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른을 코앞에 둔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 분)는 아직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지 못했다. 의학을 전공했지만 육체보다 정신에 더 관심이 쏠리면서 전공마저 심리학으로 바꾼 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사진에 끌리기 시작한다. 자아를 찾아 분투하던 율리에는 우연히 유명 만화 ‘밥캣’의 작가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리 분)을 만나게 되고, 곧 그와 사랑에 빠진다. 대화가 잘 통하는 악셀 옆에 있으면 행복감이 밀려오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조급한 마음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러는 사이 율리에가 쓴 글 ‘미투 시대 속 오럴섹스’는 온라인에서 주목받아 화제가 된다.
악셀은 정체성과 관련한 율리에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아이를 가지기만 원한다. 율리에의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그와 멀어진다. 악셀의 신작 출간 파티가 열리던 날, 율리에는 묘한 공허감을 느끼며 자리를 빠져나온다. 결혼식 연회가 한창이던 어느 건물 옆을 지나던 율리에는 슬쩍 그곳에 들어가 파티에 합류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던 중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 분)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각자 연인이 있지만 서로에게 이끌린다.
영화는 사랑에 동반되는 희로애락을 매우 사실적으로 포착해낸다. 낯선 이에게 호감을 느끼는 순간과 그 호감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과정, 다투고 멀어지며 이별하는 순간까지. 그러면서도 끝내 로맨스 장르의 핑크빛 본분을 잃지 않는다.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결국 그날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사랑을 시작한다. 에이빈드의 마음을 확인한 율리에가 집안 전등을 밝히자 일순간 온 세상이 멈추는 장면은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다. 모두가 정지해 있는 세상에서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향해 달려간다. 움직이는 이는 오직 율리에와 에이빈드뿐. 재미있는 것은 이 장면이 컴퓨터그래픽이 아닌 실제 배우들의 훈련을 통해 완성됐다는 점이다. 멈춰 있는 행인의 머리칼이 흩날리고 나무들은 바람에 나부낀다. 2020년대에 촬영된 아날로그라니, 장면의 재미는 배가된다.
로맨스 영화의 전형과도 같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기실 율리에의 성장 드라마에 가깝다. 영화는 한 인물이 청춘을 통과하는 방식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과 사랑을 적절히 엮어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하려 했던 감독은 그러나, 이야기를 진행하는 과정에 있어 몇 가지 모순을 드러내고 말았다. 가장 큰 실수는 페미니스트인 율리에를 여성혐오적 인간으로, 자기부정형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감독은 율리에를 성차별에 반대하고 여성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인물로 설정했다. 율리에는 영화 중간중간 여러 차례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한다. 그가 쓴 글의 제목 ‘미투 시대 속 오럴섹스’ 역시 율리에가 어떤 문제에 관심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와는 배치되는 크고 작은 설정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관객을 의아하게 만든다.
처음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되짚어 보자. 율리에가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꾼 영화 초반, 그는 같은 학급에서 수업을 듣는 친구들을 둘러보며 ‘대부분 식이장애를 앓는 여자애들’이라고 폄하한다. 악셀의 친구들과 떠난 휴가에서는 친구들의 부인이 자신을 (젊다는 이유로) 싫어한다며 투덜댄다. 육아의 고충을 토로하는 엄마들과 대화하면서는 ‘아이들을 자주 안아주면 마약 중독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이 장면만 본다면 누구라도 율리에를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여성혐오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페미니스트에게도 다층적 면모-모순적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다면 그 의도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 분명하다.(당연하게도 페미니즘은 성장통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페미니스트’ 율리에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이다. 악셀은 율리에를 자기와 동등한 정치적 주체로 보기보다 자기주장을 할 줄 아는 당차고 귀여운 여자 정도로 여기는데, 이때 사상으로서의 페미니즘은 그저 여성을 더욱 (상대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액세서리로 전락하고 만다.
악셀과 헤어지며 율리에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괴짜 짓을 하는 자신 같은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인 여자를 만나라”고 조언한다. 그러자 악셀은 율리에의 그런 괴짜 같은 모습이 “늘 앉아서 그림만 그리던 자신을 일으켜 줘 좋았다”고 답한다. 여기서 ‘괴짜 짓’이란 남자들의 성적인 농담에 일침을 가하거나 성관계에 대한 솔직한 에세이를 써 인터넷에 올리는 율리에의 행동을 말하는데,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기표현이 ‘악셀을 일으켜 주는’, 그래서 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라니 황당할 따름이다.
생각해 볼 대목은 또 있다. 악셀과 사랑에 빠진 율리에는 곧장 악셀의 집에서 동거를 시작하고 악셀과 헤어진 다음 거주지 역시 에이빈드의 집이라는 점이다. 율리에가 만나는 남자들은 둘 모두 집이 있고 율리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현실의 반영일까, 아니면 감독의 무의식일까. 그토록 당당하고 매사 똑부러지는 율리에는 왜 (엄마와 이혼한) 친아빠에게만 약한 걸까.
영화가 에이빈드의 전 연인 ‘수니바’를 그리는 방식 역시 문제적이다. 에이빈드가 결정적으로 율리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수니바가 환경운동에 열을 올리면서다. 여기서 환경운동은 남자로 하여금 연인과 헤어짐을 생각하게 만드는 ‘피곤한 취향’ 정도로 묘사된다. 올바른 소비를 고심하는 수니바의 모습 바로 뒤에 이어지는 숏이 율리에에게 반한 에이빈드의 표정이라니! 수니바를 ‘성을 재화로 삼는’ 인물로 설정한 것 역시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악셀과 에이빈드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율리에는 영화가 결론에 치닫도록 그 둘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율리에를 만나기 전 성차별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그리던 악셀은 율리에와 헤어진 후 방송에 나와 대놓고 페미니즘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감독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주인공을 페미니스트로 설정하면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고 믿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남성’으로서의 잠재적 사고가 중요한 부분들을 간과하게 만든 걸까? 그 역시 악셀처럼 페미니즘과 환경운동을 그저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괴짜 짓으로, 이야깃거리로 소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길 바란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