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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Mar 07. 2024

나이가 꽤 들었습니다만?

《나이듦 수업》 리뷰

나이듦 수업

저자 고미숙, 장회익, 정희진, 김태형, 유경, 남경아

출판사 서해문집

출간일 2016-01-20

페이지 240


요즘 나는 낀 세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청년도 아니고 중년도 아닌 세대, 일터에서는 띠동갑이 넘는 동료들이 점점 늘어난다. 직장에 또래 동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었다. 진로 변경을 한 바람에 나이에 비해 커리어가 길지 않은 편이라 관리자급도 아니다. 관리자들이 젊은 세대 눈치를 보느라 그들에게 맡기기 애매한 업무를 낀세대에게 맡기면서 업무 과중이 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 세대 사이에 '눈치 없이 끼는 사람'이 될까봐 어울리지도 못하겠고 최소한 동료로서의 유대감을 갖기도 어렵다.

내가 청년 세대였을 때 나이가 벼슬인 양 행동하던 윗 세대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나이 먹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었다. 과연 내 아래 세대가 보는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떨까. 적어도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의 '저렇게'를 담당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생활권에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자꾸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요청받지 않은 충고는 하지 않아야 한다고 몇 번을 다짐해도 불쑥불쑥 오지랖이 튀어나오려고 해서 차단을 위해 더 거리를 두기도 한다. 백 마디 말보다 먼저 잘 걷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사는 방식이라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나를 고민하다가 이 책 《나이듦 수업》을 발견했다.


여섯 명의 강연자들의 나이듦에 대한 릴레이 강연 내용을 담은 책인데, 2016년 출간한 책이라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강연도 있었지만 몇몇 강연은 거의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읽어도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정희진 학자의 강연 내용은 정말 구구절절 맞말이었다. 근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생애주기에 맞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정상성 규범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는 부분은 몇 년 전부터 뼈저리게 느끼던 바였다. 몇 년 전에 진로를 변경할 때 나이 때문에 얼마나 많이 움츠러들어야 했는지 모른다. 특히 여성의 경우 나이로 인한 제한이나 차별이 더 심하다. 요새 고민하고 있는 주제였기 때문에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다.


자본주의가 새 패러다임을 맞으면서 일자리는 줄었지만 수명은 늘어났다. 돈 버는 시기는 짧아지고 남는 시간이 많아진 상황 속에서 나이듦은 여러 모로 더 힘겨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 일반적으로 건강 약자가 되어갈텐데 무위와 경제적 불안까지 겹치는 셈이므로. 게다가 동안이 칭찬인 극한의 외모주의 풍조는 말할 것도 없다.

(전략) 그러나 노인과 장애인, '뚱뚱한' 여성, 성적 소수자, 이들에 대한 차별은 바로 몸에 대한 비현실적인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몸은 모든 정치의 시작이죠. 우리는 육체적 고통, 신체적 비참함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도 (마음속으로는) 우아한 몸가짐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몸 밖의 대소변'을 수용할 때, 살아 있는 이웃들의 다양한 몸도 존중할 수 있어요. 인간이 사망하기까지 평균 투병 기간은 10년, 그 취약하고 '못생긴' 시절도 소중한 삶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미모가 최고 가치인 사회에서, 나이듦과 그에 따른 미추 관념을 바꾸는 것은 혁명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것은 노년만의 과제가 아닙니다. 지금 외모는 자원을 넘어 인격화되고 있어요.


김태형 사회학자의 강연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익히 잘 알려진 한국의 노인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을 들면서 그 원인을 분석했다. 높은 자살률의 원인을 빈곤에서 찾지만 더 가난한 나라의 자살률이 이렇게 높지 않다는 점을 들면서 그 원인이 심리 상태에 있다고 한다. 크게 자존감 상실, 심한 고립감, 허무함을 꼽았다. 한국 사회에서 자존감은 돈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가난은 자존감 상실과 이어진다. 이어지는 맥락으로 한국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고립을 의미한다. 돈을 벌려고 열심히 살아온 세대인 만큼 빈곤은 실패를 의미하므로 허무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노인이 된 나의 삶을 상상했을 때 노년의 가난은 사회적 죽음이라고 생각했기에 대비를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한 내 맥락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노년의 가난이 사회적 죽음이라는 공식 자체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가난한 노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녹록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가난 그 자체보다 심리적인 요인이 결국 우리를 사회적 신체적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아닐까. 이 강연에서는 '돈이 곧 행복'이라는 한국인의 무의식적인 신념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그런 신념을 갖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저는 노년기에 자기평가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 살았으면 됐다는 겁니다. 한국 같이 혼탁한 나라에서 나쁜 짓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으면 잘 산 거예요. 왜 돈 없다고 자기를 부정합니까? 돈 많지만 자기보다 훨씬 더럽게 산 인간들도 많은데. 돈은 행복이 아니고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더 이상 이 사회가 강요하는 기준, 돈이 곧 행복이라는 미신을 믿지 말고 자기를 긍정할 때가 왔습니다.


한국 노인 세대는 대체로 지배집단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이런 삶이 사람을 조금씩 비겁하게 만든다는 부분을 읽었을 때 충격과 함께 울컥함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기성세대의 비도덕성이나 패배주의를 경멸해 왔던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긍정의 시선으로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들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살아가면 갈수록 크고 작은 권력 앞에서 작아진 경험들, 불의에 저항해 봤자 소용없다는 무력감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지금의 노인 세대는 나쁜 분들이 아니라 아픈 분들'이라는 말은 통렬한 문장이다.

인간은 원래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유를 누릴 때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남의 눈치를 보고 무저항과 순종이 정신건강에 좋을 수 없다는 말은 큰 위로가 되었다. 불의에 남들보다 더 분노하는 내가, 나이를 먹어도 저항 정신이 꺾이지 않는 내가 이상한 걸까 고민하곤 했다. 모난 돌이라서 정을 맞는 건 아프다. 그런데 정을 맞지 않겠다고 나를 깎아서 둥글어지는 것도 결국 아프다면, 그냥 나답게 아픈 쪽을 선택하고 싶다.


그 외에도 공부 체질 만들기, 당사자 주도의 노년 문화 만들기, 인간관계 돌보기 등의 조언도 알찼다. 사실 공부 체질 만들기는 지금 잘 진행 중인데, 노년 문화 만들기와 인간관계 돌보기가 쉽지가 않아서 고민 중이다. 정성을 들이고 먼저 다가가고 소통에 노력할 것을 팁으로 얻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지긋지긋했던 것 중 하나가 생애 주기에 따른 정상성 규범이었다. 졸업-취업-결혼-출산처럼 생애 주기에 맞는 미션이 정해져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나도 숨막혔다. 사실 지금도 숨이 막힌다. 그나마 결혼-출산 과정은 필수 미션에서 빠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나이에 관한 제약은 여전히 존재한다. 진로 변경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나이에 대한 제약이었다. 30대가 넘어가면 진로 변경을 할 때 나이를 제일 먼저 고려한다. 100세 시대인데 30대에 진로 변경할 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절망적이었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아무래도 나이듦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이 책을 읽고 나이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생애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노년기를 잘 맞이하기 위한 마음가짐에 대해 배웠다. 가능한 한 더욱 나답게,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건강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만들겠다는 용기가 조금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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