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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란 Jan 11. 2019

스코틀랜드를 'Scott Land'로 즐겨볼래요?

'에든버러(Edinburgh)'에서




반면에 스코틀랜드는 옥수수조차 나지 않는 언덕과 황무지가 여기저기에 많고 양 떼나 황소 떼를 먹일 정도의 식물이 나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큰 강들을 따라 난 형지는 비옥한 편이라서 상당한 양의 농작물을 생산해낸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대체로 잉글랜드 사람들보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 도시와 마을들의 수가 적고 각각의 크기도 작으며 주민의 수도 잉글랜드에 비해 적은 편이다. 그렇지만 스코틀랜드에는 돌산이 많기 때문에 집들을 대체로 석조로 지어 오래가며 잉글랜드의 벽돌집들보다 더욱 웅장한 느낌을 준다.


월터 스콧, 『스코틀랜드 역사 이야기 1』중에..









한 아이가 있었다. 변호사 아버지와 의사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절름발이가 된다. 조금 불편한 다리로 거닐며, 눈과 마음에 품었던 도시. 스코틀랜드의 심장과 같은, 에든버러였다. 어렸을 때부터 나이 든 친척들이 들려주고 알려주던 스코틀랜드만의 이야기는 아이의 마음과 생각 속에 깊게 자리 남았다. 들려주는 이야기에 만족하지 못했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 역사, 극 작품, 옛날이야기, 로맨스 등을 닥치는 대로 읽는" 애독자를 넘어 탐독자가 되었다. 또 총명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시를 암송하며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놀라게 하는 특기"까지 가진다. 아이는 자라서 "이웃 지방을 답사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게 되었고, 스코틀랜드 선조들의 역사적인 투쟁을 깊이 마음에 인식"하였다. 


바로 영국의 대문호(大文豪) 월터 스콧 경(Sir Walter Scott, 1771-1832)의 이야기다. 



에든버러 로열 마일에서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인 킬트를 입고 백파이프 연주를 하고 있는 분



누군가는 영국의 대문호라는 이름보다, 스코틀랜드의 대문호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1707년 잉글랜드와 통합 후, 갈 곳 없이 세월의 힘에 점점 잊혀간 '스코틀랜드'만의 전통을 다시금 부활할 수 있도록 만든 공을 기린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스코틀랜드 작가'라는 틀에 가두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 『아이반호(Ivanhoe, 1820)』를 읽는다면, 그가 스코틀랜드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영국과 유럽의 역사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역사소설의 연금술사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스코틀랜드의 대문호이지만, 영국의 대문호가 더 잘 어울리는 작가다. 


에든버러를 떠날 때야 이 생각이 스쳤다. 영국을 떠나기 전 나에게 영국의 문호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등이 전부였다. 그런 나에게 월터 스콧 경은 한 마디라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문장부호 '?' 같은 인물이었다. 에든버러를 문학의 도시로 만들었고, 에든버러가 사랑하는 작가라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모른 채 에든버러를 여행한다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급하게 그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때 나의 결정은 정말 최고의 선택이라고 자부한다. 도시에 들어 선 순간, 조금이라도 그에 대하여 알아보고 이 도시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는 진짜. 스콧. 랜드. 였다. 



에든버러는 정말, 월터 스콧 경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는 기념물과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소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역사·문화의 심장부, 에든버러. 에든버러 올드타운에서 뉴타운으로 넘어가려는 길가에 서면 눈길을 사로잡는 동상, 아니 탑, 아니 건물,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기념물이 있다. 에든버러에 처음 온 여행자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당기는 기념물은 마치 중세 도시의 대성당처럼 도시의 배꼽처럼 우뚝 솟아 있다. 

바로 월터 스콧 경(Sir Walter Scott, 1771-1832) 기념탑(Scott’s Mounment)이다. 


