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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란 Jul 31. 2018

TATE 중에 가장 작지만, 빛나는 TATE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에서



만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지자 램지 부인은 무심코 외쳤다. "야, 정말 아름다워!" 후미를 가득 채운 푸른 물이 드넓게 펼쳐지고, 회백색의 등대는 멀리 후미 중앙에 단단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끝없이 펼쳐진 녹색 모래 언덕이 낮게, 부드러운 주름처럼 기복을 이루고 있었고, 모래언덕 위에 자생하는 풀들은 마치 사람들이 살지 않는 달나라로 달아나려는 듯이 머리를 기울이며 나부끼고 있었다.


_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 『등대로』







  라임만을 보고 《설득》의 앤 엘리엇을 이렇게 말했다.      



물가로 내달리는 듯한 중심도로, 성수기에는 해수욕 기구와 사람들로 활기를 띠었을 아담한 만, 그 언저리를 에워싼 콥의 산책로와 풍경, 그곳의 오랜 절경과 그 현대식 개조물들, 그리고 마을 동쪽으로 아름답게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 등이 눈에 들어왔다. 라임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을 처음 대하면 누구나 그 매력에 이끌려 이곳을 샅샅이 보고 싶어질 것이다. 만약 이곳에 오는 사람인데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라임만을 기차로 지나쳐온 난,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를 설명하기에도 이 문장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제인 오스틴이 이곳에 왔다면 라임만이 아니라 《설득》의 무대로 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세인트 아이브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이 살아 있었을 무렵, 세인트 아이브스는 지금처럼 휴양 도시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인트 아이브스 기차역에서 보통 걸음으로 15분 정도 떨어진 세인트 아이브스 마을 박물관에서 확인한 마을의 옛 모습은 내 첫인상과 사뭇 달랐다. 



St. Ives 역 앞에 펼쳐진 해안가 풍경



  세인트 아이브스는 런던을 기준으로 볼 때 잉글랜드 서쪽 끝에 있는 콘월주 Cornwall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다. 영화 <어바웃 타임 About Time>에서 팀이 “영국이 장화 모양이라면, 장화의 앞코 부분”이라고 설명이 딱 어울리는 곳이 바로 세인트 아이브스다. 이곳은 런던에서 한 번에 기차가 닿지 않는다. St. Earth 역에서 환승해야 갈 수 있을 정도로 외진 마을이다. 우리나라로 한다면, 해남의 땅끝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 세인트 아이브스에서 영국 최남단인 Land's End는 차로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지금은 영국에서 손꼽히는 휴양 도시로 유명하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콘월의 작은 마을 중 하나였다.     



St. Ives Museum



  영국의 서쪽 끝이라면 대서양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해안가인데, 왜 항구가 발전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나 역시 콘월에 도착하기 전까지 폴리머스(plymouth)와 같은 큰 항구가 없는지 의문을 가졌었다. 하지만 이 의문은 콘월주에 도착하자 명쾌하게 해결되었다. 콘월의 해안가는 항구가 들어설 수 없는 지형이기 때문이다. 찰스 디킨스는 콘월의 지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콘월의 해안은 음산하고 험준하며 암초투성이여서 배가 난파되고 배에 탄 사람들이 몰살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단단하기 그지없는 해안의 바위가 거세게 부는 바람과 파도에 깎여 아치 모양이 되기도 하고 군데군데 동굴이 뚫려 있기도 하다."     



  이렇게 영국의 중심에서 떨어진 해안가라는 지리적 위치를 활용하기에 세인트 아이브스를 비롯한 콘월의 지형은 무역을 통해 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 심지어 1830년대 증기기관차의 발명된 이후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개방과 함께 잉글랜드의 오지들이 연결되기 시작했는데, 콘월 지방은 그중에서도 1859년 마지막으로 전국 철도로 연결되었다. 사실 잉글랜드 내에서 콘월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오래전부터 세인트 아이브스 마을 사람들은 어업과 광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콘월 지방의 해안가에는 주석 광산들이 많이 있는데, 세인트 아이브스도 마찬가지였다. 세인트 아이브스 박물관에 가면 주석을 비롯한 다양한 광물 자원과 이를 채굴했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연한 걸 볼 수 있다. (안타깝게,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콘월이 유럽에서 주석과 석탄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산지 중 하나로 손꼽혔지만, 생각보다 빨리 그 역사는 막을 내린다. 주석 생산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잉글랜드에서 조용한 오지 마을이었던 세인트 아이브스는 19세기 후반부터 온난한 기후를 사랑한 예술가들이 찾아들면서 도시의 풍경이 바뀐다.






