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원동호랑이 Oct 19. 2021

삶과 죽음 사이에 설원이 있다

<러브 레터>



    ‘오겡끼데스까.’






    설산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장면은 <러브레터>를 본 적 없더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유명한 장면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아주 단순한 계기 때문이었어요. 아무 생각없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둘러보던 중에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분이 이 영화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을 업로드한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댓글에 누군가가 ‘겨울 하면 꼭 생각나는 영화’라는 말을 달아놓았었거든요.



    그때는 겨울이었고, 저는 마침 볼만한 영화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러브레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일본 멜로영화를 별로 즐겨보지 않아서, 그 그림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평생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러브레터>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저 사랑 이야기일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집중했던 부분은 바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를 다루는 미묘한 서사였습니다.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어서 그런지, 제가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 때 그것은 언어의 형태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이미지나 느낌에 가까운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러브레터>를 주제로 글을 써보자, 했던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본 후 제 속에 남아있는 어떤 것을 최대한 이끌어내보고 싶어서요.







(*영화의 내용을 자세히 다루게 되니, 영화를 먼저 보고 읽는 것을 추천드릴게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것은 ‘닮음’입니다.



    와타나베 히로코는 2년 전 산을 타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연인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 못하고, 그의 졸업앨범에서 찾은 주소로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녀가 찾은 주소는 같은 반에 있었던 또다른 후지이 이츠키의 주소였고, 편지는 그 후지이 이츠키에게 배달되죠. 이름이 같아서, 이름이 닮아 있어서 일어난 조그만 해프닝이었던 것입니다.


(헷갈리지 않기 위해 앞으로는 히로코의 연인 후지이 이츠키(남)를 후지이로, 편지를 받은 후지이 이츠키(여)를 이츠키라고 표기하겠습니다.)


    오해를 푼 뒤에도 두 사람은 몇번의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이츠키는 연인을 떠나보낸 히로코를 위해 자신이 기억하는 중학교 때의 후지이를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그 애와의 기억은 그다지 좋은 추억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기억을 하나씩 되짚어가면서 관객도, 이츠키 자신도 깨닫게 되죠. 두 사람이 소중한 추억을 나누어 간직했음을 말입니다.


    후지이가 학교 도서실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책을 빌려서 대출카드에 자기 이름을 쓰는 장난을 좋아했던 것은, 그 자체로 러브레터였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쓰면서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이츠키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도서부 후배들이 전해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에 꽂혀있던 대출카드 뒷면을 보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편 히로코는 졸업앨범 속의 사진을 보면서 자신이 후지이의 첫사랑이었던 이츠키를 닮아서 첫눈에 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슬퍼합니다. 이 두 사람이 닮았다는 설정을 위해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1인 2역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은 정말 같은 사람인 것만큼 닮은 것입니다. 히로코는 ‘내가 아는 그의 세계는 아주 조금뿐’이라고 쓸쓸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히로코와 이츠키가 닮은 점은 한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히로코는 2년 전 연인을 잃었고, 이츠키는 10년 전에 아버지를 잃었죠. 이츠키의 아버지가 이전에도 지병을 앓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감기가 폐렴으로 번졌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도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히로코가 맨 처음 후지이(사실은 이츠키)의 주소로 편지를 보낸 것도, 그것이 '천국으로 편지를 보낸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후지이와의 관계를 끊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곧 마침표이고, 한번 찍으면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히로코는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스스로 찍은 마침표는 그저 사실 자체일 뿐입니다. 하지만 가까웠던 사람들 마음 속의 마침표는 각자 다르게 찍히게 되죠. 영화의 처음에 나오는 후지이의 3주년 추모식 장면에서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오히려 유쾌하고 가볍습니다. 당연히 추모식에 와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히로코의 말대로, ‘다들 저마다의 방법으로 꾸미고 있는' 것이죠.








    후지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학교에 가지 않고 있었던 이츠키를 일부러 찾아와서 반납할 책을 건넵니다. 그리고 현관 옆에 ‘상중’이라고 쓰인 채 붙어있는 종이를 보고 누가 돌아가셨냐고 물어보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조심스럽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츠키는 환하게 웃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왜 울지 않고 웃는 걸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가 아닐까요? 슬픔으로든 다른 사람의 존재로든 다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덮어두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저 마음 속의 일부로 남는 것이죠. 그리고 <러브레터>는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올리버 색스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어떤 다른 사람도 결코 나와 같을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결코 채울 수 없는 구멍을 하나씩 남긴다.’




    그리고 우리는 덮어놓은 그 구멍을 가끔은 들키기도 하고, 들추어보기도 하고, 혹은 아예 덮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츠키가 병원에 가서 10년 전에 아빠가 병원에 실려오던 모습을 본 것도 이츠키의 마음속 구멍이 들추어진 것이죠. 사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어 꿈속에서 마주한 장면이기는 하지만요.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야가 약간 뿌옇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희고 차가운 눈의 시린 푸른빛을 띠고 있어 신비로움을 조성하죠. 즉, 현실과 환상 사이의 구분이 잘 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후지이가 커튼 너머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연출은 <러브레터>의 이야기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교차점에는 죽지 않았지만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히로코는 아직도 후지이를 많이 좋아하는구나’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린 후지이의 어머니도, 이츠키가 고열로 쓰러지자 이츠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를 떠올리면서 패닉 상태에 빠지는 이츠키의 어머니와 할아버지도 그곳에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는 일은 죽지 않은 사람이 혼자 해야 합니다. 히로코 옆에 아키바가 있었던 것처럼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결국엔 혼자 하는 것이죠.


    후지이가 잠들어 있는 눈덮인 산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제발 돌아가자고 부탁하던 히로코는,  산을 향해서 ‘ 지내고 있나요? 저는  지내요.’ 라고 외칩니다. 그곳에서 마침표를 찍고, 그저 구멍으로만 남았던 후지이와의 기억을 마음 속의 일부로 간직하기로 합니다.


    후배들이 건네준 대출카드를 받고 신기한 마음에 히로코에게 편지를 쓰려던 이츠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역시 마음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영화는 끝이 납니다. 히로코와의 편지를 통해 이츠키도 어쩌면 영영 몰랐을 수도 있는 애틋한 추억을 마음 속에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신비로운 점은 끝났으면서도 끝나지 않고, 끝나지 않았는데도 끝나버린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의 모든 것은 끝나버립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설령 때를 알더라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후 슬픔이 머물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집니다. 하지만 추억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간직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러브레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