 

월터 스콧 경 기념탑 (Scott’s Mounment)




처음 스콧 모뉴먼트를 보았을 때, 런던 켄징턴 가든스(Kensington Gardens)의 한 기념물이 떠올랐다. 형태와 웅장한 규모가 닮은 알버트 메모리얼(Albert Memorial)이. 화려한 금박 장식을 더한 알버트 메모리얼은 성당에 들어서 회랑을 따라 쭉 걸어가면 나오는 앱스에 놓여 있어야 할 성물을 모신 기념물 같다. 정상에 놓인 십자가, 성화를 연상하게 하는 외벽 장식이 주는 이미지 때문이다. 커다란 공원 한복판에 놓인 알버트 메모리얼은 켄싱턴 궁전 앞 빅토리아 여왕 동상이 가까이에 있어, 두 사람의 기념 박물관이 있는 곳에 있지만 이 앞에서 단번에 알버트 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형태다. 반면에 스콧 모뉴먼트 역시 형태는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켄징턴 가든스(Kensington Gardens)의 알버트 메모리얼(Albert Memorial)

조금 더 웅장하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스콧 모뉴먼트는 에든버러에서 눈에 띄는 기념물이다. 그 높이는 사진으로 다 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다. 런던의 심장부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동상이 52m이고 켄징턴 가든스에 있는 알버트 메모리얼이 54m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스콧 모뉴먼트 앞에선 조금 민망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그 높이가 약 60m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전해지는 말로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일부러 잉글랜드의 자부심인 넬슨 장군 기념탑보다 높게 만들었다고 한다. 설마 그랬을까 싶지만. 브리튼 섬에서 오랜 시간 앙숙으로 지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걸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만하단 생각이 든다. 

"잉글랜드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해서 잉글랜드를 '올드 잉글랜드', '메리 잉글랜드'라고 부르고 태양이 비추는 나라들 중에서 가장 멋진 나라"라고 생각했다. 이에 질세라 "스코틀랜드 사람들 역시 호수와 산지가 많은 자기 나라 스코틀랜드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오래된 말로 '호수와 산지의 땅, 용감한 사람들의 땅'"이라 불렀다. 브리튼 섬에서 아웅다웅 다투다가, 결국 잉글랜드에 통합된 스코틀랜드 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린 월터 스콧 경 기념물만큼은 잉글랜드의 어떤 기념물에 뒤쳐지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고집부리는 것처럼 보여, 유치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높은 스콧 모뉴먼트의 스콧 동상과 부조, 동상들에 담은 의미를 알면 유치하단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스콧 모뉴먼트는 자기 역사에 대한 자부심으로 바꾼 기념물이었기 때문이다. 




월터 스콧 경 기념탑 (Scott’s Mounment)의 월터 스콧 경(Sir Walter Scott, 1771-1832)



스콧 경을 올려다보았다. 가볍게 책을 손에 쥔 스콧 경의 동상은 부드러워 보인다. 앉아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힘을 준 왼쪽 다리와 다르게 돌이 지나기도 전에 소아마비를 앓아 불편했던 오른쪽 다리는 조금 편안하게 바위에 기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에 앉아 애완견 보비가 전해주는 온기를 느끼는 느끼는 월터 스콧 경의 표정은 경직했던 표정이 살짝 풀린 듯하다. 주인을 따르던 강아지는 스콧 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다. 동상에도 표현된 보비는 동상뿐만 아니라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에 수장되어 있지만 전시하지 않은 스콧 경의 초상화 Sir Walter Scott(1819)에도 동상 속 귀여운 보비를 찾아볼 수 있다. 오른손에 꽉 쥐고 있는 지팡이는 불편한 걸음걸이를 돕는 역할을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왜 스콧 모뉴먼트에서 스콧 경을 선 모습이 아니라 앉은 모습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경직되어 있는 듯한 서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보다 한결 여유로운 표정의 동상이 조금 더 따뜻해 보인다. 