해안가에 놓인 Bara Hepworth 조각 

  항구와 해변가에서 천천히 도시 안 골목을 걷다 보면 하얀 건물이 늘어서 있고,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마치 이탈리아 남쪽의 해안도시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1920년대부터 화가, 조각가, 도예가가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예술가들의 도시로 새롭게 태어났다. 골목을 걷다 보면, 이곳을 주제로 한 그림과 공예품을 판매하고 있는 가게들과 예술가의 스튜디오를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예술의 도시다. 그래서 테이트의 작은 보석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Tate St.Ives)가 자리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작은 땅끝 마을인 세인트 아이브스에 테이트 미술관이 세워진 이유가 뭘까? 


옹기종기 모여든 예술가들 덕분이 아닐까. 1980년 바바라 헤프워스가 죽고 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바바라 헤프워스 박물관과 조각 정원 Bara Hepworth Museum & Sculpture Garden의 관리를 테이트 미술관이 맡게 되었다. 


  테이트는 이곳에서 활발한 작품들을 전시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후 세인트 아이브스 해변가에 있는 가스 공장이 있던 지금 자리에 미술관을 열었다. 외지의 작은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 찾아왔고 이후 확장 및 보수를 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920년대 이후의 모던 아트 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는 테이트 가운데 유일한 유료 미술관이다.         



Tate St.Ives, St.Ives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에는 상설전시 대신 주기적으로 세인트 아이브스나 그 주변 지역과 인연이 깊은 회화, 조각, 도예 작품들을 엄선하여 전시한다. 내가 갔던 2017년 여름에는 거대한 캔버스 위에 거친 붓 터치가 인상적인 제시카 워 보이스(Jessica Warboys)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거친 부분과 부드러운 터치가 커다란 캠퍼스를 툭툭 채워나간 모습을 보면, 영화 <허니와 클로버>의 하구미가 작업한 그림이 떠올랐다. 음악을 들으며 영감을 받은 순간, 물감을 붓기도 하고 붓으로 그리기도 하고 문지르기도 하면서 완성한 그림과 워 보이스의 그림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작품 설명을 읽어보니 워 보이스의 그림은 세인트 아이브스 근처 해변에서 완성한 작품으로 해변가 공간을 이용해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캠퍼스를 바다에 널어 두고 특수 장치를 이용해 해변의 바람, 햇빛, 바다, 모래가 캠버스에 색을 입혀 작품이 완성되도록 했다. 그러므로 작품은 세인트 아이브스가 완성한 것이라는 작품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의 키를 가볍게 넘긴 작품은 벽면에 툭툭 얹어 놓아두며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마치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 미술관이 튜닉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의 분관인 바바라 헤프워스 박물관과 조각정원은 바바라 헤프워스의 작품과 삶을 전시한 곳이다. 박물관 자체가 조각가 바바라 헤프워스와 그녀의 남편인 화가 벤 니콜슨이 살았던 집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세인트 아이브스로 이사 온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자신들만의 작품을 완성해나간다. 두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을 박물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바라 헤프워스 스튜디오다. 거대한 조각 작품을 만들었던 작업장이 1980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모습 그대로 멈추어져 있다. 



