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1.
자유에 관한 정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 새겨진 이 문장만큼 짧고 명료하게 본질을 꿰뚫은 정의가 또 있을까. 나는 이제 이 묘비명(墓碑銘)을 단순히 텍스트로 읽지 않고, 다시 내 마음에 새기려[銘心] 한다. 이 짧은 세 마디는 자유를 향한 인류의 오랜 사유를 관통하는 위대한 절창이기 때문이다.
2.
에리히 프롬은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를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와, 주체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를 위한 자유(freedom for)’가 그것이다. 프롬의 분석에 따르면 대중은 억압에서 해방되는 소극적 자유는 얻었으나, 정작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적극적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 채 방황하다 다시 전체주의와 소비사회의 획일성에 스스로를 유폐했다. 프롬은 이 현상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로 명명하며 현대인의 실존적 위기를 경고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카잔차키스의 통찰이 프롬의 분석을 넘어서는 더 높은 차원의 좌표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카잔차키스의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가 프롬의 ‘소극적 자유’에 해당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적극적 자유’를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무욕(無欲)의 경지를 가리킨다. ‘~를 위한 자유’조차 여전히 어떤 목표나 지향을 전제로 하는 상태이지만, 카잔차키스는 그러한 지향마저 덜어낸 무념무상의 상태를 선언한다. 일흔의 나이에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공자의 ‘종심(從心)’이 시공간을 초월해 이 묘비명과 만나는 이유도 바로 이 초월적 자유에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3.
카잔차키스는 일찍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이러한 자유를 근육과 혈관을 가진 생명체로 형상화했다. 소설 속 화자가 본 조르바는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이며, 온몸을 땅에 대고 기어가는 뱀처럼 대지의 비밀을 피부로 알아차리는 존재다. 먹물을 뒤집어쓴 지식인들이 공중을 나는 새처럼 텅 빈 관념에 매달릴 때, 조르바는 거친 노동과 위대한 야성의 언어로 자유의 실체를 증명한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뱀을 숭배하는 이유는 뱀이 온몸을 땅에 대고서 대지의 비밀을 배로, 고리로, 고환으로, 대가리로 알아차리기 때문이거든. 뱀은 늘 어머니의 대지를 만지고 접촉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지. 조르바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처럼 먹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공중에 나는 새들처럼 골이 텅텅 비었지.”
4.
조르바의 자유, 곧 카잔차키스가 꿈꾸는 자유는 사회가 부추기는 가짜 경로를 거부하고 내면의 순수함을 따르는 삶, 그래서 헛된 욕망과 가식이 없는 삶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자유에 관한 가장 엄숙한 진실 하나를 마주한다. 자유는 그렇게 살아온 삶에 주어지는 보상이다. 동시에 그런 자유관을 가진 사람만이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요컨대 자유는 삶의 결과인 동시에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셈이다.
5.
결국 카잔차키스가 묘비명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을 바라며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가. 무욕(無欲)이라는 가장 뜨거운 자유를 향해 온몸을 대지에 밀착시키고 살아낼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멈추고 각자의 묘비명에 당당히 ‘자유롭다’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