Sir Walter Scott(1819) at National Gallery Sccotland 

에든버러에서 멀지 않은 글래스고 조지 광장에 가면 월터 스콧 동상을 볼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글래스고의 월터 스콧 동상은 지팡이를 쥔 채 서 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왠지 에든버러의 스콧 모뉴먼트가 더 편안한 표정이 아닐까 싶다.


스콧은 건강으로 애버츠퍼드로 완전히 이주하기 전까지 쭉 에든버러에서 살았다.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에든버러 대학교를 다닌다. 1786년 그는 아버지 밑에서 법률을 배우고, 1892년 변호사가 된다. 하지만 변호사로 일하기는 것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매료했던 문학을 놓을 수 없었던 그는 꾸준히 다른 나라 책을 번역했다. 뷔르거(Burger)의 『추적, 윌러엄과 헬런(The Chase, and William and Helen)』을 번역해 소개했으며, 독일 낭만주의 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스콧은 괴테(Goethe)의 『철의 손 괴츠(Götz von Berlichingen)』를 번역사여 『공포 이야기 (Tales of Terror)』를 발표했다. 왕성한 번역활동을 하면서도 판사 대리 항소법원 서기로 임명되는 등 법조인으로서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글을 소개하던 그는 1803년쯤에 계속해서 관심을 쏟던 스코틀랜드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던 민요를 엮은 『스코틀랜드 변경 지방의 민요』를 발표한다. 1805년  자신만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약 10년 뒤, 1814년에  『웨이벌리』를 발표한다. 스콧은 역사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매료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솜씨가 탁월했다. 꾸준히 역사소설을 쓴 그가 10번째 쓴 역사소설이 바로, 그의 대표작『아이반호』다. 월터 스콧의 소설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그 이유는 영화와 드라마로 꾸준히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Wiki 'Ivanhoe' @Stephencdickson

스콧 모뉴먼트 벽 『아이반호』의 주인공 아이반호가 새겨져 있다. 아이반호는 원래 유서 깊은 잉글랜드 색슨계 가문의 장자였지만, 아버지인 세드릭은 당시 지배층이었던 노르만인을 누르고 섹슨계 왕국을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에 아들이 걸림돌이 되자, 가차 없이 아들을 가문에서 내쫓는다. 이후 아이반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나 왕이었던 리처드 1세의 눈에 띈다.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간 사이에 동생이 반정을 일으키고, 이 사실을 알고 왕은 아이반호를 비롯한 충직한 자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온다. 


스콧 경을 중심으로 오른쪽(강아지가 있는 면)으로 가서 유리창 왼쪽에 있는 조각상이 바로 아이반호다. 아이반호는 중세 시대 십자군 원정기를 떠난 기사답게 갑옷으로 무장한 모습이다. 



"다시 싸우지 못하게 된다면 내 탓은 아닐 거요. 서서 싸우든 말을 타고 싸우든 창이나 도끼나 검이나 무엇으로든 언제라도 그대와 맞붙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아이반호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을 숨긴 채, 마상시합 대회에 나간다. 아이반호가 마지막 경기에서 만난 '의절 기사'가 분노에 가득 차 험한 이야기를 하자, 그때 멋 상대에게 응수했던 말처럼. 언제든 무엇으로든 싸워도 지지 않을 준비를 하고 있는 듯싶었다.


이 외에도 스콧 모뉴먼트에는 스콧 소설 속 인물이 등장한다. 아이반호 영웅기를 이야기 시작을 열었던 왐바(Wamba)도 조각되어 있다. 또 십자군 원정을 나간 사이에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겼지만, 결국 후에 아이반호가 사랑하는 로위너와 결혼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리처드 1세도 조각되어 있다. 재미있는 건 아이반호를 짝사랑했던 레바카가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세를 무대로 한 소설답게 마상시합이 이야기의 결정적인 장면에 등장한다. 레베카는 마상시합에 나갔다가 부상당한 아이반호를 치료해주다 그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한 마디로 서브 여자 주인공이다. 잉글랜드인이 아니라 유대인인 그녀는 고리대금업자인 아버지와 달리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꽤 좋아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끝내 아이반호의 마음이 로웨나에게 향하자 레베카는 자신의 신앙(유대교)을 포기할 수 없다며 로웨나와 아이반호의 곁을 떠난다. 



