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설가의 영화'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좋다고 느끼는 것에서 이유를 찾지 않는 사람. 귀한 것에 감탄을 아끼지 않는 사람. 아는 것도 ‘안다’고 성급히 단정하지 않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홍상수 감독의 모습이다. 그리고 나는 그와 꼭 닮은 그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감독 홍상수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오랜 시간 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물론 한 편 한 편이 개별성을 가지지만) 그의 영화는 홍상수라는 공통점으로 묶이는 한 편의 대서사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파고드는 행위.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한 세심한 묘사. 홍 감독에게 영화는 그가 평생을 두고 행하고 있는 일종의 수련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팬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것이 있다. 그의 첫 장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가장 최근작인 ‘소설가의 영화’까지를 쭉 나열한다면 그 사이 어딘가에 구분선 하나를 그어 볼 수 있다는 점. 그의 영화는 ‘어느 시점’을 계기로 분명히 달라졌다. 개인적인 변화일 수도, 타인에 의한 변화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찾아온 변화 덕분에 그를 존중하던 마음이 애정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큰 틀에서 감독의 이전 영화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면, 최근 몇 년 동안의 작품은 ‘확장’으로 요약된다. 그의 시선은 확실히 삶 자체로, 자신 바깥의 세상으로 넓어졌다. 홍상수 영화에서 까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게 되거나,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는 사람의 고충을 듣게 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한 번 더 새로워진 그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소설가 ‘준희’(이혜영 분)가 후배를 만나러 경기도 외곽의 한 책방을 찾는다. 후배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염증을 느끼고 그들을 피하려는 듯 한적한 외곽으로 거처를 옮겨 왔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준희는 못내 서운하다. 준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소설을 쓰지 못한 참이다. 어쩌면 준희는 후배와 잘 지내던 예전처럼 다시 소설을 쓰고 싶어서 그를 찾아간 것인지도. 그런데 후배는 어쩐지 준희의 등장이 달갑지만은 않은 것 같다.
후배를 뒤로하고 준희는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로 향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박 감독 부부를 만나고, 그들과 함께 공원을 걷기로 한다. 그때 산책 중이던 ‘길수’(김민희 분)가 나타난다. 한때 배우로 활동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는 길수에게 준희는 갑작스러운 제안을 한다. 이전부터 자신이 단편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그 영화에 길수와 길수의 남편이 출연해주면 좋겠다는 것.
영화는 그때부터 준희가 평소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우연한 만남이 있는 평범한 하루를 빌려, 홍 감독은 자신의 연출론을 작심한 듯 쏟아내 보인다. 준희는 돈을 벌기 위한 영화에 출연하는 것에도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는데, 물론 이것은 감독 홍상수의 말이다.
준희(어쩌면 홍상수 감독)는 영화를 찍기 전에 그 배우를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한다.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배우를 가장 편안한 상태에 두고, 그런 상황에서 배우에게서 나올 수 있는 ‘어떤 것’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가 영화에서 만나는 사람을 ‘상대 배우’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진짜 생겨날 것 같은 눈빛과 제스처를 카메라로 기록하고 싶다는 뜻도 밝힌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진실한 어떤 것을 담아내는 것이라 해서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것. 그는 자신의 영화엔 반드시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익히 알려진 대로 홍상수의 영화는 의도한 것과 의도하지 않은 것이 만나 완성된다. 홍 감독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나는 자극에 온전히 자신의 영화를 내어준다. 가령 촬영 도중 갑자기 비가 온다고 해보자. 여타의 영화라면 앞 장면과의 연속성을 이유로 촬영을 중단할 것이다. 그리고 비가 오지 않는 날 촬영을 재개할 것이다.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는 스태프들이 창밖의 비를 숨겨보려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홍상수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그는 촬영을 접기보다 대사를 바꾸는 쪽을 택한다. 갑자기 비가 온다며, 변덕스러운 날씨를 고스란히 영화에 기록해 버린다.
배우가 음식을 먹다가 옷에 음식물을 흘린다면 보통의 촬영장에선 의상을 갈아입거나(같은 옷을 두어 벌쯤 준비해 촬영에 들어갈 테니) 세탁이 완성될 동안 촬영을 쉬어가겠지만, 홍 감독은 옷에 무언가가 묻는 상황과 묻은 옷까지 고스란히 영화에 담아내 버린다. 나는 여기에서 홍상수의 특별함을 본다. 그건 단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스스로 호흡하게 만드는 것이다. 촬영 도중 마신 술로 배우가 취한다면?(실제로 이번 영화에서 김민희가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홍 감독은 취한 모습마저 그대로 받아낸다. 그러곤 영화 안에서 가만히 그를 지켜본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느냐고? 계산한 대로 굴러가지 않는 촬영장에서 이 모든 상황을 그저 흐르게 두고, 그 흐름을 받아 안을 수 있는 감독은 극히 드물다. 두말 할 것 없이 여기에 홍상수의 탁월함이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늘 그의 영화를 보고 감상을 적는 일을 의식적으로 피해왔다. 상기한 방식으로 포착된 영화를 머리로 분석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그저 ‘본다’. 생각하기보다 받아들인다.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냥 느낀다. 영화에 기대고, 그 안에서 호흡하고, 거기서 쉰다. 이런 방식이 그의 영화를 즐기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영화가 종반부로 치닫고, 준희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던 길수가 잠이 든다. 그리고 바로 준희가 만든 영화의 시사회 날로 장면은 전환된다. 시사회 시퀀스는 눈에 띄는 단절의 연속이다. 길수가 단편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겠다던 준희는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여기서부터는 어쩌면 길수의 꿈일까?’ 하고 생각했다.
극장 안의 불이 꺼지자, 길수인지 김민희인지 모를 여인이 자신을 신부라 칭하며 꽃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걸어온다. 그러더니 내내 흑백이던 영화가 색을 입는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이 장면이 길수의 꿈이어도, 준희의 영화여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싱그러운 영상에 매료되고 만 그 순간, 나는 관객이라기보다 차라리 하객에 가까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