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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Aug 24. 2022

현실과 가상의 재난 사이에서

영화 '비상선언'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재난부터 가상의 재난까지, ‘재난’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단골 소재다. 오락적 기능을 앞세운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대부분 가상의 재난을 다루지만, 이 무거운 주제가 손쉽게 상업적 도구로 활용된다는 것에는 일정 정도 거부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한 남성이 승무원 앞에 서 있다. 남성은 사람들이 많이 탑승한 비행기편이 무엇인지를 노골적으로 승무원에게 묻는다. 승무원이 난색을 표하자 남자는 화를 낸다. 얼마 뒤 남성은 화장실에 숨어 자신의 겨드랑이를 찢고 그 속에 알 수 없는 작은 물체를 숨긴다. 우연히 그 모습을 목격한 수민은 아빠 재혁(이병헌 분)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인다. 남성은 재혁에게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이냐고 추궁하지만 재혁은 화를 내며 그 자리를 피해 버린다. 재혁의 태도에 불쾌해진 남성은 재혁의 비행기 표에 적힌 목적지를 보고, 그들과 같은 하와이행 비행기에 탑승하기로 결심한다.


 생화학 테러를 계획한 남성은 비행기가 이륙하자 곧바로 겨드랑이에 숨겨온 바이러스(가 담긴  병)를 꺼내 기체 안에 살포한다. 감염 증상을 보이던 승객들이 하나둘 사망하기 시작한다. 한편 지상은 남성이 비행기 탑승 전 인터넷에 올린 테러 예고 영상 때문에 발칵 뒤집힌다. 형사 팀장 인호(송강호 분)는 테러범 류진석(임시완 분)에 대한 수사에 열을 올리던 중 친구들과 휴가를 떠난 자신의 아내가 류진석과 같은 비행기에 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상황을 해결하려 애를 쓴다.


 ‘비상선언’은 휴가철 블록버스터 영화답게 볼거리가 넘쳐난다. 영화 초반부 형사들이 류진석의 집을 수색하는 장면은 잘 만든 공포영화를 방불케 하며, 비행기 신에서는 재난 블록버스터다운 면모를 뽐낸다. 감염된 기장이 사망하면서 기체가 요동치는 장면은 특히 압권이다. 항공기 세트 사이즈에 맞춰 제작된 초대형 로티서리 짐벌을 돌리는 방식으로 촬영된 이 장면은 여느 할리우드 영화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대낮의 환한 하늘빛부터 붉은 석양까지를 기내 창문을 통해 보여주는데, 실감나는 조명은 관객으로 하여금 실제 비행기에 탑승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비상선언’의 또 다른 특징은 이야기의 빠른 전개에 있다. 영화는 테러범을 특정하기까지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고 시작과 동시에 류진석이 테러범임을 드러낸다. 또한 테러범의 서사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않는데, 류진석이 테러가 시작되고 얼마 뒤 사망해 버리는 것이다. 테러범의 사연이나 테러의 이유 같은 것을 집중해 다루지 않는다면 영화가 가리키려는 곳은 어디일까. 영화는 승객, 즉 재난 상황에 직면한 인간들의 모습에 긴 시간 초점을 맞춘다. 처음 기내에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승객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일부 승객들은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격리해줄 것을 승무원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곧 모두가 감염되고, 승객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돕기 시작한다.


 해결책이라곤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뿐이라 여기고 있던 승객들 앞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미국 정부가 자국의 안전을 이유로 해당 항공기에 착륙 금지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할 수 없이 회항해 돌아가던 도중 기장에 이어 부기장(김남길 분)마저 증세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결국 부기장은 ‘비상선언’(항공기의 정상 운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때 무조건적 착륙을 선언하는 것)을 선포하지만, 일본 역시 이들의 착륙을 불허한다.


 문제는 국내 상황도 마찬가지라는 것. 인호는 끈질긴 추적 끝에 바이러스에 맞는 백신을 찾아내지만 이미 변이가 진행된 바이러스에 기존 백신이 효과가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절반이 넘는 국민들이 착륙을 반대하기 시작한다. 착륙 반대 국민청원 게시글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활주로를 막아서고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도 등장한다. 정부 역시 해결책이 온전히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착륙을 허가했다가는 더 많은 국민이 희생될지 모른다며 줄곧 미온적 태도로 일관한다.


 관객은 이 지점부터 영화를 온전히 가상의 재난으로 보기 어려워진다. 치명적인 호흡기 바이러스는 지금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19라는 현실의 재난과 쉽게 겹쳐 보인다. 감염자와 비감염자 사이 혐오를 조장하는 모습뿐 아니라 서로 돕고 연대하며 희생하는 이들의 모습까지. 헌신적으로 승객들을 돕는 승무원들의 모습에서 코로나19 치료를 위해 희생하는 의료진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여기까지라면 좋으련만,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끝끝내 국내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들마저 소환한다. 특정 공간에 갇힌 채 생명을 위협받는 설정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대구 지하철참사나 세월호와 같은 비극적 재난을 떠올릴 것이다. 승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가족들에게 영상 편지를 남기는 장면은 실제 재난 상황 속 희생자들이 남긴 메시지를 상기시키는데, 이때 영화는 어떤 메시지도 던지지 못한 채 희생자들의 모습만을 무력하게 비춘다.


 결정적 문제는 그다음 장면에 있다. 나라 안팎에서 착륙을 거부당하자 승객들은 결국 내리지 않기로 다짐하는데, 일부는 이런 결정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장면이 실제 재난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서사로 여겨지는 것은, 추가적인 희생을 막아야 하니 구조작업을 펼치지 말자던 일각의 목소리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피해자를 자발적으로 희생시키는 것은 문제적이다 못해 폭력적이다. 더욱이 영화는 착륙에 반대(불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가치 판단도 하지 않는다. 감독은 현실의 재난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이 가상의 재난이 어떻게 보일지 전혀 고민하지 않은 걸까?


 인호는 결국 백신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바이러스를 투입했다. 온몸을 바쳐가며 백신 효과를 입증해 낸 인호 덕분에 영화 속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결론은 ‘피해자 가족의 헌신과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징후적이다. 감독이 영화에서 이야기한 대로, 재난은 ‘그날 그 시간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비상선언’의 결론대로라면, 앞으로 발생할지 모를 재난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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