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끗 다른 선생님

feat. 낭만에 대하여

by 시에나


지금도 초보 학원 강사지만 가르친 지 며칠 안 된 진짜 쌩초보였을 때, 한 여자아이가 문제집에 조그맣게 그려둔 그림을 봤다. 낙서치고는 꽤나 공들인 그림이었다. 내가 말했다.


“00는 영어도 열심히 하는데 그림도 잘 그리네~!”


별 뜻 없이 지나가며 한 말이었다. 그러자 그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며 하는 말이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과 다르네요? 00 선생님은 빨리 지우라고 하고, 00 선생님은 왜 문제집에 그림을 그리냐고 화를 냈는데 선생님은 잘 그렸다 칭찬을 해주네요.”


우선 다른 선생님들과 다르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예상치 못한 아이의 반응(나는 이 순간을 정말 사랑한다!)과 관찰력이 놀랍기도 했다. 그런데 ‘다르다 ‘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는 과연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 Unsplash


나도 다른 선생님들처럼 영어를 가르치려 그곳에 있다. 3인칭 단수, 불규칙 동사, 과거시제와 미래시제 등 … 내게는 익숙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낯설 지식을 열심히 가르친다. 소리 내 읽기 귀찮다는 애들에게 “너 한 줄, 나 한 줄 읽어보자.” 구슬려서 읽기도 열심히 시킨다. 꼬박꼬박 단어시험을 보고 틀리면 재시험, 다 맞으면 동그라미도 크게 그려준다. 학원에서, 학부모들이 내게 기대하는 바를 성심성의껏 수행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도 귀퉁이에 낙서 하나, 그림 하나 그리는 것쯤은 눈 감아주는 선생님이면 좋겠다. 그 안에 숨은 장난을, 한숨을, 답답함을, 귀찮음을 이해해 주는 선생님이면 좋겠다. 한 끗 다른 선생님, 성적만능주의와 무한경쟁이 판치는 한국 사교육 판에서 내가 품는 낭만이다.


“선생님, 저 주말이 너무 기대돼요.

유소년 축구 시합 있어요.”

“저는 한자 5급 시험 보러 가요.”

“그래? 꼭 이기고 와! 시험 잘 보고 와! “


금요일에 앞다투어 주말 계획을 알려주는 소년들을 격려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월요일에 만나면 어땠냐고 꼭 물어봐줘야지. 환한 웃음에는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하이파이브를, 잔뜩 실망한 얼굴에는 “괜찮아, 다음에 또 잘하면 되지!” 슬쩍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지. 이렇게 한 시절 잠시 다정함을 나눠 가져야지.


갑작스러운 전업을 고백한 글에 나를 오래 봐온 동생이 이렇게 썼다. ”언니는 어디든 자리 잡으면 마음을 다해 정성껏 가꾸는 사람“이라고. 정말 그런 사람이고 싶다. 어떤 말은 기도가 된다. 잠들지 못하는 밤, 부러 써둔다. 내 낭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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