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rahn Dec 10. 2021

아만자 아니고 암환자

슈뢰딩거의 고양이

 암환자(이제는 아만자가 아닌 암환자라고 말하기로 한다. 볼드모트 이름을 정확히 말하듯) 커밍 아웃을 한 몇 주 사이에 주변에서 참 다양한 위로와 반응을 경험했다. 대부분은 암이라니 깜짝 놀라서 연락을 했다가, 아직 검사 중인데 종양 자체가 예후가 좋고 초기라서 내시경으로 절제만 하면 될 것이다-는 나의 무덤덤한 말에 '다행이다! 큰일 난 줄 알았잖아'로 답했다. 어떤 이는 '왜 암에 걸린 거야?'같은 이상한 질문을 하기도 했고, '내 주변에도 암에 걸린 사람이 있어-'로 시작하는 지인 얘기를 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았다.

 참 암에 걸린-아니 암환자가 된 사람이 많다. 암은 어찌 보면 몇 세기에 걸쳐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 같다. 암에 걸렸다는 사람은 주변에 너무 많은데, 막상 내가 암환자가 되면 세상 놀랍고 희귀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언젠가 나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그 사실이 마음의 준비 따위 시켜주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주위에서 누군가 암환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고 내가 암환자가 되고 보니 세상이 다 달라 보일 지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더 위중한 암환자들의 입장에서는 비교적 덜 위중한 나의 상태가 부럽기도 할 것이고, 그럼에도 암환자라고 커밍아웃하는 나의 촐랑댐이 꼴 사납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하나도 밉지 않다.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국내에서 일 년에 한두건 발생하는 흔치 않은 악성 뇌종양이라서 예후도 안 좋고 정보도 없는데, 옆에 자리한 환우는 아이들에게 가장 발병률이 높다는 종양인 데다가 정보도 많고 예후도 좋아서- 그래 봤자 다 같은 암환자인데도 그 안에서 박탈감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최악의 위치에 놓이면 종양이 없는 건강한 아이를 부러워하는 일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된다.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은, 소아암중에서도 가장 흔하고 고치기 쉽다는 암에 걸린 아이들이었다.

 어머 아가는 어디가 아파요? 에 대한 대답을 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감, 미안함, 안도감 같은 것이 동시에 떠올랐다. 우리처럼 최악의 경우가 아님을 안도하는 것이리라-그때의 나는 지나치게 씩씩하게 굴거나 뾰족하고 방어적으로 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콧줄에 수액을 달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마다 어디선가 어김없이  '쯧쯧쯧'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가장 싫었다. 에구 불쌍한 것 쯧쯧.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소리를 향해 큰 소리로 대들었다.'왜 혀를 차세요?! 당신이 뭔데 우리를 불쌍하게 생각해요?'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정말 크게 소리를 쳤다. 그러면 그 무리 속 누군가의 얼굴이 유독 머쓱해졌다.(주로 할머니들이었다) 그때는 누군가가 우리를 '불쌍하게 '보는 것이 가장 싫었다. 우리는 이 안에서도 웃고 울면서 당신들과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우리를 함부로 동정해?

 그때와 지금은 여러모로 처지가 다른데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 끔찍하다. 정말 나를 안쓰럽게 생각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나의 가족들과 나와 가까운 사람들 그 소수의 사람들뿐이다. 사실 그들에게도 나는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좋지는 않다. 걱정의 대상도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애써 더 가볍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바빴다. 사실 상황이 가벼운 쪽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더 높기도 하고, 일찍 자라 무리하지 마라 등의 잔소리와 참견을 듣지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당연히 무섭다. 다음 주에 듣게  결과가 혹시 최악일까 봐. 혹은, 지금은 괜찮아도 평생 재발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진실을 안다는 것의 대가는 이것이다. 두려움. 어쩌면 나는 대장내시경을 받지 않았으면 한 20-30년 정도 룰루랄라 순진무구하게 잘 살다가 어느 날 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실을 모른 채로 순진하고 가볍게 사느냐, 또는 진실을 아는 대가로 두려움을 안고 존재의 무게감을 느끼면서 사느냐-그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언제나 후자를 선택할 것이라고 잘도 생각해왔겠다! 참으로 오만했다.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나에게 빨간 알약 파란 알약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이제는 답을 바꿀 것이다. 파란 알약 주세요-

 -

  분유를 먹는 대로 다 토하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최악의 결과를 들었던 밤이 떠오른다.

  병실에 있던 남편이 누군가와 한참 진지하게 통화를 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자

" 회사 옆 부서 팀장님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네. 겨우 40대 중반 되셨을 텐데, 원래 지병도 없고, 애들도 이제 초등학생인데 그냥 집에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돌아가셨데."

 

 어머.. 애들은 어쩌나.. 아내는 어쩌나.. 하는 슬프고 당혹스러운 마음 한편에서 놀랍게도 용기가 생겨났다. 이 아이가 병을 이겨낼 확률이 지극히 낮다고 해도, 저토록 건강했던- 앞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확률이 100프로였던 사람도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확률이 무슨 소용인가. 확률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 모두는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고 당장 지금 살 수도 있고. 죽고 살 확률이 모두 반반인 그런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존재들이다. 그 모든 확률들을 다 정확하게 계산해보고 증명해 보일 수도 없고, 미리 몸의 모든 구석구석을 다 검사하고 확인해서 언제 무엇으로 죽을지도 알 수가 없다. '죽었으며 동시에 살아있는 고양이'인 것이다.

 나도 당장 내일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는 일이고, 나보다 훨씬 건강하던 20대의 누군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앞일은 알 수가 없지만,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주어진다는 사실만은 공평하고 분명하다.

  사실-그 느닷없는 타인의 죽음에서 큰 용기를 얻어서, 지치지 않고 오만하고 당당하게 아이의 수술과 항암과 두 번의 고용량 항암까지 일 년 반에 걸친 병원 생활을 잘 버텨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여전히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더듬더듬 추측해볼 뿐이다.


-


  물론, 나는 내가 어떤 암의 말기 상태가 아님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앞의 글에서도 썼듯이, 정보가 많고 말이 많은 종양임이 감사하다. 고통에 취약한 나는, 그 독한 항암과 방사선 같은 치료들을 견뎌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서운 악성 종양이든 상대적으로 가벼운 종양이든 , 일단은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나이브하게 살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 똑같이 빨간 알약을 삼킨 동료가 된다. 우리는 더 이상 막연하게 '언젠가는 죽겠지.'라고 생각할 수 없다. 막연함이 뚜렷한 실체로 잡히는 순간의 두려움을 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공평하게 같은 환자이다.

 나보다 건강했던 사람이 당장 내일 사고로 죽어도 , 병약했던 본인이 그 누구보다 가늘고 길게 살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죽고 사는 것은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확률 따위 무슨 의미인가. 죽거나 살거나 반반의 확률과 상태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누군가의 느닷없는 죽음으로부터 용기를 끌어온다. 진실을 안다는 것의 대가로 따라오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아야지.

 그리고, 주변에 암환자가 있다면 , 말로 위로하려고 들거나 도와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얼떨결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