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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퇴화하고 있는 것인가

누구나 한 번쯤은 비 내리는 잠수교에 서게 된다

by 순정

김해경의 집에서 짐을 싸서 나왔다.


김해경이 나가라고 해서도 아니었고, 세희가 나가자고 해서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내가 이제 그의 집에서 나오라고 해서였다.


세희는 내게 끊임없이 전화를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불안과 안도에 휩싸여 밤을 새우거나 숙면을 취했다. 많은 생각을 했고 짧은 단상을 남겼다. 미련, 부끄러움, 후회, 사랑 같은 것들이 왔다가 갔다.


나는 빌려 입었던 김해경의 셔츠를 그의 옷장 안에 넣으며 여전히 이 집에 나 몰래 여자가 들락거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것이 김해경이 사는 방식이고, 그가 비우거나 받아들이는 삶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지내며 익혔던 도피와 줄행랑을 피부처럼 입고 간선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김해경처럼 아무 정류장에서나 내려 걷기 시작했다.


잠수교에 빗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여름의 초입에 서서 먼 강물을 바라보았다.


김해경에게 전화를 걸어 집을 나왔다고 말하자 그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별말 없이 전화를 끊었고 나는 어쩐지 그가 여전히 아무 때고 전화를 걸어와 어딘가로 나오라고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무 곳에서나 걷고 잠들 나를 떠올렸다.


나는 퇴화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착하는 인류의 삶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


세희에게서 지금 어디에 있냐는 문자가 왔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답장하면서, 결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적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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