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한동안 '능력주의'라는 키워드에 꽂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전에 사두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를 읽었었는데요, 능력주의의 역사에 대해 엄청 자세하게 다룬 책이다보니 내용도 많고 어려워서 힘들더라구요.
그러고 또 뭘 읽을까 하다가 서점에서 자주 보였던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능력주의>는 사실 가치판단을 한다기보다는 여러 관점을 설명해주는 것에 가까워서, '착각'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본 능력주의에 대해서도 궁금했거든요.
이 책에서 제가 주목했던 부분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성서 속 신에 대한 해석과 능력주의의 연결성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던 게 초등학생 때니까, 나름대로 교회를 오래 겪었습니다. 그동안 접했던 신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 중에서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는데요.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책에서 언급되는 '권선징악의 주체로서의 신'입니다.
선과 악은 어떤 계시를 통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니 결국 우리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조차도 인간이 쓴 거니까요. 그런데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이 '그러니 신은 없다'는 무신론으로 이어지거나 그 생각 자체가 신앙의 장애물이 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건 '우리가 신을 파악하고 있다'를 전제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당연하게도 우리는 신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냥 믿는 거죠.
어렸을 때 <모노노케 히메>를 보면서 항상 '사슴신'의 존재를 이상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숲에 사는 모든 존재들이 사슴신을 절대신으로 생각하고 따르지만 정작 사슴신은 재앙신이 된 숲의 신들을 내버려두고, 인간들이 숲을 해치는 것을 막지 않고, 멧돼지 신 옷코토누시에게는 죽음을 주고 인간 아시타카에게는 삶을 주는 등 숲의 이익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인데요.
최근에 다시 <모노노케 히메>를 보고 느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신'을 정말 절묘하게 잘 표현했다고요.
세상에는 여전히 악이 있습니다. 만약 신의 역할이 권선징악이라면 납득이 되지 않는 점이기도 합니다. 숲의 신들도 우리와 똑같이 사슴신의 선택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슴신은 여전히 절대신입니다. 숲의 신들과 인간들은 사슴신의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챕터 2의 내용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저자는 성서 속에서 신이 내리는 구원의 의미를 해석하는 관점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능력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자연스럽게 풀어냅니다. 인간이 잘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능력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인간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뜻이니까요.
능력주의는 재능 있는 자에게 오만을, 재능 없는 자에게 사회적 존재로서의 권리의 박탈을 가져온다
학력주의 하면 우리나라를 빼놓을 수 없죠. 우리나라의 학벌에 대한 집착은 과열이라는 표현으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그 속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우리는 학력에 수많은 의미를 갖다붙이는 데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렸죠. '좋은 정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는 문장은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사실을 정확하게 꼬집습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을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캄핑(경쟁 시험의 일종) 문화의 등장은 대학이 경쟁적 능력주의의 기초훈련장과 같아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목표와 수단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다시 대학 역할이 더 넓은 범위에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학력을 부여하는 역할은 이제 너무 커져서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선별하고 분투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넘어버렸다.
이 책의 챕터 6인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의 일부분입니다.
얼마 전에 조금 충격적인 기사를 접했었는데요. 제가 입시를 치르던 때에도 이미 유명했던 수학 강사가 '수능이 7~8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고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https://www.chosun.com/national/regional/2021/09/03/LFFUZ4QCZBHUVBBY6CGZPBTO4E/
“수능 체계는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며 “7~8년 안에 붕괴 조짐이 보인다. 10년이 지나면 평가 양식이 바뀌고, 사는 세상이 너무 바뀔 거 같다. 이제 그냥 ‘펑’하고 터질지도 모른다”고 했다고 합니다.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던 일이 업계 종사자의 입에서 나오니까 와닿는 게 또 다르더라구요.
정말 오랫동안 수능은 우리나라 10대들의 인생의 목표 그 이상이었습니다. 저만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제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으니까요. 이제 그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붕괴되는 지금, 사회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다들 그 어느 때보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남고 싶다면 그 흐름에서 뒤처지면 안 되겠죠. 말그대로 무한 경쟁이네요.
역사는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가?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다'는 말은 역사가 점진적으로나마 정의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내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단순한 믿음에 불과합니다. 기술적으로 진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좋은 방향은 아닐 수도 있죠.
대중음악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는가? 왜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시대를 앞서간 음악' 같은 표현이 그토록 자주 쓰일 리가 없다. 예전의 음악들 중 대부분은 요즘 것보다 못하지만 일부 음악은 '예외적으로 마치 최근의 음악처럼'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 그 정도 의미이니 말이다.
모두에게 확실한 것은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슬퍼지지 않기는 매우 어렵다. 어쩌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잊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진 딱 그만큼의 희망을 어떻게든 상상해내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기하의 <상관 없는 거 아닌가?>의 일부분입니다. 이 책을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레트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친구가 이 내용을 말해줬을 때 말 그대로 무릎을 탁 쳤었어요. 우리가 역사의 방향을 인식하는 것에 대한 아주 근사한 해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난 김에 곧 읽어봐야겠어요)
그러니 몇십 년 후의 사회는 지금보다는 나은 모습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은 당연한 거겠죠. 그걸 위해서 뭘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저자의 논조가 아주 확실하고, 그게 또 제 생각과 맞닿는 지점이 많아 길고 조금 지루하긴 하지만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용도 크게 어렵지 않구요. 뭔가 반대되는 의견을 담은 책도 읽어보고 싶어져서요, 혹시 알고 계시다면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