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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Oct 06. 2021

잃어버린 시계를 찾아서

영화 '더 파더'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어느 날 보험설계사를 만났다. 실손보험에 가입하려는 것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설계사는 내게 줄곧 간병치매보험에 관해 설명했다. 치매에 ‘간병’ 자가 붙은 것으로 보아 이 보험은 환자보다 간병인을 위한 상품인 것 같았다. “치매는 암이랑 달라서 빨리 죽지도 않아. 환자가 정신을 내려놓으니 걱정도 없어지고 마음도 편해져서 밥을 더 잘 먹거든. 치매는 간병하는 사람만 죽어나는 병이야. 보험을 꼭 들어놔야 해.” 분명 무시무시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터졌다. 고민을 해보겠다고 답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웃음기는 사라지고 진지한 고민이 시작됐다. ‘부모님이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내가 부모님께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중 얼마나 될까.’ 고액의 치매보험료는 마치 간병의 고통을 돈으로 환산한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 ‘더 파더’를 보고야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치매를 생각해 온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손녀딸을 언니라 부르는 할머니, 어린아이처럼 반찬 투정을 하는 할아버지. 그러다 불현듯 기억이 돌아와 평소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 나는 치매환자를 이렇게 이미지화하고 있었다. 내게 치매는 돌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기적인 질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파더’는 조금 다른 길을 간다. 이 영화는 ‘돌보는 이’보다 ‘앓는 이’에 집중한다.


 아빠 ‘앤서니’는 집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딸 ‘앤’이 그를 찾아온다. 앤은 앤서니에게 ‘이번에 올 간병인과는 불화를 일으키지 말라’ 당부한다. 스스로에게 전혀 이상을 느끼지 못하는 앤서니는 자꾸만 간병인을 부르는 딸이 못마땅하다. 그는 이제껏 간병인들을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돌려보내왔다. 앤이 자신은 곧 파리로 떠날 예정이라며 더는 아빠를 돌볼 수 없다고 하자 앤서니는 상심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앤은 파리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한번은 앤서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도중 그의 집에 낯선 남자가 찾아온다. 남자는 자신이 앤서니의 사위라며, 앤서니의 집을 자신의 집이라고 주장한다. 당황한 앤서니는 앤을 찾지만, 외출하고 돌아온 딸 앤 역시 낯선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앤서니는 매 순간 기억이 뒤엉켜 혼란스럽다.


 앤서니가 너무나 명확하게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던 초반부와는 달리, 영화는 앤서니의 기억을 따라 함께 뒤죽박죽이 되기 시작한다. 도입부에서 앤을 연기한 배우는 분명 ‘올리비아 콜먼’이었는데, 중반부엔 딸이라며 등장한 배우가 ‘올리비아 윌리엄스’로 바뀌어 있다. 누가 진짜 딸인지 관객 역시 혼란스럽다. 어느 순간엔 서스펜스 영화를 보는 듯 공포스럽기까지 한데,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관객은 깨닫게 된다. 내가 느끼는 혼란과 공포, 스트레스가 그대로 치매환자의 것이라는 걸.


 앤서니의 기억이 뒤엉키는 단위는 점점 짧아진다. 길게는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엉키기도 하지만, 짧게는 금방 밥을 먹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착각인 줄 알았던 앤의 파리행 역시 사실이었다. 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파리로 가려고 한다. 그리고 앤서니가 계속해서 간병인을 거부할 경우 그를 요양원에 입원시킬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온전히 ‘앤’의 편에 서 있었다. 치매환자들의 기억은 온전치 않기에 그들이 ‘어디’에 머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집이든 요양원이든, 그저 안전한 공간이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매 순간 자신의 시간이 사라지는 공포 속에 사는 앤서니에게는 기억을 붙잡아 줄 누군가가 절실했다. 낯선 이가 아닌 나를 아는 사람들, 나는 비록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나와 내 시간을 기억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그는 외치고 있었다. 앤서니를 보는 관객으로서, 또 장차 누군가의 보호자이자 간병인이 될지 모르는 사람으로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대중매체가 소비해 온 치매와 치매환자의 이미지를, 단 한 번의 성찰도 없이 받아들여왔다는 것이 뼈아팠다.


 감독은 이 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동명의 희곡을 썼고, 8년 전 연극 무대에 올렸다. 그가 연극에 오랜 시간 몸담아온 만큼 영화 역시 곳곳에 연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세트의 활용이다. 치매환자에게는 같은 공간이 매 순간 다른 공간으로 보이고, 동시에 다른 공간이 같은 공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는 앤서니가 딸 앤과 함께 병원에 상담을 받으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집과 병원이 같은 공간이다.


 하나의 세트를 여러 다른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은 연극의 특징이기도 하다. 감독은 연극의 무대 활용 방식을 그대로 영화에 가져온다. 미로처럼 설계된 하나의 공간을 앤서니의 집, 딸의 집, 그리고 요양원으로 조금씩 바꾸어 보여주는 것이다. 구조도, 소품의 위치도 똑같은 집은 관객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다른 공간으로 변해간다. 앤서니의 불안정한 기억을 묘사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선택은 없어 보인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과정에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연극에서는 세트 구성을 바꾸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영화는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액자의 위치가 바뀌고 의자의 모양이 달라지는 과정을 관객이 낱낱이 목도할 수밖에 없는 연극과 달리, 영화는 관객이 모르는 새에 무언가를 바꿔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관객이 인지하지 못한 찰나 미묘하게 바뀌어 있는 공간이란! ‘더 파더’는 그야말로 연극적인 영화다. 두 장르가 시너지를 발휘하는 순간,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영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마지막으로, 앤서니 홉킨스의 연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극에서 앤서니 홉킨스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생년월일도 본인 것을 쓴다. 아마도 감독은 배우가 아닌 인간 앤서니 홉킨스의 모습이 역할에 녹아 나오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여든을 훌쩍 넘긴 앤서니 홉킨스는, 자신을 배역에 투영하는 것에 부담을 많이 느꼈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먹이는 앤서니의 슬픔이 어쩐지 인간 앤서니 홉킨스의 슬픔으로 느껴진다. 지나온 시간을 잃어가는 앤서니가 자꾸만 시계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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