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퍼노바'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 한 잔의 가치는 물잔이 놓인 장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물이 부족한 곳에서 한 잔의 물은 생명을 구할 수도 있지만, 물이 넘쳐나는 곳에서라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슈퍼노바’의 개봉은 시의적절해 보였다. 제작국인 영국에서보다 지금 대한민국에 훨씬 필요한 이야기이므로. 영화는 샘(콜린 퍼스 분)과 터스커(스탠리 투치 분)가 여행길에 오르며 시작한다. 둘은 캠핑카를 타고 이제 막 출발한 참이다. 덤덤한 표정의 터스커와는 달리 다소 불안해 보이는 샘의 얼굴은 그들의 여정이 그저 평범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 둘은 연인이자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다. 터스커는 샘의 긴장을 풀어주려 노력하고, 계속되는 농담으로 끝내 분위기는 밝아진다. 두 사람은 목적지를 찾는 과정에서도 아웅다웅한다.
샘은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지만, 터스커는 기계의 사용을 극구 거부한다. 그는 지도를 펼쳐 들고 자신이 갈 길을 직접 정하고 싶어 한다. 그가 내비게이션을 거부하는 건, 단지 안내자의 음성이 ‘동성애를 금지’한 마거릿 대처의 목소리와 비슷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터스커가 목적지를 찾는 방식은 그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몇 년 전 터스커는 초기치매 진단을 받았다. 그는 하루하루 나빠져 가는 자신의 상태를 느끼고, 효과가 미미한 약에 의존하는 것이 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다. 작가로서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워진 것은 물론, 이제는 메모를 하거나 적혀 있는 글자를 읽는 것조차 버겁다. 이따금 산책 중에 길을 잃기도 하고, 어느 때엔 티셔츠를 입는 방법조차 낯설다. 터스커를 평생 책임지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품은 샘이지만, 그 각오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할지 그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샘은 그럴수록 더욱 결연한 모습으로 터스커 앞에 선다. 어떤 시련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샘은 터스커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둘의 사랑은 여행을 하며 더욱 공고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샘은 터스커가 비밀리에 세워놓은 계획을 우연히 알게 되고 충격에 빠진다. 터스커가 자신의 생을 자신이 원하는 시점에 멈추기로 결정한 것이다. 터스커는 자신을 잃어가는 것만큼이나 샘에게 짐이 되는 것이 두렵다. 샘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터스커의 이런 결정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둘의 이야기는 이제 ‘치매’라는 질병과 ‘자기결정권’에 관한 것으로 방향을 튼다.
이쯤에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겠다. ‘슈퍼노바’는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에 ‘성소수자’는 없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고, 그들 앞에 놓인 시련과 그 시련을 마주하는 당사자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먼 곳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샘과 터스커가 캠핑카를 타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모습에서 최근 개봉했던 우리 영화 ‘정말 먼 곳’이 겹쳐 보였다.
‘정말 먼 곳’의 주인공 진우(강길우 분)는 서울을 떠나 강원도 화천의 양떼목장으로 거처를 옮겨 온다. 그는 서울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모두 지운 채 살고 있다. 그런 진우에게 오랜 연인 현민(홍경 분)이 찾아온다. 현민 역시 진우와 같은 이유로 서울을 떠나 왔다. 다시 만난 둘은 화천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 행복도 얼마 가지 못한다. 동네 사람들이 그들의 관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둘은 서울을 떠나온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화천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영화가 보여주듯, 대한민국에서 성소수자는 언제나 정말 먼 곳으로 떠나야 하며, 정말 먼 곳에 가서도 또 다른 정말 먼 곳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이제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됐지만, 영화 속 성소수자는 여전히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바쁘다. 그들의 존재와 사랑 이야기를 관객이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의 삶을 다룬 우리나라 영화가 모두 사랑 일변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무언가 이야기할 시간이 주어지면, 그들은 성원으로 존재할 권리와 사랑할 권리를 주장하는 데 그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존재를 부정당하기 일쑤인 곳에서 삶의 세부사항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치매와 자기결정권을 주제로 한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제작된다면, 주인공 두 사람의 성별은 (당연하게도) 여자와 남자로 정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관객에게 그 영화는 그저 소수자의 이야기로 남을 것이며, 관객은 정작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집중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 성소수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본 주변 관객들의 감상을 기억한다. “동성애에 편견이 없는 편인데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보기 불편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좋았는데, 요즘 게이 영화는 너무 직접적인 것 같다” 같은 이야기. 여전히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동성애에 대한 견해’를 그들에게 물어봐 주기를 바란다. 영화에 나오는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 걱정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어딘가로 숨어들 때, (스스로 편견이 없다고 믿는) 관객은 그제야 비로소 그들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반면 그들이 처음부터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사랑을 표현하면 이내 불편해진다. 나는 아직 주인공들의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영화가 먼저 그들의 사랑을 승인하는 건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언제 이성 간의 사랑 이야기가 관객의 견해를 물은 적이 있던가. ‘슈퍼노바’와 ‘정말 먼 곳’의 두 연인이 광활한 대자연 속에 서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자연 속 두 커플의 모습은 닮아 있었지만,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슈퍼노바’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다.
소수자가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설 때,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보다 그들의 고유하고 개별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이런 영화가 그 시기를 조금이나마 앞당기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이미 존재하는 이들의 존재를 타인이 규정할 권리는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