 될 것 같아 주의 깊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노인은 샤워기를 만진다. 물이 안 나온다. 바로 다가가서 “이걸 누르면 물이 나오고, 이걸로 물 온도를 맞춥니다. 물 온도는 괜찮으세요?” 하고 안내를 해 드리니 내 눈을 보며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신다.
목소리가 기운차지는 않아도 맑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도 또렷했다. 나는 다시 탕 속으로 돌아왔다. 바라보고 앉으면 무안해하실까 염려되어 일부러 등을 돌리고 앉았다. 그래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 힐끗 보니 물도 잘 나오고 샤워도 잘하고 계셨다. 이번에는 바로 내 뒤, 탕의 아래 단에 앉아 비누를 칠하고 때를 민다. "등을 밀어 드릴까요?" 하고 싶었지만 그냥 모른 척했다.
나를 바라보시던 그 노인의 맑은 눈동자와, 검버섯이 더 많은 여윈 몸이 가슴이 아리도록 쓸쓸한 바람 되어 감은 눈에 비친다. 인도 바라나시의 힌두교 제단 앞에서 만난, 죽음을 기다리는 수척해진 노인의 맑은 눈동자도 함께 비쳤다. 두 노인의 모습이 두 눈에 번갈아 비쳤다.
인도 바라나시의 힌두교 제단 앞의 기억이다. 같은 객석에 함께 앉아 있지만, 우리는 관광을 위한 체험을 하고, 현지인들은 죽음을 위한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시작하려면 20분쯤 남았는데 아내는 눈을 감고 숙연했다. 그때 노인 한 분이 아내 바로 옆에 앉았다. 노인은 이방인이 낯설었는지 아내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었기에 카메라 렌즈를 통하여 그 노인을 찬찬히 관찰할 수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 같아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반팔 차림인데, 담요를 머리까지 두르고 있었다. 만지면 풀썩 먼지가 되어버릴 것 같은 바싹 마른 몸이 아무것도 입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남성의 그 부분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태연하였다. 말을 걸어볼 수는 없었지만, 그 눈빛만은 지금도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다. 여위어 눈이 깊었고, 그래서 더욱 심오했다.
갠지스강 제방에는 ‘가트’라고 불리는 여러 개의 제단이 있으며 사람들이 많이 모여 매일 저녁 제사를 지낸다. 인도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11억 6천만 명의 신자가 믿고 있는 세계 3대 종교인 힌두교의 의식이다. 관광코스에도 들어있는 유명한 제사체험이다. 시신을 화장하는 것과는 별개의 행사이다. 밤이 되면 각 ‘가트’ 마다 따로 제사를 지낸다.
모인 사람들의 차림새도 각양각색이다. 황금으로 장식된 목걸이, 귀고리, 팔찌, 발찌를 한 뚱뚱한 여인도 있고, 팬티를 입었는지도 알 수 없게 담요 한 장만 두른 노인이며, 제사용 복장인 듯한 흰색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 등 천차만별이다. 터번을 쓴 전통의상의 풍채 좋은 어르신이 서양식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신사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앉아 있다. 신분제도가 명확한 인도이지만 제사를 참관하는 자리는 차별이 없는 것 같다. 모두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의 갠지스강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말라서 뼈만 앙상한 소와 개가 사람들과 섞여 어슬렁거린다. 쓰레기는 듬성듬성 모아 놓기도 했지만, 바람에 날리고 짐승들이 먹을 것을 찾느라 뒤집어 놓아, 온 천지가 아수라장이다. 장작이 타는 불기둥 위에서 시체가 검게 타고 있다. 시체를 태우면서 장작이 내는 소리인지, 장작불에 타는 시체가 내는 소리인지 무언가 피식피식 터지는 소리가 기분 나쁘다. 지난(至難)하여 숭고했던 하나의 삶이 뱀의 붉은 혓바닥 같은 불꽃을 타고 허공으로 스러져 간다.
인도에서는 죽어서 갠지스강에 뼈를 뿌리는 것이 가장 큰 구원이라고 한다. 노인들은 화장을 위한 장작 값을 준비하여 바라나시 강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숙원이며, 그렇게 죽기가 소원이라고 한다. 편안하게 죽기 위하여 굶는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니 그 몰골이 말이 아니다. 신령이 가득한 갠지스강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죽음을 영접하고 나면, 장의사는 몸에 지닌 장작 값을 회수하고, 화장하여 갠지스강에 뿌려준다.
힘들었던 삶의 여정을 어렵게 통과한 죽음이지만, 죽은 후에는 청소차에 실려가는 쓰레기봉투처럼 시스템에 의하여 처리되는 명료함이 죽음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었다. 내가 너무 둔감한 것일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 화장터에서도 아이들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이런 와중에도 여자들은 옷을 입은 채로, 남자들은 상반신을 벗은 채로 신성하다는 그들 만의 갠지스강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한다. 갠지스강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신령이 충만한지 밝게 웃으며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목욕탕 노인이 기억 속 바라나시의 노인을 호출해 내어, 생로병사를 성찰해 보는 시간을 주셨다. 사람이 늙으면 저렇게 몸도 쇠약해지고, 정신도 혼미해지는 것. 늙지 않는 청춘이 없고, 지지 않는 노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노인은 지혜를 얻고 기력을 잃은 길고 험난했던 항해의 종착점이자 시작점이었던 항구로 들어가 닻을 내릴 것이다.
죽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나’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