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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Oct 21. 2021

작은 개인들의 커다란 신념

영화 '모리타니안'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9·11테러 핵심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가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위성 전화기로부터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남자는 그 전화를 받았다. 체포되기 전, 그는 경찰들의 눈을 피해 휴대전화에서 모든 연락처를 삭제한다. 어딘가 의심스러워 보이는 남자의 행동. 그는 정말 테러범과 한패일까?


 남자의 이름은 ‘슬라히’(타하르 라힘 분). 모리타니공화국의 국민이다. 어느 저녁, 슬라히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한다. 체포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빈 라덴의 전화기로 걸려온 사촌의 연락을 슬라히가 받았다는 것. 둘째, 사촌과의 통화를 마친 뒤 슬라히의 통장으로 거액의 돈이 입금되었다는 것. 물론 둘 모두 정황 증거일 뿐, 슬라히가 테러범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진 못한다. 그러나 슬라히는 곧 감옥에 갇히고 만다.


 6년의 수감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날 슬라히에게 변호사가 찾아온다. 당신을 변호하고 싶다고 말하는 ‘낸시’(조디 포스터 분)가 슬라히는 어쩐지 못 미덥다. 이제껏 그 누구도 슬라히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았기에, 그는 또 다른 변호사를 만나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희망을 걸어보는 모든 과정이 힘겹다. 하지만 낸시가 슬라히를 변호하겠다고 한 이유는 그의 결백을 믿어서도, 무죄를 밝힐 결정적 증거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오직 기소도, 재판도 없이 수감된 용의자의 인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내게 이 영화는 낸시와 슬라히, 그리고 두 사람의 상대편에 서 있는 ‘카우치’(베네딕트 컴버배치 분), 이렇게 세 사람의 신념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로 보였는데, 이들의 신념이 얽히고 부딪침에 따라 영화의 얼개가 만들어지고, 흔들리고, 위기가 해소되기 때문이다.


 낸시와 그의 동료 변호사 ‘테리’(쉐일린 우들리 분)는 슬라히를 제대로 변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엄격히 통제된 기밀문서들을 열람하려 분투하던 낸시는, 어느날 많은 부분이 지워진 문서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독하던 중 슬라히의 자백 진술서를 보게 된다. 결백을 주장하던 슬라히가 죄를 자백했다니! 충격을 받은 테리는 사건에서 손을 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낸시는 슬라히를 변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낸시의 강한 직업적 신념이 드러난다. 그는 처음부터 슬라히가 무죄라고 추정하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을 마음 깊이 신뢰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슬라히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돕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권리는 슬라히가 자백을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낸시는 슬라히의 변호를 맡았다는 사실만으로 금세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앞에서 꿋꿋하다. 자기 삶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 속에서도 신념을 꺾지 않는다. 낸시는 정확히 통념의 반대편에 서 있다.


 9·11테러로 동료이자 친구를 잃은 군검찰관 카우치는 전범 재판을 진행할 것을 명령받는다. 그의 분노가 재판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 생각한 정부의 결정이었다. 맨 처음 카우치는 슬라히를 반드시 사형시키겠다는 각오로 재판에 임한다. 하지만 사건을 파고들수록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통째로 지워진 정보, 모순으로 가득한 보고서들, 수사를 진행해 온 동료의 의뭉스러운 말과 행동. 그는 이런 방식으로는 슬라히의 유죄를 입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사건을 더욱 세밀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마침내 보게 된다. 국가가 ‘대의’를 명분으로 자행한 악행들을. 범인을 찾기보다 정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국가의 민낯을.


 슬라히의 자백은 강요된 것이었다. 국가는 죄 없는 사람들을 수감하고 그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잔혹한 고문을 행했다. 카우치는 사건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먹는다. 정부와 동료들, 국민들이 모두 ‘반역자’라 부르며 손가락질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상관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누군가는 아무나가 아니다.”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은 존엄하다는 그의 종교적 신념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자행한 고문은 실로 엄청났다. 그들은 수감자들을 극심한 추위에 떨게 하고, 스트레스 자세와 통증 유발 자세를 강제한다. 수면을 박탈하는 것은 물론이고, 물 고문과 강제 성교까지 동원한다. 이 모든 과정을 슬라히는 꿋꿋이 참아내지만, 그의 어머니를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해 강간하겠다는 협박은 견뎌내지 못한다. ‘거짓 자백’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영화는 그가 고문을 당하는 장면에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영화가 선택하는 것은 구체적 재현이기보다 연극적 연출이다. 고문의 고통과 피해자의 아픔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다이내믹하게 장면을 전환하고 시청각을 동원해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지만, 끝끝내 적나라한 묘사는 피한다. 피해자의 아픔을 서스펜스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 미국 정부의 심문 과정은 일종의 게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고문관과 그 앞의 슬라히는 모두 게임 속 캐릭터일 뿐이다. 이 거대한 게임에서 누군가는 고문관의 역할을, 누군가는 범인 역할을 맡아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감독은 범죄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슬라히에게 범인이라는 역할을 쥐여주고 그를 단죄하는 상황을 게임에 빗댄 것 아닐까.


 영화는 슬라히의 결백을 증명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 그가 두려움에 맞서는 방식에 포커스를 맞춘다. 재판일 법정에 선 슬라히는 알라의 가르침을 받들어 이렇게 말한다. “아랍어에서는 ‘자유’와 ‘용서’가 한 단어다. 그들을 용서했기에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작은 개인의 커다란 신념을 본다.


 개개인의 신념은 때로 권력을 이기기도 한다. 그러나 신념으로 잔혹한 현실을 버텨내는 개인에게 감탄하는 데에서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개인의 신념에 집중하고 그것을 칭송할 때 변화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인’을 이야기하기보다 ‘사회의 변화’를 말해야 하는 이유다.


 바이든 행정부는 임기 내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저 수용소의 무지막지함을 함께 목격한 관객들이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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