"안녕히 계세요. 유대인과 그리스도 교도를 다 같이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 가장 좋은 축복을 아씨께 잔뜩 쏟아 주시길 빌겠습니다! 저희를 싣고 표류하던 배는 앞으로도 항구에 닿기 전에는 계속 그렇게 떠돌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마지막 인사를 남긴 채 떠나는 레베카와 떠나려는 마음도 모른 채 그녀가 잉글랜드에 남기를 권하는 로웨나. 레베카 쪽에 마음이 기울었던 나와 같은 독자가 많았나 보다. 스콧 경 동상에는 로웨나 동상은 없지만, 레베카 동상은 남아 있는 걸 보면. 위치는 아이반호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걸아가면 아이반호가 있던 높이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 독특한 옷을 입은 여자 조각상을 찾을 수 있다.



에든버러 박물관에 있는 스콧 모뉴먼트 모형



『아이반호』인물뿐만 아니라, 스콧의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도 등장한다. 찰스 1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피의 메리 여왕과 다른 인물), 제임스 1세 등 다양한 인물 조각상을 찾아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를 빛낸 로버트 번즈, 로버트 퍼거슨과 같은 시인도 찾아볼 수 있다. 스콧 모뉴먼트에는 스콧의 이야기 속 주인공을 찾아보는 즐거움과 스코틀랜드를 빛낸 인물을 확인할 수 있는 기념물이었다. 그 높이가 넬슨 동상보다 더 높다는 이야기 하나만 가지고 스콧 모뉴먼트를 지나치기엔 조금 아쉽다. 그 모뉴먼트에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여다볼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 에든버러의 올드타운과 뉴타운을 가르는 철로 사이에 우뚝 솟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그 안에 스코틀랜드가 다 담겨 있어 신기해하며 한참을 그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스콧 모뉴먼트는 288계단을 올라 에든버러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고 한다. 시간이 가난한 여행자였던 난 칼튼 힐에서 에든버러 전경을 내려다보기로 하고 전망대에 오르지 않았다. 흥미로운 건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결정을 했다는 점이다. 








월터 스콧 경 동상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를 위해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좁은 길을 통과하자 제법 넓은 로열 마일(Royal Mile)이 나왔다. 로열 마일 서쪽의 에든버러 성(Edinburgh Castle). 동쪽의 홀리루드 궁(Palace of Holyroodhouse). 어디를 가야 할까. 

 

두 궁전 모두 스코틀랜드 왕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에든버러 성은 7세기에 노섬브리아의 에드윈(Edwin of Deira, 586-632) 왕이 에든버러 지역을 정복한 후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절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바위(Catle Rock) 위에 쌓은 성이다. 홀리후드 궁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스코틀랜드에 공식적으로 방문할 때 사용하는 궁전으로, 15세기 스코틀랜드 왕국의 제임스 4세(James Ⅳ)가 세운 궁전이다. 둘 다 옛 성의 자취를 느낄 수 있지만, 약 1000년 전에 세워진 에든버러 성의 압도적인 위엄에 발길이 자연스레 서쪽으로 향했다. 


클로스(close, 로멸마일을 이용할 수 없었던 시민들이 이용한 작은 골목)

왕족과 귀족들만 통행할 수 있었던 1마일 남짓한 그 길 끝과 끝에 난 궁전 사이에 난 로열 마일에는 귀족들의 저택과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건물이 공존을 이루었다. "1542년 메리 여왕이 즉위했을 무렵, 로열 마일에만 부유한 상인 300명, 수공업자 400명, 거주 인고 1만 2,500명을 헤아렸다."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에든버러 올드타운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간격이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만약에, 불이 나거나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벽돌보다 바위로 지어진 올드타운은 더디게 타겠지만 무사하지 않을 것 같다. 1666년에 런던에서 있었던 대화재와 같은 참사가 에든버러를 빗겨나가 다행이란 생각이 스쳤다.  


