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래서 저는 픽했습니다> 리뷰
그래서 저는 픽했습니다 だから私は推しました
방송기간: 2019.07.27 ~ 2019.09.14
각본: 모리시타 요시코
출연: 사쿠라이 유키, 시라이시 세이
* 해당 리뷰는 드라마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다들 무언가의 오타쿠인 시대라고들 말한다. 대상은 연예인 같은 인물일 수도 있고 동식물일 수도, 물건일 수도, 영화나 스포츠 같은 콘텐츠일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애정을 쏟고 몰입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전 세대의 관심이 생계나 가족에 쏠려 있었다면 요즘엔 개인의 삶 쪽으로 초점이 바뀐 것과 관련이 있다. 피로 이어진 존재가 아니어도 애정을 가지고 몰입하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걸까.
<그래서 저는 픽했습니다>는 직장인 여성 엔도 아이(이하 엔도)가 지하돌(메이저 데뷔를 하지 않은 소규모 회사의 아이돌)에 빠져 여러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다. 누군가의 덕질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내용이라는 입소문이 나 있는 드라마였기에 흥미가 생겼다. 지하돌 오타쿠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했다. 마이너 문화를 다룬 유쾌한 B급 드라마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어둡고 진지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가족도 친구도 아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시간과 돈을 들여 ‘덕질’할 수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저는 픽했습니다>의 엔도는 자신 없는 모습으로 무대에 서는 쿠리모토 하나(이하 쿠리모토)를 보고 자신과 겹쳐보게 되면서 쿠리모토의 팬이 된다. 어쩌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내 맘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자신만의 해석이 가능하고, 나쁘게 말하면 맘대로 해석이 가능하다.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성립되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지하돌의 경우 거리감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이돌과의 거리감과는 차이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 지하돌을 선택한 이유도 거리감의 균형이 깨짐으로써 생기는 서사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팬과 아이돌의 관계 또한 이 드라마의 중심 내용이겠지만 나는 앞 세대 여성과 뒷 세대 여성 사이의 서사에 주목했다.
쿠리모토의 팬이 된 엔도는 더 많은 사랑을 받는 아이돌이 되려는 그의 꿈을 응원한다. 꿈을 향해 노력하는 쿠리모토의 모습을 보고 힘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지하돌이라 부르는 인디 아이돌 산업 시스템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쿠리모토에게는 체키권(사진을 같이 찍을 수 있는 티켓)을 독점하고 고가의 물건을 사주며 가스라이팅하는 악성 팬이 있다. 엔도는 쿠리모토를 위해 시스템을 고치려고 나선다. 체키권을 개인당 구매에서 그룹당 구매로 바꾸자 결국 본인의 뜻대로 할 수 없게 된 악성 팬은 라이브장에서 모습을 감춘다. 다른 팬이 생기지 못하게 했던 독점 구매는 없어졌지만, 쿠리모토 입장에서는 당장의 금전적인 수입이 줄어버렸다.
쿠리모토를 위해 시스템을 바꿨지만, 결국 이로 인해 그는 아르바이트를 늘리게 되고 꿈의 무대에 서기 위한 연습에 지장이 생긴다. 보다 못한 엔도는 쿠리모토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기 위해 노출을 하는 인터넷 방송을 한다. 엔도는 쿠리모토가 대상이나 상품으로서가 아닌, 자아를 실현하는 주체로서 살아가기를 원해서 시스템을 바꿨다. 하지만 그 결과 오히려 쿠리모토가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 힘겨워진다. 작은 기획사의 체키권 정책이 아니라 방송국과 아이돌 산업이라는 거대하고 정교하게 짜인 카르텔 안에서 엔도가 무언가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 결국 엔도가 선택한 방법 또한 여성 대상화 시장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노출 방송이라는 점이 정말이지 치가 떨리도록 상징적이다. 엔도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엔도의 덕질이 바로 자기 투영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아직 가능성이 펼쳐져 있는 또 다른 자신으로서 쿠리모토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꿈을 무리해서라도 응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부조리를 바꿔야겠다고 (조력 정도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건 팬 중에서 엔도뿐이라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엔도를 제외한 서니사이드업의 대표 팬들은 모두 남자다. 단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 드라마를 앞 세대와 뒷 세대 여성 간의 서사로 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 또한 여성 아이돌을 좋아한 적이 있기 때문에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사실 공감이라기보다 거의 트라우마 수준이었다. 소위 말하는 본업(노래, 퍼포먼스)을 잘하는 것은 물론 캐릭터성도 확실하고 재능과 매력을 가진 이였다. 운이 따라준다면 자기 분야에서 꽤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갖고 응원했다. 현실은 쉽지 않아서 결국 생각만큼 잘 되지 않은 채로 아이돌을 그만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과 임신 소식을 들었다. 개인으로서 그가 행복한지 여부와 그가 지향하는 자아실현이 어떤 것인지 나는 평생 알 수 없다. 다만 그렇게나 아이돌로서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커리어를 중단했다는 점이 씁쓸했다. 내가 멋대로 그를 통해 대리 자아실현의 기쁨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엔 그저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는 입장에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어린 나이의 아이돌은 딱 맞는 투영 대리인이다.
어느새 앞 세대에 가까워진 나는 사회에서 만나는 뒷 세대 여성을 대할 때 애틋한 마음이 든다. 가끔 그들에게서 과거의 내 모습을 발견할 때 더욱 그렇다. 여성으로 살아가기 척박한 세상에서 꿈을 꾼다는 것이 얼마나 눈부신 일인지, 동시에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응원하고 돕고 싶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힌다. 드라마 속 아이돌과 팬을 착취하는 방송국과 연예 산업의 시스템처럼 기득권들이 만들어 놓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은 개인이 상대하기에는 거대하고 견고하다. 게다가 상대가 나의 도움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나만큼 연대할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가늠하기가 가장 힘들다.
여성으로서 겪는 부조리를 같이 없애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이건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연대가 필요하다. 약자들에게 있어 누군가를 믿고 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믿음의 도약을 시도하되 과한 기대나 자기 투영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적당한 거리감을 의식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저는 픽했습니다> 결말 부분에 엔도가 쿠리모토를 감싸다가 사건을 겪은 이후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는 대사가 있다. 이제 쿠리모토가 아닌 엔도 자신의 꿈을 찾겠다는 선언이다. 쿠리모토 또한 엔도를 위해 엔도와의 만남을 일부러 피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적절한 거리를 찾아간다. 각자의 삶을 살면서 적당히 멀찍한 곳에서 서로의 힘이 된다. 적당한 거리감을 재는 건 언제나 어렵다. 적어도 부조리한 시스템에 동조하며 여성을 착취하는 구조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사람만은 되고 싶지 않다고, 주문처럼 되뇌어 본다.