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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Mar 09. 2024

왜 강릉 출신 진보 정치인들은 강릉을 떠났나

강릉, 찐 진보에서 꼴보수로 변질된 곳

22대 총선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24년 4월 9일 업로드된 글임.


지역구가 강릉이 아닌 곳에서 강릉 출신 2인이 어려운 경선을 통과해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었다. 남양주을의 김병주 후보와 은평을의 김우영 후보다. 이들은 나의 강릉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다. 나는 원래 동문을 찾고 선배니 후배니 따지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예외가 되고 싶다. 그들에게 선배로서 진심으로 축하와 격려의 인사를 전한다. 강릉이 진보의 불모지일지는 몰라도, 강릉 출신이 진보의 아이콘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김병주 후보는 4성 장군 출신으로 윤 정권의 부실한 안보정책을 비판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등 지난 4년간 안보 전문가로 맹활약했다. 김우영 후보는 은평구청장과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돋보이는 성과를 남겼으며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의미 있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들이 본선에서도 무난히 당선되어, 이재명 대표를 도와 검찰독재를 끝내고 선진복지국가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을 의심치 않는다.



'뿌리 깊은 보수의 고장'답게 강릉에서는 원조 윤핵관으로 꼽히는 검사출신 의원이 5선에 도전하고 있다. 그는 채용비리에 연루되고서도 어찌어찌해서 빠져나갈 만큼 검찰 권력의 혜택을 맘껏 누린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강릉시민 상당수가  비판하기는커녕 내 자식이나 친인척의 취업을 챙겨준 유능한 국회의원으로 평가한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이득만 된다면 불법이건 편법이건 반칙이건 상관없다는 태도다. 어떤 사안을 자신의 이해관계로만 판단하는 태도는 시민의식이 미성숙한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가 직위를 이용해 자신의 지인과 그 자식들에 나눠주었을지도 모를 그 일자리는 공정한 경쟁과 절차를 거친 정직한 청년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앞에서 강릉을 ‘뿌리 깊은 보수의 고장’이라고 규정했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강릉은 사실 ‘뿌리 깊은 진보의 고장’이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저자로 단종 폐위에 맞서 세조와 맞짱을 뜬 생육신 중 한 사람 매월당 김시습 (1435~1493),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조선 신분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며 역모를 도모하다 능지처참 형을 당한 교산 허균 (1569~1618), 그리고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당당하게 가부장적 권위에 맞서고 빼어난 회화작품을 남긴 신사임당 (1504~1551), 허균의 누이로 남존여비 사상에 저항했고 시인으로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친 허난설헌 (1563~1589)이 모두 강릉 출신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과 한글소설의 저자가 모두 강릉 출신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문학이론에서는 소설을 개인의 자각이라는 근대적 의식을 기반으로 성립된 장르로 규정한다. 조선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로 개성적인 삶을 산 두 사람이 모두 강릉출신이라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이 두 여인은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거슬러, 그림과   당대의 약자인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인물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최초의 한문/한글 소설 저자 2인의 출신지와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예술인 2인의 출신지가 모두 강릉이라는 것)은 강릉지역과 강릉사람의 정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이 뿌리깊이 흐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항일 독립운동과 반독재운동에서도 결코 다른 어떤 소도시에도 뒤지지 않는 성과를 남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진보전통은 언제부터인가 묻혀버리고, 그저 뿌리 깊은 보수의 도시로만 알려져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가끔 경조사나 행사가 있어 강릉에 내려갈 때면 으레 지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원조 윤핵관이자 검사독재 정권의 하수인인 현직 의원 기가 나오는데, 그들 중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꼴통 의원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경쟁적으로 자랑하곤 한다. 그들은 자신이 그에게 어떤 도움을 받거나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관계가 얼마나 돈독할 것인지를 드러내놓고 떠벌인다. 더군다나 그가 대통령과 친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에 한껏 뿌듯해한다. 그가 공직자로서 얼마나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가는 아예 관심 밖으로 보였다. 그들에게 그는 공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직자이기 전에, '나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유능한 뒷배'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권하노니, 자유당 말기 권력실세였던 이기붕에 줄을 섰던 해바라기들의 말로를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을 그리 잘했기에 4선씩이나 했을까? 직권을 남용해서 강원랜드에 수십 명을 꽂아 넣었다는 의혹에 휘말린 일과 국회 본회의장에서 윤통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문자를 보내다가 언론사 카메라에 잡힌 일을 포함해 구리거나 구질구질한 일들 말고 그가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는 벌써 네 번이나 무난히 당선됐고, 이번에도 야당 후보가 대적하기 힘겨운 상대가 된 듯하다. 나는 그런 인물이 그렇게 오래 국회의원을 해 먹는 곳이 내 고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늘 자괴감을 느껴왔다. 깊숙한 곳에서 흐르는 진보의 피가 한 검찰공화국의 부역자에 의해 막혀있다는 사실이 심히 불편하다.


대정부 질문 중인 강릉 출신 김병주 의원(좌)에게 삿대질하며 항의하는 강릉 출신 권성동 의원(중앙).  


 후보 중 누가 되었든 강릉에서 출마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건들거리는  꼴통 정치인보기 좋게 꺾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김우영 후보는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농부가 밭을 탓해선 안 된다는 말도 있지만, 박토에서 양질의 작물이 날 수는 없는 법이다. 박토를 갈아엎어 옥토로 만들기 전에는 어디인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들이 어느 지역구에서 당선되든 검찰독재를 종식시키고 선진복지국가 건설에 기여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 글을 올린 다음 강릉여고 출신 김현 전 방통위 부위원장도 치열한 경선을 뚫고 민주당 안산을 후보로 결정되었다. 김현 후보의 건승을 다.

*4월 10일 총선 개표결과 김병주, 김우영, 김현 후보 모두 여유 있게 당선되었다. 세 분께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 큰 활약을 기대한다. 하지만 강릉에서는 그 원조 윤핵관의 5선을 막지 못했다. 척박한 땅에서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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