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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Jun 16. 2022

용서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영화 '매스'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회 살림을 도맡아 하는 집사 주디는 오늘따라 분주하다. 조금 뒤 교회 모임방으로 손님들이 방문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주디는 방에 들어가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큰 원형 테이블을 펼치고, 테이블 주변으로 의자를 4개 가져다 놓는다. 모임을 주도하는 상담사 켄드라가 들어와 방 안을 체크한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티슈와 창문에 붙어있는 붉은 스테인드글라스까지도 경계한다. 주디가 배치해 둔 의자 위치도 보자마자 바꿔버린다.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던 의자를 둘씩 붙이고, 두 의자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모임방에 ‘제이’(제이슨 아이삭스 분)와 ‘게일’(마샤 플림튼 분) 부부가 도착하고 얼마 뒤, ‘리처드’(리드 버니 분)와 ‘린다’(앤 도드 분)가 들어선다. 두 부부는 서로 구면이었지만 어쩐지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냉랭한 모습이다. 조심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대화를 시작하는 네 사람.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교내 총기난사 사건의 유족들이다. 제이와 게일은 피해자 에번의 부모이고, 리처드와 린다는 가해자 헤이든의 부모라는 차이가 있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6년이 지났지만, 그때 입은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은 내내 고통 속에 살았고 드디어 용기를 내 서로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대화는 눈물로 얼룩지고, 고성이 오고 가지만, 이내 잠잠해진다.


 이 영화는 배우 출신 프란 크랜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처음 만든 영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곳곳에서 감독의 뚝심이 엿보이는데,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를 제외하면 영화의 모든 장면이 주인공 네 사람의 대화로만 구성돼 있다는 점부터가 그렇다.


 눈에 띄는 것은 영화의 쇼트 구성 방식이다. 감독은 제이와 게일 두 사람을 담은 장면을 여러 차례 리처드와 린다의 모습으로 (쇼트-리버스 쇼트) 맞받는다. 대화 장면이 주를 이룬다는 일차적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그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 인물들의 상황을 카메라 앵글로도 보여주려는 것으로 느껴졌다.


 소품을 활용하는 방식도 영리한데, 서두에서 말한 의자는 그 대표적 예다. 대화를 나누던 중 감정의 동요가 일자 제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 순간 의자의 처음 배치가 흐트러진다. 2 대 2 구도로 놓여 있던 인물들의 위치가 허물어지자 방에 남은 건 피해자와 가해자의 부모가 아닌 그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다. 그렇게 한 사람씩 자리를 이탈한다. 대화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리처드는 제이의 자리에, 린다는 게일의 자리에 앉아 있다. 상대방의 자리에서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가 인물들이 지나온 시간의 흐름을 모조리 추적하거나 있었던 장소를 빠짐없이 찍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을 디테일하게 팔로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방식으로 담아내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인물들의 공간과 시간을 메우는 게 영상 예술이 지향해야 할 지점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계산된 카메라 워크가 도드라지고, 오프닝 시퀀스가 다소 불필요하게 길다는 점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감독의 고집스러운 연출 방식은 모범 사례가 될 만하다.


 그러나 ‘매스’를 이야기하면서 창작자의 윤리의식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순 없을 것 같다. 주인공 네 사람의 대화가 중심이다 보니, 관객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만 지나온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상황과, 사건 이후 유족들이 어떤 고통 속에 머물러 있는지, 피해자 에번이 사고를 당하기 전에 어떤 아이였는지, 가해자 헤이든이 청소년기에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를 관객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따라가야 한다. (에번과 헤이든의 부모가 각각 자식의 사진을 준비해 와 서로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영화는 그들의 얼굴을 카메라로 잡지 않는다. 피해자를 ‘특정한 인물’로 축소시키지 않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관객의 상상에 기대는 묘사 방식은 영화 속 인물을 캐릭터를 넘어 실제 사건의 당사자로 보게 하기 때문에 감독의 더욱 세심한 연출이 필요하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총기난사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이 실재하기 때문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스’는 특정한 결론을 선택함으로써 실재하는 피해자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 중반, 제이와 게일은 리처드와 린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몰아세운다. 헤이든이 문제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걸 알면서도 방치한 건 부모라며 따져 묻는다. 그때부터 영화는 리처드와 린다의 사정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노라고, 우리는 자식을 책임지기 원했지만 실패한 부모라고 울며 인정한다. 문제는 이때 영화가 취하는 태도다. 영화는 제이와 게일로 하여금 리처드와 린다를 용서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만든다. 그들을 용서하는 것만이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게 한다. 그렇게 끝끝내 제이와 게일은 리처드와 린다를, 나아가 가해자 헤이든을 용서한다. 그리고 용서 이후 제이에게는 신의 축복과도 같은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영화는 가해자의 가족과 가해자를 용서받을 만한 인물로 ‘설정’하고 대리 용서해 버림으로써, 실재하는 숱한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배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추상적 피해자를 모두 아우르며 대변하는 듯했던 영화가 이런 결론을 내릴 때 관객은 아연해진다. 용서와 화해를 대신 말할 권리는 우리 중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에.


 ‘매스’를 지탱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감독은 피해자 측과 가해자 측 양쪽을 모두 부부와 아이가 있는 ‘표준 가정’으로 구성했다. 두 부부는 대화를 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남편과 아내에게 의지한다. 제이가 고성을 내면 린다의 말문이 막히고 그럴 때 리처드가 개입해 두둔하는 식이다. ‘에번이 어떤 아이였는지 들려달라’는 린다의 말에 오열하던 게일은 남편에게 손을 잡아달라 말하는데, 이 장면이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미국에서는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가족과 동료를 잃고 있다. 이 불행을 끝낼 수 없을까? 영화는 영화의 할 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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