 



점점 가팔라지는 길을 따라 에든버러 성에 도착했다. 11세기 이후부터 계속해서 스코틀랜드 왕가 사람들이 머물렀던 곳이자,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있어 자부심 그 자체인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에든버러 성에. 



로열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Royal Edinburgh Military Tattoo)를 한참 준비 중인 에든버러 성 입구

며칠 뒤면 시작하는 로열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Royal Edinburgh Military Tattoo)로 들뜬 에든버러 성은 에든버러의 대표적인 관광지답게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글래스고에 있는 캘빈 그로브 미술관&박물관에 이어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로 꼽힐 만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라고 하니 더 긴 설명은 필요 없을 듯싶다. 에든버러가 중세 후기 이래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인 중심지였고, 그 역사가 지나가는 동안 절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바위 위에 쌓은 성은 다 내려다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뿐만 아니라 에든버러 성은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져 도시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에든버러 어디에서든 쉽게 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의미다. 도시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기에 에든버러 성은 오랫동안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에든버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여겨졌다고 한다. 



라틴어로 뜻은 "누구도 내 공격을 받고는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다"



로열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Royal Edinburgh Military Tattoo)가 왜 에든버러 성에서 열릴까?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과거부터 에든버러 성에는 상당수 군대가 직접 주둔했으며, 잉글랜드에 스코틀랜드 왕국이 통합된 이후에도 에든버러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745년 하일랜드에서 시작된 재커바이트 봉기(명예혁명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제임스 2세와 그 직계 후선을 복위시키는 일련의 운동, Jacobite는 제임스를 라틴어로 표기한 것) 때, 반란군과 잉글랜드 군 모두가 최종적으로 복속하려 했던 도시는 모두 '에든버러'였다. 에든버러가 스코틀랜드에서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23년 마지막으로 군부대는 모두 철수했지만 아직도 성 안에는 스코틀랜드 군사박물관, 스코틀랜드 전쟁기념관 등 군대와 관련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건 1888년에 지어진 건물 입구에 쓰여있는 "Nemo me impune lacessit"라는 문구다. 스코틀랜드 국기와 같은 하늘색 띠에 적힌 문구는 라틴어로, 뜻은 "누구도 내 공격을 받고는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한다. 다시 말해, "누구든 나를 건드리면, 무사하지 않을 것"이라니. 꽤 섬뜩한 뜻에 놀랐다.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는 영국의 왕실 문장

이 문장은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는 영국의 왕실 문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문장 바로 위에 있는 보라색 꽃, 엉겅퀴(Thistle)와 관련된 이야기(guardian thistle)가 있다. 

13세기 스코틀랜드가 알렉산더 Ⅲ(Alexander III)가 다스릴 무렵 북유럽 근방의 바이킹으로부터 야간에 기습공격을 받는다. 진격하던 바이킹이 엉겅퀴를 밟는데, 이때 엉겅퀴가 소리쳐 잠들어 있던 스코틀랜드 수비수를 깨웠다고 한다. 그때 엉겅퀴가 했던 말이 "No one harasses me with impunity."라고 전해진다. 이를 라틴어로 바꾸어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문장으로 채택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에는 엉겅퀴 부대가 있을 만큼 엉겅퀴는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꽃 그 자체다. 하지만, 아쉽게 위 문패에는 보랏빛 엉겅퀴를 볼 수 없어 그 이유가 궁금했다. 



성 마가렛 교회 (St. Margaret 's Chapel)



에든버러 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성 마가렛 교회(St. Margaret 's Chapel)부터 찾았다. 12세기에 세워진 교회는 작고 아담했다. 이 교회를 세운 왕은 월터 스콧이 "지혜롭고 신앙심이 깊고 영향력 있는 왕"이며 "역대 가장 훌륭한 군주 중 한 사람"이라고 칭찬한 데이비드 1세였다. 데이비드 1세는 통치 당시 스코틀랜드의 영토를 눈에 띄게 넓혔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잉글랜드에 해당하는 노섬벌랜드와 더럼 지역을 잉글랜드에서 넘겨받았을 만큼 영토 확장에 있어서 탁월한 군주였다. 