Bara Hepworth Museum & Sculpture Garden



  박물관 내에 작은 규모의 작품들에 비해 정원 곳곳에는 커다란 그녀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조각품의 규모에 비해 정원이 협소해 정원에 조각품이 있는 게 아니라, 조각품들 사이에 나무와 풀이 있는 것 같아 조금 답답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배치를 한 사람이 조각가 바바라였다고 한다. 작곡가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직접 기획해서 배치한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일까.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 없이, 작품을 감상하길 바랬던 게 아닐까. 그 의도를 아는 그녀의 수많은 팬들이 정원을 돌며, 작품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있는 모습은 몹시 인상적이었다. 1980년 죽기 전 그녀는 자신의 집과 작업실을 박물관으로 만들 것을 유언에 남겼다. 그 유언을 테이트에서 집행하게 됨에 따라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의 작은 분관이 되었다.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를 방문했다면, 조금만 이동하면 갈 수 있는  바바라 헤프워스 박물관과 조각정원을 방문하길 바란다. 2017년 윌리엄 터너 대신 영국 지폐를 차지할 뻔한 그녀의 작품을 가장 밀도있게 볼 수 있는 곳은 여기 뿐이니 말이다.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 본관과 분관을 오가다 보면 게스트 하우스와 주택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 세인트 아이브스는 영국의 대표 여름 휴가지로 여름에 사용하는 별장들이 많다. 세인트 아이브스 해안가의 수많은 별장 가운데, 톨랜드 하우스(Talland House)에서 행복한 여름휴가를 보낸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있다. 열세 살 때까지 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여기서 보낸 행복한 시간들과 눈에 담은 세인트 아이브스의 풍광은 한참이 지나서 작품 속에서 묻어 나온다. 바로, 버지니아 울프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와 『파도』, 『제이콥의 방』이 바로 세인트 아이브스를 무대로 한 소설이다.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 본관으로 돌아오던 길에서 『제이콥의 방』의 문장과 어울리는 풍광에 잠깐 멈췄다.      


처음에는 그녀의 일부였다가 이제 또 다른 무리의 일부가 되어, 경사진 언덕에서 잔디와 뒤섞인, 어떤 것들은 기울어지고 또 어떤 것들은 똑바로 서있는 수천 개의 하얀 비석과 시든 화환들, 초록의 양철로 된 십자가들, 가느다랗고 노란 샛길들, 그러고는 사월이면 환자의 침실에서 나는 향기를 내며 교회 담장 너머로 축 처져있는 백합들과 하나가 되어버렸다. 씨브룩은 이제 이 모든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치마가 끌리지 않게 걷어 올리고 닭에게 모이를 주노라면 예배나 장례식의 종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씨브룩의 목소리다- 죽은 자의 목소리. 





  행복이 무엇인지 자신의 존재 깊숙이 새겼던 곳이라 작품 중간중간 등장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갈 수 없는 곳인 세인트 아이브스를 딱 지금의 내 나이인 23살(한국 나이 24살)에 버지니아 울프는 다시 찾아왔다. 톨랜드 하우스는 밝게 불이 켜져 있었고, 다른 가족들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유령이 된 것 같았다고 에세이에서 고백했다. 그녀가 44살의 나이가 『등대로』를 완성하기 전까지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했고, 세인트 아이브스는 행복과 고통이 뒤엉킨 장소로 존재했을 것이다. 어머니와 행복한 추억이 가득한 세인트 아이브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통해 자신을 힘겹게 한 기억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 이후로 그녀가 다시 이곳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확인하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등대로』를 완성하고,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면 어땠을까. 그녀가 우리 곁에서 더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 스쳤다. 


  거친 바닷바람을 맞은 교회와 공동묘지를 지날 때가 내가 세인트 아이브스에서 머물었던 시간 중에 가장 날씨가 좋았다. 꼭 버지니아 울프 어머니의 죽음을 행복으로 감싸 안고 있는 하게 감싼 세인트 아이브스의 추억과 닮은 순간이었다.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의 기념품 숍에 들어가면 버클이 눈에 띈다. 내가 방문한 세인트 아이브스의 날씨에 따라서 고를 수 있게 만든 것인데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로 나뉘어 있었다. 망설여졌다. 맨 처음 도착했을 때 맑았고, 30분 뒤에 비가 쏟아졌다. 한 시간 정도 비를 뿌린 뒤엔 흐렸다가 맑아지길 반복했기 때문이다. 세인트 아이브스에서 느낄 수 있는 날씨들을 한 나절만에 다 경험한 행운아로서, 난 3개를 사야 하나 싶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맑은 세인트 아이브스를 골랐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 세인트 아이브스는 쨍쨍한 세인트 아이브스이길 바라며.     







<참고문헌>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버지니아 울프, 꾸리에 (2018)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민음사 (2014)

설득, 제인 오스틴, 문학동네 (2010)

제이콥의 방, 버지니아 울프, 솔 (2011)

테이트 홈페이지 https://www.tate.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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