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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Apr 26. 2024

이 망할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선언문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리뷰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편역자 김욱

출판사 포레스트북스

출간일 2023.06.21

페이지 264


요즘 출판계의 화두는 단연 쇼펜하우어다. 그 포문을 연 책이 바로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다. 아무래도 제목부터가 이 시대의 통각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인생이 힘들다는 각성, 힐링과 지금을 즐기고 소소한 행복을 찾자는 기조를 지나 이제 인생은 원래 힘들다는 메시지가 주목받게 되었다. 이 또한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유행의 하나일 수도 있다. 다만 그때그때 흐름의 변화를 같이 고민해 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원래 편역서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철학서라면 더욱 그렇다. 철학자의 글 속에서 맥락을 찾는 것부터가 철학서를 읽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편역자가 찾아 번역한 맥락을 읽는다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첫 부분을 읽자마자 무슨 책에 어떤 맥락으로 실렸는지도 모를 짤막한 글들이 실린 것을 보고 역시 편역서를 고르지 말았어야 했나 싶었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마음이 바뀌었다. 철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 같은 독자에게 딱 맞는 눈높이의 책이었고, 이런 책이 교양철학서로 있어줘야 일반독자가 철학에 접근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역자의 글에 쇼펜하우어의 일화가 실려 있다. 평소에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만약 태어났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차선이다."라던 염세주의 철학을 내세우던 쇼펜하우어가 콜레라 유행 때에 도시를 탈출했다는 이야기다. 이 일화에서 이미 이 시대가 쇼펜하우어를 소환한 이유를 말해주는 듯했다. 자살률 1위의 나라에 사는 한국인이지만 사실 살아남고 싶은 욕망이 크고, 그 대안으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알려고 한다는 일련의 상황이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 쇼펜하우어도 한국인도 입으로는 사는 게 고통이라고 소리 지르지만 그게 사실은 살고 싶다는 비명이라는 면에서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쇼펜하우어가 얼마나 이 세상을 싫어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삶이 왜 고통스러운지를 하나하나 들추어내는데 대부분이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 웃음이 날 정도다. 심지어 그가 증오하는 세상에는 인간, 그중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이 세상도, 국가도, 인간도, 나 자신도 다 끔찍하다. 얼마나 끔찍한지를 낱낱이 파헤친다. 원래 인생은 힘든 거라는 구태의연한 말이긴 한데 더 와닿는 이유는 얼마나 어떻게 힘든지를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인상적이다 못해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던 부분들을 아래에 발췌했다.

가진 자들의 머릿속에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노동을 전가하는 계획밖에 들어있지 않다. 국가는 노동자의 생활을 부유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데, 결과적으로 노동의 대가는 국가와 소수의 정치가와 기업가의 몫으로 떨어지고, 노동자에게는 힘든 과정만이 남겨진다.
가치를 몇 푼의 금화로 환산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은 비겁해지고 추해졌다. 가난이 죄로 여겨지는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비겁해진 인간을 이웃과 친구로 둬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편협해지고, 내 한 몸과 내 가족만 편하게 살면 된다는 이기심이 당연하다는 듯 통용되기까지 국가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전략) 우리는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을 용감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삶이 두려워 죽음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려워 삶을 선택한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죽음이 두려워 삶을 선택한 우리들도 용기가 없기는 자살을 선택한 자들과 다를 바 없다.

막연하게만 느껴오던 이 세상의 끔찍함을 관찰하는 시력이 갑자기 좋아진 듯한 명쾌한 통찰력과 단호한 시니컬함은 확실히 흡입력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알던 허무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다.


중요한 의문은 '그래서?'다. 그래 다 최악인데 그래서 어쩔 것인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염세적이지 않다.

행복이 인간의 목표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순간은 이미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살아야 하는데, 잘사는 것은 특수한 기술이나 기능의 점진적 향상이 아니다. 잘산다는 말은 인간성이 원활히 발휘되고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성이야말로 인간 행복의 시작과 끝인 셈이다.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순간이 이미 행복이라니. 허무주의의 대표주자가 했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말 아닌가. 심지어 인생이란 끔찍할 정도로 힘들다고 해놓고 어떻게 행복을 추구하라는 말인지 의아할 수도 있다. 후반부 <환상 속에 갇힌 어린아이로 살겠다>에 그 답이 나와 있다. 인생은 힘들고 기만의 연속이라는 사실 인식은 이미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만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겠다고 말한다. 바로 이 발버둥의 의지가 쇼펜하우어가 선택한 인간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인간성을 선택함으로써 많은 삶에서 많은 희생이 따를 수 있겠지만 그 모든 순간은 이미 행복이라고 말한다. 요즘 내가 가장 비중 있게 고민하고 있는 행복의 개념과 일맥상통해서 놀랐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다 보면 마치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는 선언문으로 보인다. 나도 함께 선언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이 망할 놈의 세상 속에서 그 기만성을 거부하는 의지를 가진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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