스콧 경이 그에 대한 평가를 높이 한 이유는 그가 영토를 확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토를 어떻게 하면 적군에게서 지킬 수 있을까를 함께 강구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1세는 에든버러 성 내에 성 마가렛 교회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에든버러 가까이에 홀리루드 대수도원을 지었으며, 그 밖에도 도시마다 대수도원과 교회를 세웠다. 당시 성직자가 대부분이었던 당대 역사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는데 힘썼던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전쟁의 위협이 반복되었던 당시 "나라 전체가 불에 타고 약탈이 횡행하던 혼돈의 시대에 종교에 대한 숭배의 뜻으로 교회지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데이비드 1세는 이를 이용한 것이다. "넓은 영지들을 교회의 보호 아래 둠으로써 적군의 약탈을 방지하는 최선책을 쓴 것이다. 물론 그의 신앙심이 남달랐던 이유도 있겠지만, 그가 세운 수도원이 유독 전쟁에 쉽게 노출되는 지역에 있었던 이유로 볼 때, 그는 신앙심도 깊고 정말 지혜로운 왕이었던 것만큼은 사실인 듯싶다. 



그레이트 홀 (Great Hall)

그레이트 홀(Great Hall)에 들어서자 조금 실망감이 스쳤다. 이름처럼 웅대하고 거대한 연회장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작고 아담한 규모에 놀랐다. 그레이트 홀을 짓기 시작한 왕은 제임스 4세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지속되지 않았던 평화를 이끌어내고 싶었던 헨리 7세의 바람이 반영돼 그는 잉글랜드의 마가렛 공주와 결혼한다. 이후에 두 사람의 손자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 제임스 1세가 된다. 제임스 4세는 왕으로써 위용을 과시하길 줄겼던 왕이었다. 에든버러 성 외에 홀리루드 궁전을 새로 지었을 뿐만 아니라, 에든버러 성 내에도 그레이트 홀을 세운 것을 보면 짐작이 된다.

마거릿 공주와 에든버러에서 약 6마일 정도 떨어진 뉴배틀 수도원에서 결혼한 후 에든버러로 입성할 때, 꽤나 낭만적으로 마거릿 공주가 탄 조랑말을 함께 타고 들어왔다. 이후 에든버러에 준비된 천막에서 기예에 가까운 무예 공연을 준비해 전투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마치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도트락인 칼 드로고와 대너리스 타르가리옌의 결혼식 때 있었던 무예와 같은 실전 싸움과 같은 공연이 펼쳐졌다. 결혼식에서 보여준 기예나 통치했을 당시에 있었던 행사, 왕실 생활양식으로 추론할 때 스코틀랜드 왕실이 화려하고 품격 있을 수 있는데 제임스 4세가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이트 홀에 무기가 많은 이유가 제임스 4세 때문인가 싶었다. 연회장의 모습으로 꾸몄지만, 지금의 그레이트 홀의 모습은 후대에 완성된 것이다. 특히 지금의 무기가 가득 든 독특한 형태는 올리버 크롬웰 때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다. 당시 그래이트 홀은 군대의 막사와 같은 형태로 꾸며졌고, 이후 군대 병원으로 활용되었다가 복원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이트 홀을 둘러보면 이 방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담긴 안내판을 따라다니다 보면 그레이트 홀이란 하나의 공간에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층층이 쌓여 있는지 알 수 있다. 


