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두초록 May 26. 2024

미친 여자 만드는 사회

민희진 기자회견이 불러낸 트라우마

얼마 전 민희진 기자회견 관련 화두가 한국을 휩쓸었다. 연예계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조차도 모두 민희진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하이브의 지분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가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메시지가 남성 중심 카르텔 사회에서 여성 사회인이 겪어왔던 집단적 트라우마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느껴왔지만 명확하게 언어화하지 못했던 은은한 부조리의 실체를 드러내는 그의 호소는 공감을 끌어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보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미친 여자라고 말했다. 기자회견이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욕설을 했다는 이유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권력 불균형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기자회견이었다는 점과 약자의 저항이 고상할 수만은 없다는 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여론이 달라졌다. 연예기획사 첫 대기업집단으로 지정(지정 시점은 기자회견 이후이긴 하다)될 정도로 큰 기업과 자회사 대표의 분쟁이라는 부분에서 이미 권력 불균형을 짐작할 수 있다. 기자회견을 통해 젠더 권력이라는 층위가 한 겹 더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복합적 권력 불균형 속에서 약자는 고상하거나 우아하기 어렵다. 약자들의 고상하지 않은 치열한 싸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망각한다.


그를 미친 여자로 만든 건 무엇일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질문이 아닐까. 그를 미친 여자로 만든 건 자신들의 비도덕적인 카르텔에 편승하지 않는 여성을 견제하고 못 살게 구는 ‘개저씨’들 중심의 사회다.

직장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남성 중심 카르텔 한복판에 서 있다는 걸 의미한다. 결국 밥그릇 싸움과 직결되는 곳이 직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호형호제하며 술을 마시고 골프를 치러 다니면서 암묵적 연대를 공고히 할 때, 법카로 배민을 통해 밥을 먹어가며 늦게까지 일했다는 민희진의 증언은 여성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구도다. 이마저도 민희진이 순화해서 말한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유능한 여성은 그들의 무능함과 비도덕성을 부각하는 데다가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에 위협적이다. 그래서 권력과 수적 우위를 이용해 배제하고 괴롭힌다. 괴롭힘은 지속적이고 교묘하기까지 하다. 약자의 입장에서는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괴로운 상황에 대해 말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예민하다’ ‘감정적이다’ 류의 가스라이팅이다. 미치게 만든 장본인들이 그렇게 말하니 더 미칠 노릇이다. 사회가 미친 여자를 만드는 메커니즘은 이렇게 작동한다.


비도덕적인 개저씨들의 카르텔에 편승하느니 미친 여자가 되겠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많이 있어야 이 카르텔을 깰 수 있을 테니까.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여성들’로 덧붙인 이유는 중심 권력에 동조하는 여성들이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우 복잡한 이유로 약자 여성들에게는 오히려 남성보다 더 무력감을 주기도 한다. 강자의 모습이 단순한 편이라면 약자의 층위는 매우 복잡해서, 다른 층위의 약자들이 더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도 하므로.

미친 여자를 만드는 건 다름 아닌 미친 사회상이다. 성별 간 임금 격차 1위, 임원 및 관리자 여성 비율 최하위 같은 몇몇 지표만 봐도 명징하다. 이 미친 사회에서 자기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가다 보니 미친 여자들을, 응원한다. 언젠가 응원하지 않아도 될 날이 올 때까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나답게 불행해지기로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