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돌베개
선형제에게
끝이 없을 것 같은 더위가 지나고 이제 가을이 한창이야. 계절이 변하는 건 참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아들들은 이 계절을 어떻게 통과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매일 똑같아 보이지만 너희 안에서도 새롭게 뭔가가 달라지고 있겠지? 엄마가 이번 달에 읽은 책은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야. 그래, 안방 책상에 에 계속 놓여 있던 그 책 맞아. 그중에 너희들과도 나누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 물론 말로 할 수도 있지만 글로 써두면 나중에도 볼 수 있으니까. 아직 초등학생인 너희들이 읽기엔 어려울 테니 풀어서 설명해 볼게.
이 책을 쓴 강지나 작가님은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야. 강 선생님은 학교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울 방법을 고민하다 학교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해. 그러다 한 지역아동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아이들을 만나게 된단다. 다 빈곤가정의 형, 누나들이지. 그 후 6년에 걸쳐 빈곤 대물림에 관한 박사논문을 완성하고, 이어서 이 책을 쓰면서 십 대 청소년이었던 형, 누나들이 이삼십 대 청년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대. 그 시간이 무려 10년이야. 즉, 이 책은 강지나 선생님의 10년 종단 연구의 결과물인 셈이야.
책에는 소희, 영성, 지현, 수정, 현석, 혜주, 연우, 우빈 총 8명의 사례자가 등장해. 강 선생님은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듣고, 그 속에서 의미를 길어내지. 부모님이 이혼하시거나 몸이 아프시거나 알코올 중독이거나 가정폭력이 있거나 사업이 부도가 나거나... 이들이 처한 상황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어. 책을 읽기 전에는 가난한 아이들 이야기라고 해서 마음이 힘들 거란 각오를 하면서 읽었단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랐어. 개중에는 심한 사춘기의 방황을 겪은 사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 번듯한 어른으로 자란 거야. 빈곤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니 엇나갔을 거라고 단순하게 짐작해 버렸던 내가 부끄러워졌어. 대견함을 넘어 존경심까지 들더라.
책을 읽는 내내 엄마의 어린 시절과 너희들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어. 엄마가 대학생 때 일이야. 미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선발된 적이 있었어. 너무 기뻐서 할머니께 알렸는데 서류 준비를 하는 중에 다시 전화가 온 거야. 학비 내기도 빠듯한데 교환학생까지는 무리라고 안 가면 안 되겠냐고 말을 꺼내셨지. 집안 형편을 모르지 않았던 엄마는 “네...” 한마디로 대답하고 그 길로 가서 없던 일로 했단다. 그게 지금껏 마음에 남아. 책을 읽는 동안 적극적으로 기관의 도움을 요청한 지현이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과 용돈을 스스로 벌어서 충당한 영성, 원하는 꿈을 찾은 연우의 사례를 접하면서 그때가 떠오르더라. 나는 어렵게 온 기회를 왜 그렇게 빨리, 쉽게 포기했을까. 아르바이트를 하든, 부모님을 설득하든 원하는 게 있으면 좀 더 진취적으로 행동했으면 좋았을 걸 왜 그리 소극적이었을까. 책에 나온 아이들이 당시 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인데도 단순히 생존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어.
엄마는 평생 돈 걱정을 하면서 살았어. 당장 먹고살 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늘 빠듯했지. 친구들을 만나면 돈을 써야 하니 일부러 안 만난 적도 많았고, 대학원에 다닐 때는 곰팡이가 피고 꼽등이가 튀어나오는 월셋집에 산 적도 있어.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벌레가 없는 깨끗한 집, 샤워할 때 덜덜 떨지 않아도 되는 욕실이 있는 아파트에 살게 되었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단다. 너희에겐 처음부터 주어졌던 조건이겠지만 말이야. 때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너희를 볼 때마다 생각해. 결핍을 모르는 너희가 엄마의 지난날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가난한 집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을까?
엄마가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 풍요가 곧 행복이라고 속삭이는 세상이지만 살아보니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 이건 비밀인데, 행복은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단다. 때로는 결핍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독립적이고 속 깊은 사람으로 성숙시키기도 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이들보다 더 “단단한 내면과 성찰하는 힘(99쪽)”을 가지게 된 형·누나들을 보며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건 그 때문이야. 세상 좋은 걸 다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지만 이것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걸 알아. 너희들에게 최선의 지원을 하도록 노력하겠지만 못 해준다고 해서 그렇게 미안하거나 가슴 아파하지 않을 거야. 대신 언제나 너희들을 믿고 지지하는 사람이 될게.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나 쉽게 빈곤과 나태를, 성공과 성실을 동일시하곤 하지. 다들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고 믿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 곧 성실함의 잣대라고 생각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상황이 허락되는 건 아니야.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공부하는 학생과 아르바이트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시간을 쪼개서 공부하는 학생, 누가 좋은 성적을 받기 쉬울까? 한 사람의 조건과 환경은 그 사람의 능력을 백 퍼센트 발휘하는 데 도움닫기가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되기도 해. 너희들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늘 잊지 말기를 바라.
책 말미에 “사실 건강한 사회라면 ‘개인의 안락’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259쪽)”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어. 나는 이 문장이 건강한 사회뿐 아니라 건강한 개인에게도 적용된다고 믿어. 우리가 가진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때론 손해 보는 길 같겠지만 그게 너희의 인생을, 네가 속한 공동체를 아름답고 가치 있게 지켜줄 거야. 아직은 어린 너희들이지만 언젠가 엄마가 한 말이 이런 뜻이구나 이해할 날이 올 거야. 그때 이 책과 엄마의 말을 떠올려주렴.
너희들을 사랑하는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