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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Oct 20. 2021

그 어떤 판타지보다 짜릿한 전복의 드라마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말 개봉한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의 장르는 범죄, 드라마, 스릴러에 해당한다.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범죄’로, 피해자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데서 ‘드라마’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한다는 의미에서 ‘스릴러’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난 후 나는 이 영화의 장르에 ‘판타지’를 추가하고 싶어졌다. 주인공의 복수 방식이 비현실적으로 통쾌한 나머지 판타지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인데, 이 판타지는 그 어떤 사실적인 드라마보다 현실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카산드라’(캐리 멀리건 분)가 클럽에서 만취한 채 인사불성이 된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실에서도 대개 그렇듯, 취한 여성은 너무도 쉽게 남성의 표적이 된다.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남자들은 카산드라를 위하는 척, 걱정하는 척하며 그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다. 그런데 남자들이 술 취한 카산드라를 추행하려 할 때, 그가 돌연 멀쩡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말을 건다. 그렇다. 만취한 연기는 의도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카산드라의 시원한 한 방. 남자들은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남자들을 벌주고 돌아오는 날이면 카산드라는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노트를 꺼낸다. 그는 그날그날의 일을 빨강, 파랑, 검정 세 가지 색깔로 적는데, 이 색깔은 아마도 상대 남성이 입는 타격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어떤 남자는 피를 보기도 하고, 비교적 운이 좋은 남자는 그저 경고만 받기도 한다. (남자들은 ‘운이 따르기만을’ 기도해야 한다. 이 얼마나 절묘한 전복인가.)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카산드라의 응징 방식을 추측하게 할 뿐 결코 결정적 힌트를 제공하지 않는데, 마치 여성 관객이 이 장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 복수하라.’ 그것이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이자 위로인 셈이다. 이제 바통을 넘겨받은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단죄하기만 하면 된다.


 카산드라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에겐 어린 시절부터 친자매처럼 지낸 친구 ‘니나’가 있었다. 둘은 성장기를 함께 보냈고, 의과대학에도 함께 진학했다. 그런데 대학 생활에 한창이던 어느 날 파티에 간 니나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자, 남자 동기들이 그녀를 성폭행한다. 그 자리에 있던 동기 몇몇은 현장을 촬영하기까지 했다. 니나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지만, 가해자들은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영상을 돌려 보며 니나를 조롱한다. 니나는 괴로워하다가 끝내 목숨을 끊는다.


 자살하기 전 니나는 몇몇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동기 ‘매디슨’(알리슨 브리 분)은 니나가 술에 취해 있었던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듯 그에게 책임을 돌렸고, 그날의 일 역시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며 외면한다. 학장도 마찬가지였다. ‘술에 취한’ 잘못이 니나에게 있는 마당에 ‘프라미싱 영 맨’의 미래를 꺾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어떤 상태’의 여자도 추행을 당할 수 없고 당해서도 안 된다.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은 자유의지이다. 여성에게 자유란 ‘남성이 범죄하게 하지 않을 만큼’만 보장되는 것이란 말인가?


 카산드라는 그날 그 파티에 니나와 함께 가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다가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 대학 동기 ‘라이언’(보 번햄 분)이 찾아온다. 대학 시절부터 카산드라를 마음에 두고 있던 라이언은 곧 카산드라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그는 그동안 카산드라가 만나온 남자들과는 어딘가 달랐고, 카산드라는 그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하지만 라이언과 가까워지면서, 카산드라는 대학 시절 니나를 괴롭혔던 가해자들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들은 과연 ‘프라미싱 영 맨’이었다. 성폭행 주동자 ‘알’은 유능하고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연인을 만나 약혼까지 했다. 범죄에 가담한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카산드라는 곧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데, 자신과 만나는 라이언 역시 그 사건의 가해자였다는 점이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인 카산드라는 ‘알’의 총각파티 날 대학 동기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카산드라는 스트립댄서로 위장하고 총각파티 장소를 찾는다. 이때 영화는 스트립댄서의 이미지를 단순히 의상 콘셉트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주류 남성 문화가 대상화하고 이용해온 스트립걸의 이미지를 전복하는 것이다. 댄서가 된 카산드라는 남자들을 단죄하는 적극적인 주체로 선다. 복수 장면에서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톡식(toxic)’이 기괴하고 섬뜩하게 변주되어 흘러나오는데, 이 역시 짜릿한 데가 있다. 성적 대상으로 빈번하게 소비되어 온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그의 음악을 영화가 구원한다는 인상마저 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런 카산드라를 연기하는 것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역을 주로 맡아온 배우, 캐리 멀리건이다.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복이다.)


 마침내 카산드라는 가해자 알과 단둘이 마주한다. 그리고 알에게 니나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도발하기 시작한다. 겁에 질린 알은 “나는 어렸고 취해 있었다” 같은 흔한 변명을 내뱉으며 자신의 잘못을 부인한다. 7년 전 저지른 성범죄로는 그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카산드라는 알이 자신을 살해하도록 유도한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그를 범죄자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마저 알은 카산드라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곧 결혼할 연인과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카산드라의 사체를 불태우고 증거를 인멸한다.


 아마도 이야기를 여기까지 들은 누군가는 ‘영화가 너무 비현실적인 것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성범죄를 당했지만 보호받긴커녕 조롱만 받다 목숨을 끊는 피해자,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음에도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가해자들, 복수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또 다른 피해자,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도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가해자.


어떤가?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비현실적인 것은 영화인가,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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