운명의 돌(The Stone Of Destiny) 모형

에든버러 성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 있다. 대부분 관대하게 사진 촬영을 허용하는데, 딱 한 곳 촬영을 금한다. 바로, 스코틀랜드의 왕관과 보석이 전시되어 있던 곳이다. 제임스 5세 때 제작한 왕관, 교황에게 받은 홀과 검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인기가 많아 걸어가면서 짧은 시간 동안 보아야 했던 스코틀랜드의 영예(Honours of Scotland)는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이 컸다.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사가였던 월터 스콧이 발굴에 참가해 당시 왕자였던 조지 4세와 함께 발견한 보석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었지만, 그 바람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 나를 제외하고도 정말 많았다. 결국 짧게 둘러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왕관과 홀 그리고 칼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운명의 돌(The Stone Of Destiny) 역시 에든버러 성에서 꼭 봐야 할 유물 중 하나다. 

운명의 돌은 스코틀랜드 왕실을 나타내는 상징이자, 보물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야곱이 베고 잤던 베갯돌이라고 전해진다. 야곱이 천사의 사다리(Jacob’s Ladder)를 꿈꿀 때 베었던 것으로 의미가 남다른 유물이다. 운명의 돌은 야곱이 아들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이주했을 때, 이집트에 있었다가 이후 이집트의 공주가 스코틀랜드로 가지고 왔다고 전해진다. 진짜 이야기인지, 가짜 이야기인지는 오로지 듣는 이이의 마음에 맡기지만, 이 돌이 오랜 시간 동안 스코틀랜드 왕의 대관식 때마다 자리를 지켜왔다는 사실만으로 그 가치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전설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소중한 보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 1292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운명의 돌을 약탈해갔다. 스코틀랜드 왕국이 혼란스러운 틈에 말이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스코틀랜드 사람들 입장에서는 매우 굴욕적인 위치에 놓여 영국 왕 대관식에 사용되었다. 조지 5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킹스 스피치>에도 살짝 나오는 운명의 돌은 1996년에야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영국 왕 대관식이 있을 때 웨스트민스터 성당으로 옮겨준다는 전제조건을 단 채 말이다. 이후로 대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 약속이 지켜질지는 좀 더 두고 볼일이다. 


레이치 홀 (Laich Hall)

스치듯 보았던 전시품을 뒤로한 채, 장소를 옮겨 에든버러 성의 다른 방과 달리 고풍스러운 분위기 느껴지는 레이치 홀 (Laich Hall)로 향했다.  제임스 6세이자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한 그가 난생처음으로 스코틀랜드에 돌아온다는 소식에 새롭게 단장한 방이다. 그래서일까. 잉글랜드 생활에 젖어 있을 자신의 왕을 위해 단장한 방답게, 에든버러 성에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거대한 바위와 같은 성의 분위기가 좋으면서 동시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에든버러로 왕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알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왕의 식당이라고 부르지만 아기자기한 유물들을 살펴보면 그래이트 홀과 스코틀랜드의 영예가 전시되어 있는 곳 이상의 여유로움과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난, 한참을 이곳에서 보냈다. 




에든버러 성(Edinburgh Castle)에서 바라본 월터 스콧 경 기념탑 (Scott’s Mounment)



에든버러 성은 스코틀랜드 역사가 곳곳에 담겨 있다. 그 역사의 포문을 열었던 월터 스콧. 그의 기념탑은 에든버러 성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에든버러에서 월터 스콧 역시, 어디에서나 기억할 수 있을 만큼 '대문호'였다. 


그에 대하여 조금 더 알고 갔다면, 다른 작품을 더 읽고 다시 에든버러에 도착한다면 어떨까. 에든버러 성까지 확대했던 스콧 랜드가 더 넓어지지 않을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꼭 오길 바라며 에든버러를 나는 떠났다. 









참고문헌 


스코틀랜드 역사 이야기 1-4, 월터 스콧, 현대지성사(2005)

아이반호, 월터 스콧, 현대지성(2018)

지식인과 사회 :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 이영석, 아카넷(2014)


[아일랜드·영국작가에게보내는 편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월터 스콧을 만나러 가는 길, 정유경, 주간조선(201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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